길뜬별 | 남도 순례길 6 – 홀로 걷다. 낙엽 따라 비우며
# 지난 이야기
6월, 해남~보성 18번 국도+보성~하동 2번 국도+하동~구례 19번 국도
7월, 보성~구례 18번 국도
8~9월, 해남~진도 18번 국도
10월, 땅끝천년숲옛길을 걸었다.
☆ 바위산을 타다
2021년 11월 1일 월 미황사~도솔암~마봉리주차장~도솔암~달마산~부도전~미황사 / 땅끝천년숲옛길 1코스 19km
도반으로부터 소포로 온 가을빔을 입고 길을 떠났다.
아침 9시, 미황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부도암 가는 길로 들어섰다. 해남에서 잇고 있는 땅끝천년숲옛길 1코스였다.
숲에 들어서자 송하와 나무가 말했던 “맨발로 2~3km 걸으면 참 좋아요.”가 떠올랐다.
등산화와 양말을 벗어들었다. 땅의 기운을 맨발로 느껴보았다. 차갑고 촉촉하고 따갑고 탄력 있기도 했다.
맨발로 30분을 걸었으니 2km를 채 못 갔을 즈음, 돌들이 가득한 너덜구간이 장관으로 펼쳐졌다. 맨발로는 흙보다 바위를 밟는 게 더 편안하다. 거기 좀 앉아 해남 땅을 내려다보았다. 돌산에 앉아 돌이 굴러 내려오지 않을까 불안하지 않은 게 신기했다. 흙 묻은 발을 양말로 닦고 등산화를 신었다. 속도를 내지 않으면 그날 안에 예정했던 땅끝까지 가기 어려웠다. 거기서 숲길로 몇 걸음 떼자마자 “악” 비명을 질렀다. 오른쪽 땅바닥에 스르륵 뱀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방금 신발 신은 게 선견지명이었던 걸까, 다행스러웠다.
맨발로 걷다
양 갈래 길에서 삼나무 숲을 지나 미황사에서 3.65km 정도 지점에서 도솔암 이정표가 나왔다. 0.25km면 250m. 평지에선 몇 분이면 갈 거리지만 나는 도솔암이 얼마나 높은지 알고 있었다. 차로 빙 돌아가는 그곳을 걸어서 올라가려면 암벽 수준일 것이었다. 게다가 샛길로 새서는 그날 땅끝까지 가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혼자인 그때가 아니면 그 길로 도솔암에 가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산길을 택했다. 역시나 밧줄이 있었다. 오르고 또 오르니 도솔암이 있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조계사 말사 달마산 도솔암은 통일신라 말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 기도의 도량이다.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이 미황사 창건 전 수행 정진했다는 암자라고 한다. 조선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패배하고 해상로가 막혀 달마산으로 퇴각하던 왜구에 의한 화마를 면치 못했는데, 2002년 오대산 월정사 법조 스님에 의해 복원되었다고 한다.
깎아지른 절벽 위 암자 앞 댓돌에 앉아있는데 오른쪽 옆에 있는 팽나무 가지 사이로 얼굴이 하나 보였다. 부처의 얼굴 같기도 하고 스핑크스의 얼굴 같기도 했다. 바위가 있어 팽나무가 외롭지 않고, 팽나무가 있어 도솔암이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바위 얼굴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정오가 지나 있었다. 그곳에서 그날 첫 요기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월요일인데도 방문객이 그치질 않았다. 올라갔던 길을 내려갔다. 올라갈 때 봐 둔, 커다란 바위 아래 암자 터 같은 데 앉아보았다. 고요하고 편안했다. 비박을 해도 좋을 자리였다. 그곳에서 전날 싸둔 마른 김밥을 통째로 씹었다. 도솔암 위는 사람들 발길이 그치지 않았지만 바로 아래 바위 밑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리는 얼마 차이나지 않지만,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인간 세상에 살면서도 속세를 떠난 듯한 그런 곳에 나도 자리 잡고 싶었다.
다시 땅끝천년숲옛길로 내려와 임도 끝까지 걸었다. 콘크리트 길이 나왔다. 맞은편 숲길에는 밧줄로 통행 제한이 되어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일단 위로 향했다. 얼마를 걷다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마침 내려오는 차량 탑승자에게 물어보니 위로 올라가면 도솔암만 있다고 한다. 내려가면 태워주겠다고 했는데 사양하고 올라가다 길을 못 찾고 결국은 다시 아래 마봉리 약수터와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갔다. 도솔암 3km 대형 이정표가 서 있을 뿐 그 외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올라갔다. 1km쯤 갔을 때 아래에서 차량이 올라왔다. 도솔암 가시면 좀 태워달라고 했다. 포항에서 오신 부부였다.
도솔암에서 왼쪽으로 다시 내려가 땅끝천년숲옛길로 갈 수 있었고 오른쪽으로 4.3km 가면 미황사란 이정표가 있었다.
오후 2시 11분. 가보지 않은 길로 가보기로 했다. 이것은 커다란 실수였다.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수없이 반복하는 데다 지형도 흙보다 암석이 많았다. 생각해 보니 미황사에서 보이던 그 산은 기암괴석이었다. 그 뾰족뾰족한 바위들을 타고 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4.3km면 평지에선 한 시간이면 족히 가는 거리지만 산 위에선 전혀 달랐다. 이미 10km 이상 걸은 후였고, 달마산 길에 오르기 시작할 때부터 시원찮던 무릎에 30분이 지나자 통증이 심해졌다. 바위 위에 앉아 양 무릎에 파스를 붙였다. 그때만 해도 어지간히 가면 내려갈 줄 알았다.
세 시쯤 되자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의지할 데라곤 나뭇가지에 묶여있는 빨갛고 노란 ‘한국고갯길’ 리본뿐이었다. 배터리 닳을까 봐 전화도 할 수 없었고 물은 300ml 텀블러에 절반 정도 남은 상태. 배낭에 먹을 거라곤 귤 한 개와 미니 과자 한 봉과 커피 사탕 몇 알. 물과 식량도 부족했고 스틱도 없는 상태였다.
3시 24분. 2.2km를 왔고 달마산 정상까지는 2.5km. 길은 평평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햇빛에 노란빛이 많아지면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동백꽃 한 송이를 보았다.
11월 1일에 동백이라니.
올봄 고창 선운사에서 그렇게 기다리던 동백을 가을 해남 달마산에서 만나다니 순간 기분이 살아 올랐다.
“동백, 안녕? 고마워! 고마워!”
나는 뽀뽀를 몇 번이나 날리며 벌이 꿀을 빨고 있는 동백에게 미소를 지어 보냈다.
안녕, 동백
3시 42분. 도솔봉 주차장 3.1km, 달마산 정상 2.3km 지점인 하숙골재. 간신히 절반을 넘었다. 거기서 내려갔어야 했다. 그런데 그냥 전진했다. 곧이어 매우 불안해졌다. 그런데 저 앞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건장한 남성 셋이 소매 없는 윗옷에 반바지 차림으로 스틱을 잡고 나는 듯 돌진해 왔다. 그중 가운데 사람 팔뚝엔 시커먼 문신이 가득했다. 거칠어 보이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깊은 산에서 사람이 그렇게 반갑긴 처음이었다. 나는 그들이 지나온 길이 어떤 형태인지 물었다. 지금까지 온 길이 만만치 않다고. 맨 앞에 있던 흰 머리를 뒤로 꽉 묶은 남자가 말했다.
“산에 혼자 다니시면 위험해요. 이제 곧 해 떨어질 텐데 빨리 내려가세요.”
맨 뒤의 남자가 말했다.
“가다 보면 의자가 있고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어요. 그 길로 내려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는 곧 의자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거기서부터는 더한 난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밭사거리에서 길을 못 찾고 헤맬 때는 소리쳤다.
“아~ 내려가고 싶다!”
가도 가도 끝없는 바위의 연속이었다. 밧줄 타고 기어오르면 밧줄 타고 내려와야 했다. 이러다 구조 요청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헬기 착륙지도 없는 바위산 위에서 말이다.
대책 없는 바윗길
4시 30분. 겨우겨우 대밭삼거리, 의자와 미황사 부도전 0.8km, 달마산 정상 1.2km 이정표를 보았다. 그제야 안심이 됐다.
오후 다섯 시. 다리를 잡아끌 듯 움직여 겨우겨우 부도전까지 내려왔다. 평지에선 4~5km를 한 시간에 걷는데 3km에 세 시간이라니. 그런 길인 줄 알았다면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큰일 날 뻔한 겁도 없는 산행이었다. 도보 계에는 19km. 거리고 뭐고 당분간은 달마산에 발 들일 마음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며칠간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반가운 이정표
나중에 사진을 자세히 보니 도솔암 이정표에 미황사 4.3km 아래 4시간 소요라고 써있었다. 나는 4.3km만 읽고 4시간 소요는 무시했던 것이다. 우리 뇌는 읽고 싶은 것만 읽게 하는 기능이 있나 보다. 편의에 의한 선택이었다. 합리적 사고가 불가능해질 때 그리고 그것이 위험을 초래할 때 왜 그런지 잠시 멈춤이 지혜다. 그건 마음의 여유에서 나온다. 가끔 모험심과 주의력 결핍을 혼동할 때가 있다. 그런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다독인다.
‘그래도 11월에 동백꽃을 보았잖아.’
미황사 달마산
☆ 길치의 걷기
11월 8일 월 백련재~녹우당~남도오백리길~백련재/양촌제~북일초등학교 8.2km
비가 꽤 많이 내렸다. 하루쯤 쉬려고 ‘월성 2, 3, 4호기 조기폐쇄’ 조끼를 입고 산책하듯 우산을 쓰고 녹우당까지 갔다. 그런데 일단 나가니 마을 앞 논까지 걷게 됐다. 새 점퍼에 비 맞는 게 싫어 다시 백련재로 들어왔다. 그새 3.3km를 걸었다.
낡은 점퍼에 우비를 입고 본격적으로 길을 나섰다. 차를 타고 땅끝천년숲옛길 다산초의교류길을 찾아 나무 지도에서 보았던 양촌제로 갔다. 넓고 시퍼런 물이 추워 보였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소재화장실에 들러 찻길을 따라가는데 빗물인지 눈발인지 알 수 없는 굵기의 물질이 우비에 부딪혔다. 기운을 돋우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걷다가 가끔 부르는 이 노래는 김남주 시의 노래이고, 나는 김남주 시인의 고향인 해남 땅을 걷고 있었다.
두륜중학교 앞에서 처음 보는 이정표가 나오자 이상해서 지도를 켜보았다. 북쪽으로 가야 하는데 남쪽으로, 완전히 반대 길을 5km 걸어온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투구봉이 보였다. 허탈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길치인 내 부주의함에 넌더리가 났다.
그런데 두륜중학교 앞 논에 글씨가 보였다.
‘100년 학교를 살리자.’
뭔가가 가슴에서 불뚝 솟아올랐다. 이걸 보려고 엉뚱한 길을 온 것인가?
(후에 두륜중학교에 전화로 알아보았다. 옆 북일초등학교가 100년이 되었는데 학생 수가 줄어 분교화, 폐교될 위기라 ‘작은학교 살리기’ 프로젝트 진행 중이라고 했다. 학령기 자녀가 있는 세대에게 빈집을 임대해 귀농, 귀촌할 수 있도록 하는 학부모설명회를 12월 3일에 한다고 한다.)
100년 학교를 살리자
삼거리에서 우회전해서 북일초등학교 앞 정류장에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맞은편 학교는 외관에서도 역사가 보였다. 화장실 가고 싶을까 봐 물도 맘껏 못 마시고 목만 축였다. 정오가 한참 지났는데 버스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차들에게 몇 번 손을 들어도 그냥 지나갔다.
다시 온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륜중학교 앞에서 SUV 차량 한 대가 창문을 내렸다. 양촌제 가시면 태워달라고 했다. 경기도에서 이사 오셨다는 아저씨는 오고 가는 사람들을 자주 태워주신다고 했다.
“혼자 다니면 무섭지 않아요? 친구 없어요?”
“그러게요. 친구도 없네요.”
양촌제에서 내렸다.
거기에서 내가 본 이정표는 ‘땅끝천년숲옛길’이 아닌 ‘산자락길’ 이정표였다. 나는 차를 타고 대체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는지 찾아가 보았다. 삼산면 어디쯤에서 백호리로 가는 땅끝천년숲옛길 이정표를 발견했다. 하지만 양말이 젖어서 일단 백련재로 철수. 다시 나가려고 했으나 라면을 끓여 먹고는 따뜻한 방에 주저앉았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 부주의함과 무조건 직진에 대하여.
어차피 땅끝천년숲옛길을 다 걸은 후에 이날 걸었던 길을 걸을 예정이었지만 계획했던 길이 아닌 길을 들어섰으니 실수를 인정해야 했다. 가다가 아니면 말고 하는 방식은 혼자일 때는 개고생이고 동행이 있을 때는 민폐다. 누군가 곁에 있을 때는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훨씬 신중해진다. 그러나 혼자일 때는 고생을 해도 나만 하는 것이니 별 고민 없이 선택한다. 이 즉흥성으로 인해 연 2주 고생하고 있다. 내 맘대로 걷고 내 맘대로 쉬고 내 맘대로 노래하는 혼자도 좋지만, 이렇게 고달플 때는 길치인 나를 도와줄, 그리고 내가 좀 더 신중해질 수 있도록 함께 길을 찾을 도반이 있었으면 좋겠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지도도 틀림
11월 15일 월 평활리 녹산길~상가리~백호리~탑동마을~세곡재~학동리 / 땅끝천년숲옛길 3코스 15km
날이 갈수록 늦게 일어난다.
지난주 알아두고 온 땅끝천년숲옛길 3코스 중간에 차를 세우고 부리나케 걷기 시작했다.
드디어 다산초의교류길 끝자락을 걷는다. 이번에는 이정표를 놓치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걸었다.
상가저수지와 백호저수지를 지나 양 갈래 길이 나왔는데 아무 데도 이정표가 없었다. 망설이다 우측으로 향했다. 그 길이 더 오래돼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백호리에서 이정표가 나왔다. 대산리에서 탑동마을을 찾아 걸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두 시간 넘게 8km를 주파했다.
그런데 K-MAP에 표시된 곳은 탑동 5층석탑이 아니라 한우양돈농가였다. 그래도 지도만 믿고 뚝심 있게 올라갔다. 축사를 지나 세 갈래 길을 다 올라가 봤지만 모두 무덤뿐이었다.
마을로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5층석탑을 물어 찾아갔다.
석탑을 보는 둥 마는 둥 옛길 종점을 물었다. 알려준 길로 갔는데 다시 축사였다.
아무 데도 길이 없어 다시 내려오는데 마을에서 사람들이 나를 부르고 손짓하더니 급기야 남자 한 분이 삼륜 모터바이크를 타고 와서 왜 다른 길로 가냐며 고개로 가는 둘레길을 알려줬다.
오르막길이 나오자 1km를 묵묵히 올랐다. 콘크리트 길이 끝나고 4차선 정도 예정인 새까만 아스팔트 길이 나왔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낡은 장승에 ‘땅끝천년숲옛길’이라고 써있었다. 이정표는 없었고 나무 지도도 없었다.
새로 깐 아스팔트로 올라가 재를 넘어가 보았다.
저 멀리 삐죽삐죽한 산 능선이 보이자 뭉클했다. 그 아래로 저수지도 보였다.
저 너머 어디쯤 다산초당이 있겠지. 초의가 찾아가던 그 집이. 200년 전 그에게 찾아가기 위해 초의가 걸었을 이 길을 내가 걸어왔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돌아섰다. 해남 마을이 눈 아래 펼쳐졌다.
강진의 푸르르고 빽빽한 풍경과 달리 황금빛 너른 들판에 인가가 평화로웠다.
해남의 초의는 강진의 다산을 찾아가는 설렘과 일지암으로 돌아가는 안도감 중 무엇이 더 좋았을까?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집으로 돌아간 초의는 차를 덖고 공부하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지으며 다산을 다시 만날 때까지 자신을 얼마나 정진시키려고 애썼을까? 다음에 만날 때는 더 나아진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얼마나 불철주야 노력했을까?
그러기 전에, 다산을 만나고 돌아오는 고갯길에서 그가 느꼈을 감정이 몰려왔다.
그동안의 자신을 다 보여주고 더 발전한 모습으로 나아가기 전 유일한 휴식이었을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집으로 가는 경계인 강진과 해남의 세곡재.
다시 만날 님을 그리며 그 님에게 다시 가기 위해 잠시 돌아서는 길.
그 고갯길 위에서 나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돌아가는 길
☆ 두려움 뚫고 완주
2021년 11월 22일 월 마봉리주차장~도솔암 가는 길~땅끝전망대~땅끝탑 / 땅끝천년숲옛길 1코스 15km
차가 흔들렸다.
오전 9시 즈음, 도솔암 주차장에는 바람이 거셌다. 온종일 거기서 언제 돌아올지 모를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내 차 탈핵브리드가 얼마나 불안할까 생각하니 도저히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다시 산 아래로 3km를 내려가 도솔암 쉼터 주차장에 주차하고 걸어 올라갔다.
차로 올라갈 때부터 두려움이 엄습했었다. 3주 전 조난 직전에 내려온 달마산의 공포가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빈속에 차 안에서 먹은 단팥 가득한 초당커피빵이 얹힌 듯했다. 새벽 5시 반까지 글을 쓰고 잠시 눈 붙였다가 8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나왔으니 신체 상태도 그리 좋진 않았다. 그래서 괜히 무리하다가 지난 달마산행 꼴이 될까 봐 망설였다. 그러면서도 한 발 한 발 1.7km를 올라갔다.
그렇게 달마고도 사이의 임도를 지나 땅끝천년숲옛길 이정표가 있는 길로 들어섰다. 산자락길과 남파랑길과 천년숲길까지 우후죽순처럼 이정표가 남발돼 있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걸어야 했다. 지난 양촌제 발 실수를 또 해서는 안 되었다.
걷다 보니 문제가 여러 가지였다.
첫째 바람. 바람이 너무 거세어 북서쪽 길이나 능선을 따라 걸을 땐 굉음과 함께 몸이 약간 밀릴 정도였다. 따뜻한 해남이라 방심하고 얇은 내복에 여름 등산복에 가을빔을 입고 나와서 계속 걷는 데도 추웠다. 바람 소리인지 바람이 닿은 나무 소리인지 엄청난 소리가 레퀴엠처럼 으스스했다.
둘째 낙엽. 낙엽이 쌓여 길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리막길에선 미끄러져 위험했다.
셋째 스틱. 숲길이 산에 있음을 망각하고 오솔길이나 나무 데크 길을 연상한 것 보면 내 뇌는 어지간히 주관적이다. 차 트렁크에 스틱이 있는데도 챙길 생각을 못 했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산길에 낙엽으로 미끄럽기까지 하니 긴장한 몸의 무리가 무릎으로 몰렸다. 이정표 상 9.8km면 평지에 비해 훨씬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무릎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땅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짚고 걸었다. 처음은 툭툭 부러졌고, 두 번째는 더럽고 짧았으며, 세 번째는 약간 굵었지만 단단했다. 예전 같으면 지팡이에도 의리를 지키겠다고 처음에 결정한 것을 끝까지 들고 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 맞는 걸 취하는 게 미안하지 않았다.
땅끝 5km를 앞둔 이정표 옆에서 작은 봉지의 에이스 크래커와 큰 귤 한 개와 물을 조금 마셨다. 윙윙 불어대는 찬바람 때문에 한랭 두드러기가 피부 위로 울뚝불뚝 올라오며 여기저기 가려웠다.
다시 걸으니 왼쪽으로 바다가 보였다. 오른쪽에 보일 때도 있었다.
아무도 없는 숲길을 ‘월성핵발전소 2,3,4호기 조기폐쇄’ 조끼 입고 걷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나 좋아서 걷는 이 길에 무슨 엄중한 의미를 부여하나. 걸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숲길에서 임도가 나와 길이 끊긴 듯하면 이어지고 이어지기를 몇 번. 나뭇가지에 묶인 리본에 의지해 길을 더듬어 가는데 땅끝호텔 직전에 누군가 뒤에서 걸어왔다. 대형배낭에 스틱 두 개에 스마트 폰으로 길을 찾으며 걷는 품이 제법 걸어본 사람 같았다. 나는 일부러 정자에 올라가 속도를 늦춰 그를 먼저 보냈다. 뒤에서 모르는 사람이 따라오면 불안해서 속도를 올려야 하기에 양보하는 게 편했다.
다 온 것 같으면 더 가고 더 가서 마침내 지난 6월 중순에 무작정 도착했던 땅끝전망대에 다시 올랐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지였던 피니스테레의 일몰과 견줘 출발지라 더 장엄했던 그날의 분위기가 생생했다. 막막하기만 했던 그날로부터 5개월 후인 지금 내가 해남에 거주할지 그 누가 알았으랴.
희망의 시작 첫땅
거기서 500m 계단을 하염없이 내려가 땅끝탑으로 갔다.
한반도의 시작점인 그곳은 처음이었다. 바람이 더욱 거세지며 비도 뿌렸다. 거기서 600m를 더 가면 연리지가 있다는데 갈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바닷바람은 거셌고 다리도 아팠다. 거친 날씨 때문인지 완주라는 감격보다는 싱숭생숭 불안이 더 컸다. 그때 먼 곳으로부터 타전이 왔다.
땅끝탑+삼천리 한반도 시작점
땅끝 천년숲 옛길
다시 땅끝마을까지 500m를 차근차근 걸어갔다. 나무 지도를 보니 완주가 맞았다.
지난 6월에 보고 간 한반도 최남단 땅끝 안내문과 정자를 지났다. 그때 있던 출입금지 비닐 끈은 없었다.
비가 흩뿌렸다. 춥고 배고프고 힘들고 지쳐서 따뜻한 국물을 먹고 싶었다. 그런데 미황사 창건 설화에 나오는 갈두항 앞길로 나오자마자 버스가 왔다. 무조건 탔다. 도솔암을 물어보니 산정에 가서 택시를 타란다. 송호 해수욕장을 지나 조금 가니 도솔암 이정표가 보여서 걸어가겠다고 내렸다.
그런데 이정표 아래 작게 7.8km라고 써있었다. 내리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텅 빈 길을 걷는 수밖에 없었다.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파란 트럭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절박했던 나는 양손을 흔들어 세워서 도솔암 쪽으로 가느냐고 물었다. 나처럼 형광색 조끼를 입은 젊은이는 한전 자회사 직원이었다. 전기공사 쓰레기를 치우러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도솔암 가는 길에 전기공사가 한창이었다.
트럭에 오르자마자 빗줄기가 억센 소나기로 돌변했다. 산에서부터 휘몰아치던 바람은 비구름에 의한 것이었다. 그날따라 우산도 우비도 없어서 만약 그 비를 다 맞았다면 나는 감기에 걸렸을 것이다. 젊은이는 공사현장에서부터 걸어가겠다는 나를 친절하게 주차장까지 태워주었다. 배낭 주머니에 있던 작은 초코바와 사탕 한 알을 감사 표시로 건네고 내렸다.
부리나케 차로 돌아가 백련재로 향했다.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 앞에 차가 한 대 보였다.
내가 트럭을 세우면서까지 급하게 돌아와야 했던 이유, 관지였다.
관지는 광주와 진도를 오가는 길, 두 번째로 내게 오셨다.
지난번에는 친정엄마처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멸치볶음과 노각장아찌와 갓 구운 쿠키와 진도 햇김을 가지고. 이번에는 특별한 소식을 가지고.
추어탕을 먹으면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연말에 진도에서 배를 타고 세 시간 넘게 들어가는 상하죽도라는 섬에 무보수 전도사로 들어가신다는. 그 섬에는 할머니 네 분이 사신다고 했다. 환갑이 넘은 시인 전도사 관지의 삶이 동거차도 옆에서 새롭게 시작된다니, 80세에 순종함으로 고향을 떠나는 모세처럼 비장했다.
백련재로 들어가기 전, 녹우당 은행나무에게 갔다. 그렇게 노란 잎을 기다렸건만 샛노래지기도 전에 이파리 하나 남지 않고 다 떨어졌다. 간당간당 고민하던 낙엽을 바람이 불어와 날려버렸다. 비워야 새것으로 채울 수 있으리라.
도움은 멀리 있지 않다. 길 잃은 나를 태워주는 모르는 사람들, 배고픈 나와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 추운 나를 감싸주는 사람들, 고생길 완주에 격려와 칭찬을 보내주는 벗들이 내게는 필요하다. 아주 멀리서 기득권의 안정을 위해 나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조종하려는 이들은 이제 낙엽처럼 떠나보낼 때가 된 듯하다. 나는 더욱 외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과도 내 존엄과 자유와 평화를 바꾸지 않으리라.
땅끝에서 본 바다
☆ 발자국
11월 29일 월 백포리 공재 고택 / 평호리 송평 해변 2km / 금풍리 명금마을 죽도
11월 마지막 월요일, 지난주에 땅끝천년숲옛길을 완주했는데 전날까지도 딱히 가고 싶은 길이 떠오르지 않았다. 관심이 가는 곳은 공재 고택과 윤이후 별서(別墅)가 있던 죽도였다.
길보다 집이나 정원에 더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땅끝순례문학관 정윤섭 박사의 논문 <조선후기 海南尹氏家(해남윤씨가)의 海堰田(해언전)개발과 島嶼(도서)․沿海(연해) 經營(경영)>을 읽고 난 여파였다. 간척지보다는 별서에 관심이 있어 고산 윤선도의 손자 윤이후의 화산 죽도 별서와 윤이후의 넷째 아들 공재 윤두서의 백포 별서에 가보고 싶었다.
현산면 백포리에 있는 공재 고택에 가자 검은 고양이가 맞아 주었다. 출입문도 관리실도 없이 열린 공간이었다. 곡간채와 안채 사이로 들어가자 남부지방 가옥구조인 一형태가 아닌 ㄷ형태였다. 녹우당의 ㅁ형태와 비슷했다. 13칸의 방들은 탄탄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뜰에는 분홍꽃이 만발한 애기동백과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에 가져다 놓아도 손색없을 자태의 향나무가 있었다. 그 아래로 우물이 있었고 누군가 고추밭을 일구고 있었다. 헛간 옆 장독대마저도 집처럼 담을 쌓아 단정했다.
논문에 의하면 공재 고택은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232호로 고산 윤선도가 큰 아들 인미를 분가시키고 자신도 거처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仁美대에는 이미 넓은 전장을 이루고 있던 때로 이 시기 이곳의 해언전 간척으로 넓은 토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공재 고택은 인조 8년(1630)에 건축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안채의 종도리 장여 밑의 중수 상량문에 1670년(현종 11)에 건립되었고 1811년(순조 11)에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안채 지붕의 암막새에 적힌 명문기와를 근거로 할 경우 윤두서의 사후인 1730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재 고택은 공재가 주로 살았던 집이 아닌, 해언전 관리를 위한 전장(田庄)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집 뒤 동북쪽으로는 망부산이 있고 고택 입구나 사당에서 서쪽을 내다보면 백포리 바다가 훤히 보인다.
어느 해 해일이 일어 곡식이 모두 떠내려가 백포 주민들이 살기 어려워지자 공재 공은 마을 사람들을 시켜 합동으로 산의 나무들을 벌채하고 소금을 구워 살길을 찾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그런 인덕에 비하면 기왓장이 처마 밑에 그대로 쌓인 고택이 쓸쓸했다. 양반이면서 그림을 그려 ‘자화상’으로 훗날 세계적인 미술가 반열에 올랐으며, 풍속도에서 민중에 대한 마음을 보여준 공재를 좀 더 기려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관청의 획일적인 손길이 닿지 않고 누군가 텃밭 농사를 짓는 자연스러움이 공재의 정서와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재 고택의 검은 고양이
차를 몰고 화산면 평호리 송평으로 향했다. 멀리서도 근사한 소나무 행렬이 와보라고 불러서 송평항을 먼저 가보았다. 거기서 송평해수욕장으로 갔다. 폐쇄된 해수욕장 주차장엔 인부들만 있었다. 해변으로 내려갔다. 모래땅에 사람은 나뿐이었고, 바닷물에는 검은 점점이 가득했다. 송평항에서 본 김활성처리제 드럼통으로 유추해 볼 때, 김 양식인가 싶었다.
바다를 앞에 두고 해변이 더 긴 왼쪽으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모래밭이 끝나는 곳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모래는 쫀쫀하고 고왔다. 한참을 가다 뒤를 돌아보았는데 내가 가벼워서인지 모래 입자가 작아서인지 발자국이 별로 패이지 않았다. 내 걸음이나 글로 궤적을 남기려는 거창한 생각 따위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도와 모래에 닳아 둥그렇게 원만한 바위들을 지나 절벽으로 막힌 곳까지 걸어갔다. 거기서 되돌아 왔다. 한참을 가다 보니 가지런한 발자국이 보였다. 내 발자국이었다. 물기가 있는 모래에는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문득 내 글을 읽고 좋아하려면 나처럼 눈물이 많고 물기가 있는 마음이라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 밭에나 내 글이 발자국처럼 남겠구나, 그렇지 않고 팍팍하고 단단한 마음에는 내 글이 들어갈 틈이 없겠구나 싶었다. 모두의 사랑 받기를 포기할 때, 누군가 나를 이해하지 못함을 받아들일 때 평화를 얻을 것이다.
나는 내 발자국 옆을 되걸어가고 있었다. 반대 방향이긴 하지만 내 발자국 옆에 발자국이 또 찍히니 외롭지 않았다.
내 발자국
주차장에서 차에 올랐다. 차 안이 너무 더워 겉옷을 벗는데 누군가 차창을 두드렸다. 인부 중 한 분 같았다.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창문을 내렸다.
“멀리서 오셨네요.”
차량번호판에 지역표시가 없어진지 오래인데 어떻게 알았을까?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월성에서 여기까지….”
내 형광색 조끼를 본 것이었다. 나는 단박에 표정이 밝아져서 월성 주민과 함께 운동하고 있다고, 그 지역 주민들이 핵발전소 때문에 병에 걸리고 죽어가는데 이사를 못 하고 있어서 이사하게 해주려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배낭에 있던 전단지 두 장을 꺼내, 차에서 내려서 주차장에 있던 두 분에게 드렸다. 모두 받자마자 읽기 시작하셨다. 고마운 광경이었다.
해남에 와서 두 번째였다.
녹우당 은행나무 앞에서 도보로 견학 온 학생들에게 나도 걷는 사람이라며 나눠준 이후로.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홀로 거닐 때, 나조차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잊어버릴 때, 누군가는 보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탈핵에 관해 궁금해할 때 반갑다. 내 발걸음이 월성 나아리 주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얼굴에 기미 정도야 감수할 수 있다. 가장 짧은 거리를 길도 아닌 곳을 걸었는데, 효과는 최고였다.
거기서 죽도로 갔다. 해남에는 죽도가 여러 군데 있다. 윤이후의 별서인 죽도는 예전에는 섬이었지만 지금은 논 한 가운데 있다. 이미 정원의 흔적이 없다는 죽도는 대나무가 조금 있는 동산 같았다. 화산면 금풍리 명금마을에서 보이는 그 섬에 가보고 싶었지만, 배가 고팠다. 그리고 할 일이 있었다.
백련재에 돌아와 텃밭의 얼갈이배추를 다듬어서 어설픈 김치를 담갔다. 돌아올 때 사 온 한우와 무를 썰어 넣고 국을 끓였다. 넉 달만에 첫 고깃국이었다. 내가 심은 무를 위한 성의 표시였다. 열흘 전에 무 한 개로 담근 깍두기와 갓 담은 김치에 뭇국으로 저녁밥을 먹었다. 내가 심고 키운 작물을 먹으니 다산 정약용이 윤종문에게 준 증언에 나오는 가난한 선비가 된 것 같았다.
두 별서를 보고 길도 없는 바닷가를 걷고 온 이날, 500년 전 양반들에겐 으리으리한 고택이 별도의 농막이지만 현대의 나에겐 6평짜리 방 한 칸과 작은 정원이 필요할 뿐이라고 읖조린다.
해방과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