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뜬별 | 남도 순례길 7 – 홀로 혹은 함께 걷다. 2021년 끝을 해남에서
# 지난 이야기
2021년 6월, 해남~보성 18번 국도, 보성~하동 2번 국도, 하동~구례 19번 국도
7월, 보성~구례 18번 국도
8~9월, 해남~진도, 18번 국도 총 380여km
10~11월, 땅끝천년숲옛길 등 80여km를 걸었다.
☆ 땅끝에서부터 다시 걷다
2021년 12월 6일 월 땅끝~사구미 해수욕장~남성항~영전백화점 : 땅끝길(문화생태탐방로) 14.5km
땅끝에서부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해남에는 세 군데 해수욕장이 있다. 송호, 송평 그리고 사구미.
걷고 싶은 길을 찾는 내게 해남 사람들이 말해준 사구미 해수욕장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대한민국 종단 울트라 마라톤 출발점(땅끝 해남↔강원 고성 622km)에서 시작했다.
강원도 고성은 2020년 여름, 7번 국도 탈핵도보순례의 최북단 종착지였다. 지나온 곳은 지명만 봐도 반갑다. 걷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찍는 것 이상의 감정을 흘리는 일이다.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흔적은 없지만 지나온 사실이 남는다. 내가 걸어온 길을 차로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 뿌듯함이 있다.
혼자 걸을 때는 돌아갈 일이 걱정스러워 많이 걷는 게 저어된다. 길이 어디로 뻗어 있을지 알 수도 없고 버스 노선이나 배차 시간을 아는 것도 아니라 그렇다.
77번 국도 목포·해남과 완도·남창 분기점에서 남창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7km 지점에 사구미 해수욕장이 있다는 이정표가 있었다.
땅끝해안도로의 ‘전망 좋은 길’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바다가 시끄러웠다. 통호리 전복양식장 모터 소리였다.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가 아닌 모터 소리를 들으며 걷는데, 자연 풍광과 어민의 생존권 사이에서 지나가는 순례자인 내가 불평하는 게 마땅한가 하는 상념이 떠올랐다. 그런 내 마음을 어르듯 동백꽃 활짝 핀 나무가 서 있었다.
곧이어 사구미 해수욕장이 나타났다. 모래 언덕 끝이라 하여 사구미(砂丘尾)라고 불리었다는데, 해송이 촘촘히 들어선 모래 해안인 사빈(沙濱)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정면에 100m 정도 길게 갑판이 나 있었다. 후크 선장의 배 갑판 위를 걷는 웬디처럼 걸어 나아갔다. 맨 끝에 나무 의자가 하나 있었다. 거기 앉아 물과 카스타드를 먹자니 정면에 울타리 한 칸이 없는 게 눈에 들어왔다. 흙빛 바닷물은 발 담그기도 두려웠다. 바다, 그 생명과 죽음의 공간에서 함부로 자포자기를 떠올릴 수는 없었다.
사구미 해수욕장 정류장에는 사구리 이정표가 있다. 그 앞에서 시간표에 맞춰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땅끝으로 되돌아갈까 하다가 가던 방향으로 전진했다. 버스는 계속 오지 않았다. 남성항을 지나 버스 한 대를 보았지만 회차하는 길이었다. 송지면에서 북평면으로 넘어오면서 노선이 달랐다.
영전백화점까지 걸었다. 영전백화점은 영전수퍼의 다른 이름인데 없는 게 없는 만물상이라 백화점이란 이름이 붙었다. 백화점에서 두유 한 병을 사 마신 후 밖에 나와 서 있었다. 막막했다. 버스도 없고 택시는 왕복 요금을 준다고 불러야 오는 곳에서, 점심밥도 못 먹은 채였다.
그런데 트럭이 주차하더니 아저씨 한 분이 내려 내게 말을 거셨다. 왜 혼자 다니냐는 정도의, 흔히 듣는 질문이었다. 나는 땅끝까지 갈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아저씨는 급한 일 없으면 태워주겠다고 하셨다. 트럭에 올라 남창 공구 수선 가게에 들렀다가 땅끝까지 갈 수 있었다. 지나는 길에 걷고 있는 나를 보셨다는 아저씨는 서울에서 살다 오신 분이셨다. 지금까지 해남에서 나를 차에 태워주신 분들은 대부분 타지역에서 해남에 정착하신 분들이었다. 그분들은 이방인 처지를 잘 아셨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낯선 이에게 친절을 베풀게 한다.
사구미 바다로 나아가다
☆ 옆방지기와 걷다
2021년 12월 13일 월 영전백화점~이전성지~남창휴게소 : 땅끝길 77번 국도 12.5km
해남에서 혼자 걸은 지 4개월만에 마침내 함께 걷겠다는 이가 나타났다.
옆방지기인 송실 입주작가.
도보순례에 한 사람이 더 있고 차가 한 대 더 있으면 걱정할 게 없다.
일단 도착지에 차를 한 대 주차하고 둘이 한 차로 출발지에 간다. 거기서부터 걷는다.
그렇게 영전백화점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곧이어 작은 성당이 나타났다.
옆방지기가 들어가 보자고 했다. 혼자라면 출발하자마자 쉬어갈 리 없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 강대상 앞에 말구유가 있었다. 성탄을 준비하는 대강절 모습이었다. 함께 걷는 이 덕분에 감동을 얻었다.
영전리를 지나 금산, 평암, 신평마을을 지나자 갈대밭이 나왔다. 그리고 산성 위에 300년 된 15m 남짓한 해송들이 경비병들처럼 우뚝 늘어선 이진성지가 보였다. 전라남도 지정문화재 제120호 이진성지(梨津城址)는 고려 말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한 해안 요충지에 방어시설을 갖추기 위해 세웠는데, 조선 영종 10년(1555년)에 강화했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정비된 성지였다. 진도에서 구례까지 있는 조선수군재건로의 해남 기점으로 어란진항과 이진성이 있다.
‘바깥을 돌로 쌓고 안쪽은 자갈과 흙으로 채우는 내탁법을 사용’한 성벽 아래로 분지형의 알록달록 아담한 마을이 있었다. 안온한 바닷가를 끼고 있는 야트막한 담장의 마을이었다.
이진마을을 지나 누런 고사리 언덕을 지나 남창읍에 들어갔다.
77번 국도 땅끝해안로에서 55번 백도로로 바뀌었다. 남창에서 도보순례 중에 첫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는 남창휴게소에서 차를 타고 다시 영전백화점으로 갔다. 그로써 그날 도보순례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영전 성당의 대강절
☆ 여럿이 걷다
2021년 12월 18일 토 대흥사~일지암 왕복 2.2km
12월 19일 일 부도암~너덜구간 왕복 : 달마고도 4구간 중 2km
토요일에 서울에서 세영이 왔다. 내 유난스러운 요청으로 코로나 19 PCR 검사 음성 확인까지 받고 고속버스를 다섯 시간 타고 해남까지.
세영과 녹우당 앞 500년 넘은 은행나무를 보고, 마침 주인이 계셔서 녹우당 안 전국에서 손꼽는다는 명당을 밟아볼 수 있었다. 비탈진 비자나무 숲 앞까지 갔다가 녹우당을 한 바퀴 돌자, 서울에서 포토청 혜리가 부쳐준 단체사진전 <위로> 도록과 금륜이 사진이 백련재에 도착했다. 그것들을 가지고 대흥사 입구를 막 통과하는데 일지암 법강스님이 출타 중이라는 연락이 왔다. 우리 둘은 일지암 언 길을 낑낑 걸어 올라가 금륜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일지암에서부터 어둑어둑한 내리막길을 걸어 대흥사에 다다르자 뒤통수가 스멀스멀했다. 돌아보니 두륜산 위로 둥근 달이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세영이를 에루화헌에 묵게 하고 백련재로 돌아오는 길, 깜깜한 차도 한복판에서 고라니를 목격했다. 나는 차를 멈추었고, 고라니는 차도에서 겅중겅중 걷는 듯 뛰는 듯 전진했다. 나는 고라니의 복숭아 같은 엉덩이를 보면서 헤드라이트를 비춘 채 정차해 있었다. 고라니가 놀랄까 봐 비상등을 켜지 않았는데, 다행히 늦은 밤이라 뒤에 오는 차가 없었다. 잠시 후 고라니가 차도 옆 숲으로 들어갔다. 기다림이 고라니를 다치지 않게 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에루화헌으로 갔다.
그런데 거기서 연나무와 손지연을 만났다. ‘연극하는 나무’라 연나무라고 부르는 효립은 세월호와 기후위기를 미술과 연극으로 창작하는 연극인이고, 손지연은 5집 앨범을 낸 음악인이다. 우리는 즉석에서 손지연의 기타 연주와 노래를 보고 듣는, 그의 노래 <실화> 같지 않은 실화를 겪었다. 강림한 여신과도 같은 지연의 핑거링과 들썩이는 온몸을 통해 노래를 듣자니 감격에 겨웠다. 왜 또 터졌는지 알 수 없는 울음보에 입을 틀어막고 우는 나를 나무가 안아주었다. 나무의 품은 넓고도 따뜻하고 향기로워 먼먼 향수(鄕愁)의 바닷속을 잠수하는 듯했다.
나는 왜 이 땅 해남에서 이다지도 벅찬 축복의 도가니 속에 있는가. 며칠 후면 나는 어느 길 위에 서 있을까. 아무것도 예정돼 있지 않은 내 인생 여정이 어디로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는 미지로 출항하기 전, 은혜로운 나눔 뒤에 펼쳐질 고독이 미리 사무쳤다.
우리는 미황사 부도암에서부터 너덜구간까지 걸었다.
눈이 녹아서 낙엽은 촉촉했고 햇빛은 이른 봄처럼 포근했다. 지난달 나 혼자 맨발로 걸었던 그 길을 등산화를 신고 함께 걸었다. 너덜구간에 도착하자, 혼자 갈 때는 보이지 않았던 만장이 너덜구간 시작지점 왼쪽에 보였다. 2021년 10월에 고인이 된 민중가수 황현을 비롯해 이후 스러진 넋들을 기리기 위한 깃발이라고 했다. 우리는 너덜구간에서 저 멀리 팽목항을 향해 "핵 없는 세상을 위하여, 탈핵!"을 외쳤다.
그리고 만장 아래 바위에 앉아서, 언젠가 진도에 세월호 기억관이 건립될 꿈을 그렸다. 그곳에 깃발을 세우리라. 생명과 평화와 자유와 사랑의 깃발을.
모두 제 갈 길을 가고 나는 백련재로 돌아왔다. 차 안에서 지연의 CD <꽃샘바람>을 끝까지 들었다. 서산으로 그날따라 더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무 사이를 걷는 나무
☆ 옆방지기와 또 걷다
2021년 12월 20일 월 남창휴게소~에루화헌 : 땅끝길 55번 국도 5.6km / 북일면 밭섬 / 강진 명발당
두 번째로 옆방지기와 함께 걸었다.
1차선에 도로공사 구간이 많아 인도 없는 차도를 걷는 데 위험했다.
쇄노재 폐주유소에서 잠시 쉬었다. 그 옛날 나그네의 쉼터 같은 곳이었다.
걷다 보니 에루화헌이 나왔다. 그곳에서 연나무를 다시 만났다.
나무는 우리를 태워 북일면 밭섬에 데려갔다. 마침 썰물이었다. 바다가 갈라지고 섬으로 가는 길이 드러났다. 나무와 옆방지기와 내가 바다를 가로질러 밭섬에 갔다 오는 동안, 연나무는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행동하는 양심의 모습이었다.
나무의 직진 본능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를 태우고 명발당으로 갔다. 명발당(明發堂)은 강진군 향토문화유산 제32호로 도암면 향촌 해남 윤씨 윤광택(1732~1804)이 기거했던 가옥이다. 윤광택의 아들 윤서유(1764~1821)가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을 물심양면 도왔으며, 이후 다산의 외동딸과 윤서유의 아들 윤영희(1795~1856)가 혼인하였다.
지난여름 다산초당과 사의재에 들렀으니, 다산이 강진에서 맺은 인연의 흔적을 찾아보는 일이 의미 있었다.
섬에 걸어 들어가다
☆ 도반과 걷다
2021년 12월 24일 토 달마고도 17.74km+도솔암 왕복 0.5km=18.24km
해남을 떠나기 일주일 전, 드디어 기다리고 고대하던 달마고도에 도전했다.
천년의 세월을 품은 달마산 둘레를 도는 달마고도는 해남에서 내가 마지막까지 남겨놓은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그러므로 그 길을 누군가와 걸을지는 나 자신도 궁금했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혼자 걸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일 년 중 가장 낭만적인 날인 크리스마스이브에 그 길을 도반과 함께 걸었다.
미황사부터 시작하는 달마고도는 큰바람재까지 2.71km, 노지랑골까지 4.37km, 몰고리재까지 5.63km, 다시 미황사까지 5.03km 총 17.74km의 둘레길이다. 그 길은 달마산에 전해오는 옛 12 암자를 잇는 순례 코스로, 선인들이 걷던 옛길을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 인력으로 조성하여 요즘 그 흔한 나무 갑판 한 자락이 없다.
걷기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우리는 느즈막하니 10시 반에 출발했다.
달마고도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서정적인 구간보다 더 아름다우면 아름다웠지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 산티아고에서 그랬듯이 스탬프북에 관음암터, 문수암터, 노지랑골, 도시랑골, 몰고리재, 너덜 총 6개 구간에서 도장 찍는 재미를 느끼며 걸었다.
그러나 둘레길이라도 산길이었다. 스틱이 필요했고 오래 쉬지 않았는데도 예상 소요 시간 6시간 30분에서 한 시간이나 넘겼다. 종착지인 미황사를 불과 3.65km를 앞두고 도솔암에 올라갔다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도솔암 옆 팽나무와 바위 얼굴은 그대로였고, 법당은 따스했다. 도반은 도솔암에서 마주 보이는 바위들이 천수(千手)관음보살 같다고 해서 함께 걷는 내 안목을 높여주었다.
겨울산에는 오후 다섯 시만 돼도 어둠이 내린다. 깜깜한 어둠을 헤치고 미황사에 도착하자 저녁 6시 예불 타종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대웅보전 불빛에 안도의 숨을 내쉬자마자, 그 앞에 설치된 거대한 건물에 놀라고 말았다. <미황사 대웅전 해체 보수공사>를 위한 [조립식 이동법당]이었다.
이제 해남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바람처럼 스쳤다. 지난 6월의 아침 7시, 그 말간 대웅보전 앞마당을 볼 수 없다면 미황사는 내가 사랑하는 미황사가 아니다. 도심에서도 지긋지긋한 공사 현장을 보러 머언 먼 산속 사찰까지 가는 게 아니니까.
다음 날 미황사에 전화해 알아보았다. 대웅전 대들보 보수를 위해 천일 동안 공사한다는 친절한 설명을 들었다. 천일이면 3년이다. 3년 뒤 미황사 대웅보전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어떤 모습일까?
달마고도 1구간과 4구간
☆ 눈길을 걷다
2021년 12월 26일 일 대흥사~일지암 왕복 3km
크리스마스 폭설을 뚫고 느리가 왔다. 지난겨울 한진중공업 김진숙 복직투쟁에서 48일 단식했던 느리가 제주 한달살이를 마치고, 크리스마스이브에 부산에서 다시 김진숙 복직투쟁 1일 단식을 하고는 국토를 가로질러 해남까지 왔다.
다음 날 오후, 일지암에 금륜이 사진과 도록을 갖다 드리러 함께 갔다. 금륜이는 일지암에 앉은 내 옆에 착 달라붙어 앞발을 내 다리에 올려놓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자우홍련사 앞뜰에는 지난여름에 보았던 수곽이 해체되어 있었다. 법강스님이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다. 내 자리는 어디일까?
하늘과 땅 사이에 눈송이가 흩날렸다. 어둠 속 가파른 내리막길은 매우 위험했지만 산 위에 나리는 눈은 포근포근했다.
발자국 소리 듣고 마중 나온 금륜이
☆ 해남을 다시 돌다
2021년 12월 29일 수 공재고택~송평해수욕장~땅끝~도솔암~미황사~에루화헌~대흥사 일지암 / 차량+ 도보 8.8km
지난 6월에 정읍에서 길을 나서 무작정 내려왔던 땅끝.
8월부터 백련재 문학의 집에 머물며, 올 4월에 진도에서부터 걸었던 18번 국도의 남은 길을 마저 걷고, 탑동마을~땅끝까지의 땅끝천년숲옛길과 다시 땅끝~북일면까지 땅끝길을 걸었다. 헤맨 길까지 포함해 200여km의 발자국을 해남에 남기고 간다.
백련재를 떠나기 이틀 전, 사랑을 싣고 해남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이른 아침의 공재고택은 조선후기의 툇마루와 처마 밑에 차곡차곡 쌓인 기와로 고즈넉했고, 송평 앞바다에는 여전히 양식장이 가득했으며, 땅끝탑에는 지난번보다 덜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땅끝까지 와서 그지없이 암담했던 첫날, 나를 재워준 케이프게스트하우스에 갔다. 식당도 겸하는 그곳에서 전라도가정식백반을 먹었다. 참보리굴비와 매생이국은 해남을 떠나는 나를 정성으로 보신해 주었다. 언제 보아도 중후한 멋의 주인에게 땅끝순례문학관 백련재 문학의 집 소식지 가을호와 탈핵 전단지 두 장을 드리고 나왔다. 나를 기억하는 주인에게 내가 누군지 알려드린 셈이었다.
깎아지른 외길을 차로 올라가, 바람이 휘몰아치는 주차장에서 도솔암까지의 양쪽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800m는 언제 가보아도 탄성이 나온다. 해남에서 가장 극적인 장소를 고르라면 단연 도솔암이다. 쉴만한 의자 하나 없지만, 팽나무와 바위 얼굴에 인사하고 절벽 위에서 맞은 편에 우뚝 솟아오른 기암과 저 아래 마을을 보면 세상사 부질없음을 느낀다. 나는 팽나무를 안아주었다. 내 슬픔과 회한과 사랑을 모두 바라보았던 팽나무, 안녕.
미황사 부도암으로 갔다.
댓돌에는 신발이 두 켤레 있었고, 달프가 양지에 앉아서 날 보자 컹하고 짧게 짖었다. 나는 담장 밖에서 달프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지난날 송하를 불렀던 것처럼 소리 내어 인사했다.
“현공스님,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돌아섰다.
현산면 경계의 할머니 댁에 갔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할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식탁 위에 할아버지가 좋아하신다는 사브레 과자를 놓고 나왔다. 지난번에도 사 갔으니 아마도 할머니는 내가 다녀갔는지 아실 것이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차려주신 밥과 국과 함께 마신 믹스커피, 잊지 못할 겁니다.’
에루화헌에 들렀다. 아무도 없었다.
겅중겅중 뛰어 반기는 개들 별과 달과 호랑이 꼬리 모양의 고양이 호미와 또 다른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고 물이 있나 확인했다. 산책로를 돌아 초례청 같은 너럭바위 터에서 양팔 벌려 투구봉 혹은 나한봉의 기를 받고 합장으로 인사하고 떠났다.
마지막으로 대흥사에 갔다.
매표소에서 법강스님께 연락을 했는데 바로 내 차 뒤에 계셨다. 인연이란 약속 없이 가도 만나는 것이리라.
처음으로 일지암을 차로 올라갔다.
자우홍련사에서 빼꼼히 내다보던 금륜이에게 준비해 간 통조림 간식을 주었다.
그동안 귀한 차를 대접해 주시던 법강스님은 하와이안 코나 원두커피를 갈아서 내려주셨다. 절에서 마시는 커피 맛은 기품있고 부드러웠다. 스님은 길 떠나는 내게 새하얀 염원을 손목에 걸어주셨다. 그리고 자작시를 한 편 보내주셨다.
고난과 오도
무심과 지혜
생사와 피안
걸으며 묵상할 화두였다.
나는 이제 해남을 떠난다.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 또 오리라. 어느 길을 차로 달려도 내가 걸었던 길임을 알 수 있는 해남. 내가 사랑하는 하늘과 땅 해남으로.
녹우당 은행나무의 여름, 가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