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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용 승계로 향하는 - 가자, 국회로! 희망 뚜벅이

posted Mar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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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용 승계로 향하는

가자, 국회로! 희망 뚜벅이

 

 

 

1일 차 : 2025년 2월 7일 금요일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구미역 12km

 

"언제든 걸으시면 함께 할게요."

 

지난해 12월 1일, 희망 뚜벅이 마지막 날,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에게 약속한 지 고작 두 달 일주일. 매우 이른 약속 수행이었다.

 

[관련 르포 보기]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투쟁 승리 – 김진숙·박문진 희망 뚜벅이>

https://www.gilmokin.org/board_02/24492

 

11월 22일 부산 호포역에서부터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까지 열흘간 160km 걸은 뚜벅이들이 다시 걷는다고 했다. 이번에는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본사에서부터 서울 국회의사당 지나 광화문까지. 지난번의 두 배 넘는 23일, 중간에 휴일 이틀 제하면 21일 동안 350km였다. 그중 나는 9일 142km를 걸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다소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희망 뚜벅이 출발할 때마다 낭독했던 <평등약속>에 근거해서 호칭은 되도록 동지로 통일한다. 그중 다수 언급되는 분은 호칭을 생략하기로 한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긴장이 돼 오히려 숙면하지 못한다. 2025년 2월 7일 새벽 한 시 넘어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잠시 후 자지러지는 소리가 휴대전화기에서 울렸다. 기상청 지진 경보였다.

 

02:35 충북 충주시 북서쪽 22km 지역 M4.2 지진/낙하물, 여진주의

 

지진은 점점 해안도 아닌 내륙까지 파고들고 있다. 핵발전소 안전이 걱정이다. 다시 잠들었지만 세 시간도 채 못 자고 일어났다. 여섯 시 반쯤 집을 나섰다.

세상은 묵직한 침묵 속에 새하얗고 도타운 눈으로 덮여있었다. 자동차 유리창에 7~8cm 쌓인 눈을 긁어내고 시동을 걸었다. 스노타이어도 없는데 눈길을 헤치고 대전역까지 가야 했다. 눈 쌓인 국도 지나 고속도로를 타고 50여 분, 주차 후 도보 20분. 대전역 성심당에서 튀김 소보로와 부추빵 세트를 사서 8시 6분 무궁화호에 올랐다.

저 멀리 산으로부터 눈발이 바람을 타고 하얗게 휘몰아쳤다. 잠시 후 기차가 스르르 멈췄다. 가뜩이나 느린 기차가 안전점검을 위해 정차했단다. 밖은 영하 10도였다. 9시 30분에 픽업 차량에 탑승해야 하는데 예정대로 9시 25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조급해졌다. 참가 신청서를 작성하고 차편을 물어보니 모르는 사람에게서 문자가 왔다. 친절한 차량 동승 설명이었다. 집행부의 세심한 수고가 느껴졌다.

 

구미역에서 대구에서 온 참가자와 함께 포항에서 온 참가자의 렌터카에 탔다. 눈 구경하기 힘든 대구에도 눈이 왔다고 했다. 포항에서 대구까지 나오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단다. (나중에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운전자는 정보라 작가였다) 참가자 모두 여간 고생하면서 모이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각 10시에 기자회견은 시작되었다. 부랴부랴 도착해 보니 문정현 신부님의 반가운 모습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공장 옥상에 박정혜, 소현숙 두 형상도 오롯했다. 하은(고태은) 활동가의 사회로 문정현 신부님의 여는 발언, 장창열 금속노조위원장 투쟁사, 양기환 백기완노나메기 전 기획위원장 연대사, 최현환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지회장 희망 뚜벅이 발언, 고공의 박정혜 수석부지회장 발언이 이어졌다.

 

"2022년 눈 내리는 겨울에 시작한 고용 승계 투쟁이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과정에서 항상 옆에서 함께 싸워준 분들이 있기에 고용 승계 투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희망 뚜벅이를 마칠 땐 지상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CKB02186_ 기자회견.JPG

기자회견

 

CKB02212_ 고공의 두 사람에게 인사하는 김진숙.JPG

고공의 두 사람에게 인사하는 김진숙

 

 

그래야지. 희망 뚜벅이를 마칠 때쯤이면 땅 위에서 만나야지. 그러려고 걷는 거지. 그렇게 고공에 두 사람을 남겨둔 채 희망 뚜벅이는 겨울 한복판으로 출발했다. 맨 앞에는 옵티칼 조합원과 금속노조원이 그 뒤에는 김진숙·박문진 지도위원이(이하 동지 혹은 생략).

 

눈 쌓인 도로 위를 걷기 시작하자 지난 뚜벅이 때 배추와 무를 선물하시고 구미까지 트럭을 태워주신 차용택 함양 농부, 손소희 성주군 소성리 주민 등 낯익은 분들이 보였다. 그중 가장 낯익은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이하 동지 혹은 생략)에게 물었다.

 

"희망 뚜벅이 첫날부터 눈이 오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낭만이 있네요. 대구는 눈 보기 어렵거든요."

 

내공이란 이런 건가. 박문진의 답변은 관세음보살 같았다. 햇살은 쨍하니 밝았지만, 날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두꺼운 패딩에 둔탁해진 몸으로 얼어가는 눈 위를 살금살금 걸어가자면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선두에서 강호노예해방전선 '하오문'과 '영남대학교 민주학생연대' 깃발을 들고 걷는 2030의 생기는 발랄했다. 하지만 낙동강 바람은 매운 겨울 맛 좀 보란 듯 온몸을 후려쳤다. 뒤집어쓰고 양 허리에 줄을 묶은 앞뒤 '한국옵티칼 고용승계 국회가 나서라!-박정혜·소현숙 이겨서 땅을 딛도록'몸자보는 산호대교 위에서 낙하산처럼 부풀어 펄럭이고 김진숙은 한겨울에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CKB02215_ 희망 뚜벅이 출발.JPG

CKB02224_ 다리 위.JPG

CKB02243_ 희망 뚜벅이.JPG

 

 

어느 순간 김진숙이 박문진의 부채와 장갑을 들고 있었다. 내가 대신 건네받아 기다렸다. 휴식시간이 없기에 중간에 화장실 한 번 가면 훌쩍 뒤처지고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2019년 12월, 영남대 의료원 고공에 있던 박문진을 내려오게 하기 위해 부채를 들고 부산에서부터 111km 걸어가 붙은 김진숙의 별명 부채요정을 떠올리며, 기다리는 동안 부채에 쓰인 문구를 읽어보았다.

 

'노동자, 민중들도 충분히 쉬고 웃고 춤추는 세상을 만들자'

 

CKB02253_ 부채요정.JPG

 

 

8.2km 걸어 양지공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쉬었다. 찰떡 100개와 생수가 나누어졌다. 점심시간이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서서 냉수에 떡을 먹다니 급체하지 않으면 다행인 지경이었다.

그렇게 구미역까지 희망 뚜벅이 첫날 72명이 12km를 걸었다. 쉬고 웃고 춤추기엔 첫날부터 험난했지만, 이날 희망 뚜벅이 홍보팀에서 스티커와 용지를 제작해 나눠주어 연대에 신선한 바람이 살랑 불어오는 듯했다.

 

CKB02312_ 하오문.JPG

 

 

2일 차 : 2025년 2월 8일 토요일 구미역~샛별 LPG 충전소 14km

 

새벽에 일어나 대전역에서 구미행 기차를 탔다. 이날은 성심당 튀소 더블 세트 두 개, 도합 네 상자를 양손 가득 들고 갔다. 두 상자는 옵티칼 고공과 지상의 조합원들에게, 두 상자는 희망 뚜벅이들에게.

 

오전 10시, 햇볕이 드리웠지만 여전히 영하 10도 안팎인 구미역에서부터 털모자에 털목도리로 중무장한 40여 명이 걸었다. 박문진은 파카를 두 개나 껴입고 패딩 바지를, 김진숙은 파카에 한진중공업 작업복 바지를, 둘 다 권투 글러브만 한 장갑을 낀 채. 한참을 걷다가 박문진이 내게 전했다. 김진숙이 매번 성심당 빵을 들고 오는 나를 걱정한다고. 겉으로는 대전역을 지나치는 적이 항상 있는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3년 전 몸과 마음이 황폐해져 칩거하던 담양으로 박문진 당신이 보내준 풍성한 간식 상자를 기억한다고. 나는 은혜를 되로 받으면 말로 갚는다고 되뇌었다.

 

CKB02346_ 정류장 앞 장 김 박.JPG

CKB02358 차해도.JPG

 

 

구미 시내를 빠져나와 논을 지났다. 1차 희망 뚜벅이 때는 선두를 지키던 차해도 동지가 맨 뒤에서 걷고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옵티칼과 각 지역 단체에서 인도하도록 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배현석 옵티칼 조합원이 항상 선두에서 걷고 있었다. 차도와 인도를 번갈아 걷다 보면 신호에 막힐 때가 있다. 한 번은 차도 사람도 없는 갓길 1차선 도로 신호등 빨간 불에서 선두가 멈춰 선 적이 있다. 순간 몽골 이주 청년 故 강태완이 떠올랐다.

 

다섯 살 때 엄마 따라 몽골에서 한국으로 와서 26년간 국적을 받지 못해 불법체류자로 추방당할까 봐 신호등 빨간불에 건넌 적도 한번 없었다는 태완과 그 엄마. 그렇게 착하게 살다가 인구감소지역에서 5년 근무하면 한국 국적을 준다고 해서 김제에 취업했는데 8개월 만에 특수장비차량에 끼어 산재로 사망한 청년.

 

배현석은 이주노동자도 불법체류자도 아닌데 그리도 준법정신 강한 시민이었다. 그렇게 바르게 살려고 하는 대한민국 국민을 실컷 써먹고 해고하는 일본 회사 니토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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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현석(좌)

 

CKB02386_ 김진숙과 박문진.JPG

김진숙과 박문진

 

 

11시 10분, 김천시에 진입하자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다. 간식으로 바나나가 등장했다. 이른 아침 집을 나와 허기진 뚜벅이들에게 필요한 공급이었다.

 

11시 50분, 공원에서 점심을 먹었다. 모두 공원 의자에 앉거나 서서 준비해 온 빵과 김밥을 먹는데 김진숙만 보온병의 호박죽을 드셨다. 어찌 공수했나 궁금했는데 박문진이 준비해 오셨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출발지까지 오기도 바쁜 통에 친구가 좋아하는 죽까지 데워오다니 대단한 우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11월 희망 뚜벅이 때 녹색당 나무가 '김 지도 드린다'고 호박죽을 바리바리 챙겨 온 게 떠올랐다.

 

성심당 부추빵을 먹으며 함께 서서 식사하던 이들 중 이십 대 뚜벅이도 대전에서만 파는 성심당 빵을 사 왔음을 알았다. 직행 기차가 없어 대전역에서 갈아타고 왔다는 그이는 남태령 대첩 당시 참가자였다. 지난해 12월 21일,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이 윤석열 대통령 구속 등을 촉구하며 트랙터 상경 시위에 나섰다가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20시간 이상 대치했을 때, 농민이 경찰에게 폭행당하는 걸 영상으로 본 청년 여성층이 자발적으로 집결해 함께 밤을 새워 마침내 서울 입성을 이루어냈던 역사적 사건. 그 남태령 대첩의 용사였다.

 

의사 한 분이 다가오셨다. 김동은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진료사업국장이었다. 박문진이 양말을 내렸는데 발등 위 발목 부분이 부어 있었다. 속에 신은 짧은 발가락 양말목이 운동화 압박과 맞닿는 지점이었다. 의사가 현장에서 해 줄 수 있는 의술은 파스를 붙여주는 것뿐이었지만, 대신 핫팩과 뱅쇼라는 내복 음료를 준비해 왔다. 덕분에 박문진이 뱅쇼를 좋아함을 알게 되었다. 부은 발목에 파스를 붙이고도 박문진의 화사한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CKB02405_ 파스 붙이는.JPG

파스 붙이는 박문진

 

 

점심 식사 후 걸으면서 최현환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지회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스물일곱 살이던 2005년에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 입사했다. 화재 발생할 때까지 17년째 근무 중이었다. 사고 전까지는 평탄하게 잘 다녔다. 현장직이었는데 조장으로 조원 관리하고, 반장으로 판 공정 사원 관리를 했다. 2022년에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지회장이 되었다.

 

"회사는 불탄 공장을 철거하려고 해요. 우리가 고용 승계를 요구하고 있으니까. 그러다 작년 1월 8일에 소현숙 조합원이 지회로 나오는데 인부들이 많이 있어서 물어보니까 철거하려고 왔다고 해서 급하게 박정혜·소현숙 동지가 고공에 올라가게 되었어요. (일터에서) 정혜는 조장, 현숙이는 조원이었어요. 그렇게 시작된 고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회사는 계속 구미시청을 압박하고 있어요. 1월 8일 저녁에 시청에서는 공장해체계획 승인을 해 줍니다. 사측 변호사들은 그 근거를 가지고 재판부에 다시 공장철거방해금지 가처분 결정 요청을 합니다.

1월 10일에 부지 내 공장철거를 방해하지 마라, 조합사무실을 인도해라, 이 모든 행위를 위반했을 때는 노조 200만 원, 지회 200만 원, 조합원 각각 50만 원의 강제이행금을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결정문이 왔어요.

회사는 1월 17일부터 계속 쳐들어와서 노조 사무실 비워달라, 공장 비워달라면서 31일까지 채증을 해 가죠. 그리고는 재판부에 단체이행강제금 집행이행신청을 해서 조합원에게 추심 명령이 떨어져서 통장에 압류가 들어오고, 살고 있는 아파트에 강제경매 개시가 들어왔어요. 강제경매를 중단시키기 위해 현금 공탁을 걸어 중지된 상태예요."

 

"공탁금은 얼마였어요?"

 

"1인당 550만 원씩, 총 5500만 원 공탁금은 금속노조 조합원 1인당 2,000원과 민주노총 조합원들 1인당 1,000원 모금으로 충당됐어요. 이렇게 1차 위기를 겪고 잠잠하다 싶었는데 2차로 집행이행신청을 또 해요. 2월 1일부터 3월 18일까지 채증한 걸로 2차 간접강제이행금 집행이행신청했는데 재판부에서 불허가해줍니다. 그러자 회사는 1차 결과로 고공 동지 대상 3차 공장철거 방해금지 간접강제이행금 집행이행신청을 해요. 법원에서도 (고공 동지들이) 공장 안에 있기 때문에 내용이 적합해서 신청이 받아들여졌어요. 그런데 사회적 여론이 심각해서 회사에서도 추심 명령까지 안 하고 있는 거지요."

 

그는 희망 뚜벅이로 걷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다고 했다.

 

"2022년에 노동조합 활동을 했어요. 처음에는 노동조합 잘 몰랐어요.

회사가 2003년 11월에 구미산단에 입주했어요. (토지 50년간 무상 임대, 각종 원자재 수입 관세, 법인세 감면 등 혜택을 받고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1조 원의 매출을 달성하는 중견기업이라는 얘기까지 들었습니다.)

 

니토덴코는 글로벌기업으로 전 세계에 88개 자회사를 가지고 있는데(4개 계열사, 32,800명 직원 고용), 한국에는 처음에 평택 공장 한국니토옵티칼(주 고객 삼성, LG디스플레이), 판매법인으로 서울 한국니토덴코 자회사,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주 고객 LG디스플레이)가 있습니다. (LCD용 편광필름 공급망 최상위에는 애플이 있는데, 니토덴코는 원재료를 각 자회사에 판매하여 추가 이익을 남기고 있었어요.)

 

2016년 11월 25일에 노동조합이 설립되었어요. 당시 2017년 인수합병 준비 중이었어요. 그래서 평택 공장 직원이 구미에 내려와서 같이 근무했었어요. 그런데 평택과 저희(구미) 월급 체계가 달랐어요. 우리는 1년에 10원이 오르는 임금 호봉체계였어요. 그래서 노조가 생겼는데, 니토덴코는 노조가 생기자 인수합병 계획을 무산시키고 적응 기간으로 왔던 직원들을 영향받을까 봐 모두 평택으로 복귀시켰어요. 그러면서 인수합병도 무산되었어요.

 

그 시기에 2018년부터 한국옵티칼에 있는 물량을 중국으로 빼돌리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회사가 어렵다고 해요. 적자라면서 구조조정과 임금 삭감이라는 고통 분담을 강요해요.

 

2019년 구조조정(1차에서 563명 중 316명, 2차에서 236명 중 149명 각 희망퇴직)을 하면서 (2021년) 조합원 수가 500여 명에서 56명으로 1/10로 확 줄어들었어요. 하지만 한국옵티칼하이테크는 후공정에서는 핵심적인 사업을 했어요. 56명이 일하면서도 2021년에는 3700억 원이라는 매출액, 순이익 260억 원을 올렸어요. 그런데도 회사는 항상 노사관계 악화되면 폐업하겠다고 했어요.

 

2021년, 2022년에는 니토가 후공정 생산 라인을 중국에 배치했는데 코로나 19로 중국 공장이 봉쇄되니까 4월부터 구미(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서 신규 채용을 했어요. 경력직이 4~50명, 신규 채용이 50명. 그래서 조합원이 150명 정도 되면서 안정적 정상적인 구도로 갔어요. 그러다 (10월 4일) 화재가 발생한 거죠."

 

"화재 원인은요?"

 

"마킹기에서 스파크가 발생돼서 화재가 확산됐어요. 그러니까 니토는 이참에 다 정리하려고 하는 거죠.

2022년 11~12월, 청산 결정 후 1차 구조조정, 2차 구조조정, 세 번째까지. (210명 중 193명 희망퇴직, 희망퇴직을 거부한 17명 집단 해고, 현재 7명 고용 승계 투쟁) 니토는 인권 경영한다고 하는데 희망위로금으로 정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9년 차까지 최저임금도 안 되는 기본급(약 150만 원)의 17개월. 10년 차는 18개월 치였어요.

 

회사에 평택으로 고용 승계해 달라고 하니까 단칼에 잘라버렸어요. 저는 이 고용 승계가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면 실질적으로 저희 공장에서 일하던 비조합원들을 중국, 서울, 일본에 전환 배치했었어요. 2016년에도 평택에서 구미로 전환 배치한 사람이 있었어요. 이유는 노조 혐오뿐이었어요."

 

이것이 더욱 확실시되는 것은 니코덴코가 화재 이후 보험금 1,300억도 챙겼으면서 공장은 폐쇄하고 평택에서라도 일하겠다는 직원 해고 이후 평택 공장에 30명을 신규 채용했기 때문이다. 구미 물량을 가져가 평택 인력이 부족한데 경력직인 구미 공장 직원 고용 승계는 거부한 것이다.

 

니토덴코는 지속해서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를 불법을 선동하는 집단으로 공격, 중국으로의 물량 배정·폐업 위협 등을 통해 노동조합의 교섭력 약화 시도, 고용 승계 투쟁 이후 손해배상, 가압류 등 이른바 전략적 봉쇄 소송을 했다.

 

나는 그동안 구미에서 평택으로 고용 승계를 요구하는 조합원들에게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구미와 평택 간 거리 문제였다. 고용 승계가 되면 살던 터전을 옮겨야 하니까. 그런데 그 질문을 하기도 전에 지회장이 먼저 말을 했다.

 

"그동안 조합원들은 구조조정도 임금 삭감도 했어요. 실제로 (처음에) 회사에서 고용 승계를 받아들였어도 평택까지 이사 갔을지는 모르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고용 승계되면 전원 갈 거예요."

 

2025년 2월 8일 기준, 2022년 10월 4일 화재 발생 859일.

2023년 2월 1일 해고된 지 738일.

남은 사람은 7명. 그들은 타협 대신 존엄을 선택했다.

 

<노동과 세계> 20224년 2월 7일 자에 따르면, 외투기업(외국인 투자기업)의 먹튀란 '한국 정부로부터 각종 조세 감면과 특례 등의 세제 혜택은 물론 국·공유 토지 제공과 입지 지원을 포함한 인프라 지원, 임대료 감면 등 현금성 지원을 받은 외투기업이 기업으로서의 의무를 져야 할 때는 한국의 법체계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책임과 규제를 빠져나가는 행위'를 일컫는다. 일방적인 해고와 (위장) 폐업과 청산, 노조 탄압, 기술 탈취와 부동산 투기 등의 피해는 국내 노동자와 지역사회에게 돌아가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금속노조 소속 한국산연지회, 한국게이츠지회, 한국지엠지부, 쌍용자동차지부, 한국와이퍼분회, 사무금융노조 A캐피털지부 등이 그 예다. 그리고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서도 본사인 니토덴코는 일방적인 청산 통보를 강행했고 먹튀 시도가 진행 중이다. 이에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노동자들이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투쟁을 벌이고 있다.

 

여느 먹튀 기업과는 다르게 니토는 아직 평택 공장이 있고 신규 사원 채용도 했다.

 

지난해 12월 '외투기업 규제를 위한 패키지법안'이 발의됐다. 패키지법안은 근로기준법·상법·채무자회생법(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을 통해 정리해고 과정에서 과반수 노조 동의를 요건으로 하도록 하고, '먹튀 자본'을 방지하기 위해 폐업 등에 노조 동의를 포함 노동자의 참여권·동의권을 제도화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김천 동·남촌을 지날 때였다.

 

"다섯 시에 퇴근해서 다섯 시 반에 전화를 받았어요. 바로 이 근처였어요. 돌아가니까 이미 화재 진압이 불가한 상황이었어요. 인명 피해는 없었어요. 그날 부사장이 일본에 실적 발표를 하고 돌아와서 2023년 모델을 위한 신규 설비도 투자하고 신규 채용까지 다 하기로 해서 잘 해 보자고 했는데……."

 

칼바람 맞으며 한 시간여 열심히 설명하던 최현환 지회장의 붉게 언 얼굴이 순간 착잡해 보였다. 2005년에 입사해서 2016년에 노조가 생기고 2022년 금속노조 12기 임원 선거에 들어가서 당선돼 노조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회사가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다른 사업장에 연대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연대 오는 동지들이 이해가 안 됐어요. '이걸 받아도 돼? 대가 없이?'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잖아요. 그러다 저도 다른 사업장 가보면 연대 동지들이 또 있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나의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 아~ 다 이어져 있구나. 느껴졌어요."

 

연대란 공감에서 나오는 것. 다들 비슷비슷한 사연으로 투쟁하고 있고 그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은 조합원 일곱 명 중 다섯 명이 기혼인데 그중 세 명에게 초등학생 자녀가 있어요. 다섯 살이었던 제 딸이 올해 초등학교 들어가는데, 그사이 자라는 모습을 못 봤어요."

 

40대 젊은 지회장의 얼굴에 무거운 아버지의 무게가 서렸다. 2022년 10월 4일 갑작스러운 화재 발생 이후 희망퇴직 대신 고용 승계를 요구하다 4개월 만에 해고되고 2024년 1월 8일에 고공 투쟁이 시작되었다. 막막하고 외롭게 고군분투하다 320일째 되는 날이었다.

 

"(작년 1차 희망 뚜벅이 때) 옵티칼 조합원들도 몰랐어요. 첫날 일본에 있었는데 페북을 보면서 알게 되었어요. 지도위원님 건강도 안 좋으신데 고공 동지들을 위해 오시는 게 고맙고 미안했어요."

 

그렇게 천군만마처럼 시작된 희망 뚜벅이가 부산에서 구미 공장까지 열흘간 160km를 걷고, 2025년 2월 7일부터 다시 구미 공장에서 시작한 2차 뚜벅이 이틀 차가 어느덧 김천시 샛별 LPG 충전소에서 끝났다. 40명이 마무리를 했다.

 

금속노조 차를 타고 다시 구미역으로 왔다. 멀리서 온 남태령 동지에게 잔치국수와 김밥을 사주고 대전역에서 함께 내렸다. 나는 20분 거리 주차장으로 걸어가고, 그이는 두어 시간 후 상행선 기차를 타기 위해 소제동 카페로 갔다. 주중에는 직장에 다니고 주말마다 기차를 갈아타며 먼 길 희망 뚜벅이에 연대하러 오는 2030 젊은 말벌 동지들에게 참 고마웠다.

 

집에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레드와인 한 병과 레드향을 샀다. 그리고 와인에 레드향과 유기농 토막 계피와 올리브잎과 팔각과 정향과 마스코바도 설탕을 넣고 끓였다. 겨울밤 노곤한 피로가 새빨간 뱅쇼 향으로 사르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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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차 : 2025년 2월 9일 일요일 샛별 충전소~김천시청 12km

 

출발지점까지 기차로 갈 방법이 없어서 승용차를 몰고 나섰다.

전날 도착 지점인 충전소에서 준비운동을 하고 평등약속 낭독 후 단체 사진을 찍었다.

출발 직전 옵티칼 지회장에게 내 첫 책 <일곱째별의 탈핵 순례>와 사진집을 고공 농성자들에게 전해 달라고 하고 서류봉투 하나를 받았다.

오전 10시, 50여 명이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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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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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을 가져온 사람들은 모두 도착지인 김천시청에 주차하고 노조 차를 타고 뚜벅이에 합류해야 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운전자가 눈에 익었다. 지난가을 희망 뚜벅이 때 장영식 사진작가의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대신 메고 가던 감동적인 뒷모습의 주인공이었다. 물어보니 한진중공업 노조원이었다. 카메라와 카메라 가방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들어본 사람만이 안다. 장영식 사진작가가 앞에서 번쩍 뒤에서 번쩍 나타나 무수한 사진으로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중간중간에 보이지 않게 돕는 손길들이 있었다. 그것이 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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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가방 멘 조합원(좌) 육교 위 장영식 사진작가(우)

 

 

중간에 화장실이 있는 주유소에서 처음으로 휴식시간에 간식이 제공되었다. 깨소금이 솔솔 뿌려진 김천시 꼬마김밥과 얼어서 퍼런 바나나가 맛있고 풍족했다. 매일 길도 달라지고, 참가하는 뚜벅이도 달라지고, 배식도 간식도 달라지는 희망 뚜벅이는 새로워서 좋았다.

 

이날은 걸으면서 이지영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사무장 인터뷰를 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투쟁 시작하기 전에는 진짜 평범하게 살았어요. 제 근무 연차 수가 우리 조합원 중에 제일 적거든요. 불나기 전까지 치면 한 3년 정도밖에 안 돼요.

2017년에 입사하자마자 원래 노조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일하는 환경도 좋았고, 일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복지나 이런 게 되게 좋았기 때문에 좋은 회사라고 생각을 하고 다녔어요.

근데 1차 구조조정 때 계속 아침조회 시간마다 부사장 출신이 어렵다. 우리 이제 품질을 높여야 돼, 그런 얘기를 했었어요. 그래서 그런 얘기를 자꾸 듣다 보니까 내가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닌데 그냥 다른 회사에서 자리 잡는 게 나을까 싶어서 1차 희망퇴직 때 나갔었단 말이죠.

그런데 코로나 19 터져서 중국 봉쇄돼서 회사에서 다시 신입을 뽑았을 때 문자로 지원하라고는 연락받고 다시 들어오게 된 경우란 말이에요. 재입사 통지 오는 거 보고 아, 회사 쉽게 안 망하네, 얘네가 그냥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 없을 때는 그냥 희망퇴직 시켜서 사람 그냥 내팽개치고 이렇게 하는구나 싶어서 이번에 재입사하고 나서는 이젠 진짜 계속 다녀야겠다. 이제 정년까지 다녀야겠다 했어요.

 

제가 이 회사에 들어와서 결혼한 신랑도 만났단 말이에요. 사내 커플이었어요. 그래서 신랑이랑 희망퇴직도 같이하고, 다시 들어오는 것도 같이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5~6개월 만에 갑자기 회사에 불났다는 소식 듣고. 저번에도 이제 작은 불씨는 났었거든요. 그런 것처럼 조금 지나고 말겠지. 조장님이 오늘 쉬라고 하니까 쉰다, 이 생각만 하고 하루가 지났는데 완전 변수가 된 거예요."

 

"엄청 놀라셨겠어요."

 

"갑자기 그때부터 실감이 나는 거예요. 어떡하지. 우리 둘 다 갑자기 실업자 됐잖아요. 그래서 우리 어떡하지 이러고 있다가 회사가 한 달 동안 기다린다고 해서 기다렸죠. 근데 기다렸는데 갑자기 피하네요. 근데 노조 사무실에서 우리 지회장님이 설명해주고 이제 투쟁을 시작하자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솔직히 많이 고민했어요.

신랑이랑 저랑 상의해서 신랑은 생계를. 둘 중에 하나만 남아서 하자 이렇게 된 거예요. 신랑도 회사 사정을 조금 아니까 시작했는데, 신랑도 저도 일반 조합원이었기 때문에 노조가 뭐 하는지도 잘 모르는 조합원이었어요. 하면 할수록 저는 좀 알지만, 신랑은 처음에는 응원했었는데 이제는 좀 길어지니까 많이 힘들어하긴 하더라고요.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본인이 남을 걸 괜히 나를 남겼다고 미안하다, 이런 말도 하거든요. 그래도 그런 말 들으면 끝까지 해 보자는 마음이 들고 그렇더라고요."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들었어요?"

 

"실질적으로 회사가 우리를 타격할 수 있는 게, 제일 힘들어서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게 손배가압류잖아요. 그때 강제 경매된다고 했을 때 듣고 엄청 울었어요. 심리적으로 압박이 되는 거예요. 그때 진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많이 들었었거든요. 그래서 나 못할 것 같다고, 진짜 너무 힘들다고. 근데 또 시간도 지나고 옆에서 응원해 주고.

공탁금 때문에 우리가 금속노조랑 민주노총 지부나 단위마다 다 찾아가서 발언하고 조금 도와주시라고 했거든요. 지역별로 모금도 많이 해서 저희 법률 비용 쓸 수 있게끔 공탁금을 딱 벌고 그렇게 해놓으니까 이거 진짜 별거 아니다."

 

그이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서 한 인간의 성장 서사가 축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여성 노동자가 고공에 올라갈 때는 남성에 비해 열악한 상황이 더 많다. 가장 큰 차이는 생리적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상하수도가 없어 위생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고공에서 가임기 여성이 매달 하는 생리는 생리 전 증후군과 생리통과 더불어 한 달에 일주일 정도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것은 부끄러워할 질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답을 듣고는 기겁을 했다.

 

"초반에는 위에 올라간 언니들이 피임약 먹으면서까지 버텼어요. 그렇게 버티다 안 돼서 그거 끊고 그냥 평소대로 생활하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진짜 많이 울었어요. 저희도 어떻게 하면 좋아, 하면서 그렇게 버텼어요. 너무 불편하고 힘들지만."

 

강제로 몸의 생리 작용을 멈추면서 스스로 입는 피해는 오롯이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얼마 전에는 감기도 걸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여성 최장기 고공농성을 연일 갱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롭지 않았다. 남태령 대첩 이후 지원이 쇄도했다고 한다. 생수가 떨어졌을 때는 인제 그만 보내셔도 된다고 할 만큼 많은 생수가 도착했단다. 그리고 그 지원은 희망 뚜벅이 참가로 이어졌다.

 

지좌황산공원을 지나 작은 정자 옆에 승합차들이 차 벽을 치고 매서운 바람을 막았다. 그 사이 땅바닥에 희망 뚜벅이들이 앉아서 쌀밥과 싱싱한 김치와 함께 비건(채식주의자)은 들깨 미역국과 논 비건(비 채식주의자)은 닭개장을 먹었다. 희망 뚜벅이 첫 식사 제공이었다. 한겨울엔 뜨거운 국물이 최고. 사려 깊게 식성까지 맞춰 식사를 준비해 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했다.

식후에 전날 저녁에 달여 이른 아침에 따끈하게 데워 꿀을 넣은 진한 뱅쇼를 박문진, 차해도, 장영식, 정진우 동지와 나눠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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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강물을 지나 김천시청을 향해 시내를 통과했다. 대열은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대화하며 걸어갔다. 김진숙 동지는 2030 젊은이들 사이에서 대화하며 걸었고, 나는 차해도 동지의 1979년 입사 당시부터 김진숙 지도위원과의 35년 이야기를 들었다. 화장실, 식당, 식판…… 민주노조가 상전벽해시킨 공장의 구석구석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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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 휜 소나무가 멋들어진 김천시청에 다다랐다. 따스한 오후 햇살 아래 뚜벅이들의 얼굴이 밝고 환했다. 추위도 젊음을 얼릴 순 없나 보다. 화르르 웃음꽃이 매화보다 먼저 피었다. 박정혜, 소현숙 이겨서 땅을 딛도록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용 승계로 가는 희망 뚜벅이 사흘째, 왠지 모인 이들이 가족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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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지회 사진들 모음.jpg

 

 

지역별로 뚜벅이들이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김진숙이 발언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를 대표하는 상징은 85호 크레인입니다. 그게 이긴 투쟁이어서만이 아니라 저는 함께 싸워서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러분들 마음속에 하나씩은 다 영광스러운 기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남태령 동지는 남태령의 이름으로, 말벌 동지들은 말벌 동지의 이름으로, 무지개조선소는 또 무지개조선소의 기억으로.

 

85호 크레인의 기억들이, 여러분들은 마지막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첫날 올라가는 날부터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사실은 신변 정리를 다 하고 올라갔었습니다. 새로 산 운동화도 주고, 카메라 배워보겠다고 새로 산 비싼 카메라도 친구한테 주고, 그리고 통장도 다 정리하고.

 

저는 살아서 땅을 밟을 거라는 희망이 그때는 없었어요. 8년 전에 동지가 죽었던 크레인이고, 그게 8년 만에 다시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제가 크레인에서 희망은 129일이었습니다. 김주익 지회장이 버텼던 날짜. 목을 매었던 날짜. 그래서 저는 129일을 버티면 그냥 김주익 동지를 만나도 떳떳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게 노동자의 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00일이 지나고 150일쯤 되니까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오는 거예요. 저는 그 사람들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까 서울에서 왔대요. 그다음 날 온 사람한테 물어보니까 청주에서 왔대요. 그다음 날은 광주에서 왔답니다.

 

그 사람들이 처음에 왜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산에서도 영도, 그쪽에서 어떤 노동자가 크레인에 매달려있는데 언론에도 한 번 안 나올 때 저 사람들이 여기까지 왜 왔을까? 그러면서 막 편지를 써주고 가고, 트위터에 글을 올려주고 그러는데 저는 그 사람들이 너무 보고 싶어졌습니다. 저한테는 그게 삶의 의욕이었던 거 같아요. 내가 살아서 저 사람들을 봐야겠구나,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그때는 간절했습니다.

 

박정혜, 소현숙 동지가 (고공농성) 오늘이 399일이에요. 그 동지들이 어떤 마음으로 고공에 있을지 저는 알거든요. 이제 부산에서, 양산에서, 울산에서, 고양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자기네들을 만나러 오고. 그 동지들도 아마 너무너무 만나고 싶을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래서 저는 우리에게 그런 영광스러운 기억들이 하나씩은 다 있듯이 옵티칼 동지들에게도 옵티칼이라는 이름이, 옵티칼 조합원, 지회였다는 이름들이 평생에 남는 영광의 기억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 약속들을 지키는 게 희망 뚜벅이라고 생각하고요. 투쟁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귀엽게)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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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다음 날, 추풍령 넘을 희망 뚜벅이들을 걱정하며 세종시 국토부 앞 전국신공항백지화 연대 출범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탈핵 벗 청명에게 5일 차 추풍령역~영동군청 24km 장거리 희망 뚜벅이 연대를 부탁했다. 걷기 달인 청명의 흔쾌한 연대가 고마워 기차표를 예매해주었다.

그리고 8년 전 산티아고 순례 때부터 지금까지 신는 발목 중간까지 오는 발가락 양말과 똑같은 것 다섯 켤레를 주문해 박문진 동지에게 발송했다. 김진숙 동지와 나눠 신으시라고.

 

그다음 날 종합건강검진을 마치고는 다음 날 옵티칼 지회에 부탁해서 받은 일본어판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조 투쟁 전단이 담긴 서류봉투를 챙겨 오사카로 향했다. 그러니까 희망 뚜벅이 셋째 날 준비해 간 뱅쇼는 내 맘속 짧은 헤어짐을 위한 이별 선물이었다.

 

 

17일 차 : 2025년 2월 23일 일요일 평택역~한국니토옵티칼 평택공장 17km

 

두 주 만에 희망 뚜벅이를 하러 09:37 평택역에 내렸다. 만반의 준비 차 역내 화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누군가 뒤에서 반갑게 인사하며 어깨를 안았다. 김진숙 동지였다.

"어머나, 안녕하세요? 다리 어떠세요?"

"묻지 마세요."

화장실 입구로 휑하니 들어가는 모습 뒤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 오시나 기다렸어요."

'기다렸어요'가 '궁금했어요' 였는지, '했어요' 였는지, 어쨌든 내 마음에는 '기다렸어요'로 들렸다. 나 역시 두 주 동안 기다리던 희망 뚜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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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박문진 지도위원과 최현환 지회장

 

 

이날은 평택역에서 한국니토옵티칼 평택 공장까지 가는 날이라 자그마치 160여 명이 모였다.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엄마도 이한빛 PD 부모님도 오셨다. 새까맣게 그을린 김진숙·박문진 두 분 표정이 더 밝아보였다. 출발했다. 김진숙 옆에는 말벌 동지들이 나란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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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식 사진작가

 

 

그새 선두에 선 이들 몇몇이 양 끝 뾰족한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신유아 문화연대 활동가 작품이라고 했다. 그날도 그이가 왔다. 장영식 사진작가와 신유아 활동가 둘이 여기 번쩍 저기 번쩍 나타나 사진을 찍었다.

 

"까마귀인 줄 알았어."

 

누군가 하는 말에 저만치 마른 논을 바라보니 멀리 신유아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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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아 문화연대 활동가

 

 

그이는 자신의 차량을 타고 앞질러 가서 촬영 지점을 정하고 뚜벅이들을 연신 촬영했다. 다양한 각도로 맹렬히 사진을 찍던 그이는 가로등 받침대 위에서 기다렸다가 동덕여대 동지들이 구호 적힌 띠를 들어 보이자 찰칵! 그리고 내려오면서,

 

"아~ 다 찍어주고 싶은데……"

 

그 애정 어린 말에 그이가 왜 그렇게 동분서주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이는 각종 SNS로 사진에 거부감이 없는 세대인 말벌 동지 등 희망 뚜벅이들을 전부 주인공처럼 찍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출발 전에 사진 촬영을 원치 않는 사람을 확인해 스티커를 붙인 뚜벅이만 제외하고.

 

뾰족 털모자 외 두 주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금속노조 충남세종지역본부에서 제공한 간식 차량이었다. 겨울바람 맞으며 걷는 희망 뚜벅이에서 제일 필요한 건 따뜻한 물이었다. 그런데 그 트럭엔 온수와 귤과 초코바 등 간식이 있었다. 세종지역본부 측에서 뚜벅이들이 나흘에 귤 스무 상자를 먹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귤을 더 사달라고 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민주노총 김진희 경기도 본부장과 기륭전자 출신 비정규직이제그만 공동투쟁 유흥희 집행위원장이 기꺼이 신용카드를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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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김진희 경기도 본부장과 비정규직이제그만 공동투쟁 유흥희 집행위원장

 

 

한편 초반에 뛰어다니던 나는 두 주 만에 걸으니 다리가 적응을 못 해 천근만근이었고 점점 뒤처지다 점심시간 즈음엔 아예 대열 끝자락에서 간신히 발을 떼고 있었다. 그때 신유아 활동가의 차가 코너를 돌더니 내 옆에 섰다. 장영식 사진작가도 타고 있었다.

 

"타요."

"괜찮아요."

"타요."

 

두 분이 모두 권했다. 챙겨줌이 고마웠다. 동시에 섬광처럼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사진과 뚜벅이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사진은 나 말고도 찍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더 잘 찍는다. 내게는 걷기가 우선이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김진숙·박문진 두 분이 걷고 있는데 나도 똑같이 걷고 싶었다.

 

희망 뚜벅이는 이날 최초로 평택로컬푸드 종합센터 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꿀잠에서 카레라이스를 준비했다. 선두와 후미가 10분 정도 차이가 났다더니, 식당은 이미 만석이었는데도 대기 줄이 길었다. 종이컵에 받은 백미 밥에 비해 카레가 적었다.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김진숙 동지가 다 드셨다고 박문진 동지 맞은 편에 앉으라고 했다. 잠시 후 카레가 떨어졌다는 소리가 들리더니 진행하던 사람들은 컵라면으로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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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 김소연 운영위원장도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어머, 어떡해요. 라면으로 식사를 하시고."

"라면이 해장엔 최고예요."

 

호탕한 웃음으로 답하는 그이는 2008년 기륭전자 투쟁 때 94일을 단식했었다. 이후 자나깨나 건강을 챙겨야 할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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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잠 밥팀(앞줄 우측에서 세 번째가 김소연 꿀잠 운영위원장)

 

 

밥을 다 먹고 박문진 동지에게 후지산이 그려진 과자를 드렸다. (일본 방사능 오염 지도 상 그 회사 지역은 아직 표시가 없다.)

 

"동지들과 같이 먹을게요."

 

예상했다. 그런데 어쩐지 민망해서 얼굴이 굳어졌다. 한 학기에 15주 강의시수만큼 받는 급여에서 월세 빼고 일 년 동안 알뜰살뜰 모아서 후지산 근처에 사는 25년 지기 일본인 친구를 처음으로 만나러 간 길이었다. 방문 약속 후에 희망 뚜벅이 일정을 알게 되어 취소할 수 없었다. 뚜벅이 하다가 가는 게 미안해서, 일부러 니토덴코 본사가 있는 오사카를 경유하는 두세 시간 동안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조이야기 전단이라도 돌리겠다고 일본어판을 챙겨갔다.

 

때마침 오사카에는 저녁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 전단을 나눠주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식당과 가게에서 계산할 때 전단지를 주고는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나눠주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나중에는 성금함에 가진 잔돈을 몽땅 털어 넣으면서 전단을 전했다. 일종의 교환이었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는 2024년 9월 13일 오사카유니온네트워크에 가입하고 본사인 일본 니토덴코에 단체교섭요구서를 전달했으나 본사는 답변을 거부했다. 그래서 2025년 1월 31일 오사카노동위원회에서 사측과 1차 대면 조사를 실시했다. 사측에선 법무법인 대리인이 출석했다. 3월 18일이 2차 대면조사일이다.

 

이에 1월 20일부터 3월 28일까지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와 민주노총 경북본부 투쟁사업장 담당국장 중심으로 오사카 본사와 이바라키시에 위치한 니토덴코 연구소 앞과 공급망 최상위층에 있는 애플 매장 앞(신사이바시)과 니토덴코가 후원하는 감바오사카 축구단 경기장 앞에서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공급망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에 대해 책임을 묻는 원정투쟁 중이었다.

 

관광은 필요 없다고, 당신의 집과 정원과 후지산만 보면 된다는 내 말에 친구는 후지산이 보이는 식당과 차 박물관에 데려갔다. 그리고 기념품 가게로 안내했다.

 

"제가 돈을 낼 테니 기념품을 사세요."

 

관광도 아닌데 기념품이라니? 생각도 안 해봤다. 갑자기 선물할 사람이 누가 있나 머릿속을 헤집어보니 딱 두 사람이 떠올랐다. 박문진과 김진숙. 그때 알았다. 나는 지극히 현재를 사는 사람임을. 희망 뚜벅이 하다가 갔으니 동지애만 가득함을. 일본에 가서도 오늘은 어떻게 걷고 있을까, 다리는 아프지 않을까 계속 생각하고 있었음을. 곧이어 차해도와 장영식 이름이 연달아 맴돌았다. 그러나 남의 돈으로 염치없이 네 개나 집어들 순 없었다. 그래서 말차로 유명한 회사 제품이라는, 나는 먹어보지도 못한 과자를 두 상자 고이 가져와 건네면서도 네 개를 드리지 못함이, 왠지 두 사람만 우대하는 듯 보일까 봐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었다.

 

지난 늦가을 희망 뚜벅이 후 안부 문자 중에 내가 전체 일정을 다 함께 걷지 못함과 험난한 세월을 살아내 오신 선배들 삶에 대한 막연한 미안함을 비친 듯하다. 하도 뭔가를 바로바로 지우고 비워서 답문을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박문진의 답은 가슴에 묵직하게 남았다.

 

'우리는 알려지기라도 했지, 이름도 없이 투쟁하신 많은 분들이 계세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다른 사람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성품. 그게 몸에 배어 나눔과 베풂이 자연스러운 보인 박문진. 그러니 필리핀에서 중증장애아동을 돌보고 성치 않은 발목과 무릎으로 고공 농성자 둘을 내려오게 하기 위해 부산부터 서울까지 500km 이상을 걷는 게 아닌가. 그날 이후 나는 두 사람만을 위한 무언가를 중단했다. 마스크팩도 10개들이를. 홍삼 스틱도 다섯 개를. 그렇게 보인의 품이 나를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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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지난 가을 1차 희망 뚜벅이 때 함께했던 이들을 만났다. 강원도 태백에서 온 교사와 지혜복 교사의 동지였다. 나는 선생님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이의 흥 넘치는 노래가 시작되었다. 노래에 맞춰 바람이 불고 바람 따라 깃발이 흘렀다.

 

어디선가 철새 한 무리가 대열 위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토건 자본과 정치권이 신공항을 짓겠다고 발악하는 수라갯벌이 떠올랐다. 잘 있니? 갯벌아, 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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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를 가다 유흥희 비정규직이제그만 집행위원장의 운동화 끈이 풀렸다. 롱패딩으로 숙이기가 쉽지 않던 차에 옆에 가던 누군가가 끈을 묶어 주었다. 유흥희 역시 기륭전자 투쟁 때 67일 단식자. 신발 끈이 아니라 튼튼한 밥줄이라도 묶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연대란 함께 멈춰주는 것, 동지란 풀린 끈을 묶어주는 사람. 그렇게 인권네트워크 바람의 명숙도 연주하는 멜로디언 동지 옆에 잠시 함께 앉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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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B02930' 명숙과 멜로디언 동지.JPG

인권네트워크 바람 활동가 명숙과 멜로디언 동지

 

 

그렇게 밀어주고 끌어주며 희망 뚜벅이들은 함께 평택 한국니토옵티칼 공장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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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공장으로

 

 

15시 35분,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일곱 명이 열린 문을 지나 공장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구미에서처럼 일할 수 있을 듯한, 일하고 싶은 평택 공장. 그 앞에서 희망 뚜벅이 집중 문화제를 시작했다.

 

먼저 민중의례를 하고 박문진 동지가 발언했다.

 

"동지들 반갑습니다.

구미 옵티칼에서 희망 뚜벅이 첫 출발하는 날은 야속하게도 우주최강 한파와 눈바람이 오늘같이 휘몰아쳤습니다. 눈조차 뜨기 힘들었고 몸도 자주 휘청거렸습니다. 희망 뚜벅이들을 시험하는 것 같았고 우리들의 혹독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마음을 독하게 다잡는 첫날이었습니다. 그 돌풍에 나부끼는 말벌들의 기발한 깃발들도 위태로웠습니다. 이 미친 바람에 곧 접겠지라고 바라보며 걸었지만, 그 깃발은 오히려 끝까지 뚜벅이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많이 관료화되어 있던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 정도 상황이면 웬만한 조직은 모두 깃발을 접었을 것입니다. 윤석열 계엄 이후 광장과 남태령, 한강진에서 노동자 투쟁 현장까지 2030 여성 청년들의 함성은 꺾이지 않았고 늘 중심에서 깃발이 되었습니다.

 

계산하지 않는 연대, 몸을 사라지 않는 연대, 면접을 앞두고도 투쟁 사업자에 정장을 들고 다니며 자신의 안위를 버리는 연대, 세종호텔, 희망 뚜벅이, 거통고(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를 오가며 알바비 받은 돈으로 교통비와 숙박비, 심지어 뚜벅이들의 간식까지 챙겨 와 선배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헌신적인 연대, 말벌들의 연대 투쟁은 우리에게 멋진 죽비가 되기도 하고, 조직의 지침 없이도 무소의 뿔처럼 당당히 연대의 길을 열 수 있다는 용기를 혼자서도 잘 실천하고 있습니다.

 

영혼 없이 의무 방어적으로 정형화된 우리들의 투쟁,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파업을 하고자 힘썼던 기획들이 이젠 점점 파업하는 노조가 이상하고 귀찮아지고 적당히 타협하는 방식의 전술들. 우리 이러다 다 죽습니다. 일본 노조처럼 될까 봐 굉장히 두렵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말벌들의 투쟁에서 희망의 불씨를 보았고 그것은 관료화된 기존 활동가들의 심장을 불리는 북소리로 점점 커지고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동지들, 열린 강장에서 세대 간의 소통과 연대로, 파업이라는 위대한 이름을, 조건 없는 연대 투쟁, 연대 투쟁이라는 열정적인 귀한 이름을 다시 찾고 싶습니다.

그래서 700일이 넘는 투쟁을 하고 있는 옵티칼 동지들과 고공에서 1년이 넘도록 투쟁하는 우리 박정혜, 소현숙 동지가 이 평택 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꼭 복직시킵시다.

위험하게 고공에서 투쟁하고 있는 세종호텔 고진수 동지와 간부들을 꼭 복직시킵시다.

지혜복 동지, 거통고 동지들 그리고 장기투쟁 사업장들에서 사업장들이 꼭 승리하도록 합시다.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을 파괴시켜 일상의 생활조차도 숨통을 조여 오는 사회, 가진 자들만 더 배 불리는 사회를 이제는 우리가 파괴시켜 노동이, 노동자가 존경받는 차별 없는 사회를 바꿉시다.

 

여기까지 걷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길을 나서니 많은 길동무가 생기는 것처럼 투쟁을 시작하면 연대 동지들이 생깁니다. 총파업을 하겠다,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말을 항상 민주노총 간부들은 합니다만 굉장히 공허합니다.

 

진돗개는 짖지 않고 사람을 문다고 합니다. 우리 민주노총도 입이 먼저가 아니고 현장으로 돌아가서 내 문제가 아닌 타 노조의 투쟁, 사회 정치적인 투쟁을 조직해서 확실하게 자본과 정치인들을 단박에 물어 우리 것을 되찾아 봅시다. 동지를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투쟁 속에 동지 있고 동지 속에 승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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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

 

 

잠시 후 세종호텔 노조 사무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세종대학교 재단 대양학원이 운영하는 세종호텔은 2021년 코로나 19에 따른 경영위기를 이유로 구조조정에 돌입해 전환배치·희망퇴직을 실시했다. 희망퇴직을 거부한 노조 조합원 12명은 해고됐다. 노조와 노동자들은 세종호텔이 2023년부터 흑자로 전환돼 해고가 부당하고, 민주노총 조합원에 대한 해고는 부당노동행위라는 이유로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냈다. 중노위에서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정하자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지난해 12월 대법원이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확정했다.

이에 2025년 2월 13일 새벽 5시, '세종호텔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고진수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관광레저산업노동조합 세종호텔지부장이 호텔 앞 지하차도 입구 교통시설 구조물에 올라 농성에 돌입했다. 이날이 열하루째였다.

 

세종호텔 노조 사무장은 사람이 걸어 다닐 수도 없는 지하차도 구조물에 지부장이 있고, 영하 9도에 아래에는 말벌 동지들이 천막과 비닐로 엄호하고 있다고 했다. 민주노총도 왔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만났지만, 결코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복직 투쟁은 노동자의 힘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희망 뚜벅이 160명이 출발했는데 문화제 참석 인원은 200여 명이 되었다. 거기에는 박준과 최도은과 임정득 민중가요 가수가 와있었다. 투쟁 현장마다에서 만나는 박준의 기타와 노래에서 지난 유성기업, 파인텍, 콜택지회 투쟁이 떠올랐다. 세종보 가동중단을 위한 천막 농성 투쟁에서 만났던 최도은은 2022년 옵티칼 노조에 최현환이 지회장 될 때부터 왔었다며, 지회장과 배현석 조합원의 아이들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신곡 '고용승계 책임져라'와 대표곡 불나비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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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티칼 조합원들이 앞으로 나왔다.

최현환 지회장은 "그 언제보다 오늘이 정말 행복합니다. 바로 동지들과 함께 저희가 고용 승계를 위해서 들어갈 이 공장까지 함께 구미에서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박정혜 소현숙 동지가 함께 동지들과 다시 이 자리에서 승리 보고 대회를 할 그날이 상상이 됩니다. (하략)"

 

이지영 사무장은 "현장으로는 저희 일곱 명이 들어가겠지만 우리 동지들과 다 같이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하루빨리 고용 승계해서 현장으로 사원증 걸고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배현석 조합원은 "함께해 주시는 소중한 걸음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곧 고용 승계돼서 여기 옆에 보이는 공장에서 동지들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꼭 그날이 올 거라고 믿고 그때까지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겠습니다."

 

이희은 조합원은 "오늘 아침에 평택역에서 같이 출발을 했는데 제가 자꾸 뒤에 처지더라고요. 그렇지만 힘을 잃지 않고 연대동지들과 저희 동지들이 함께 걸어가서 힘이 넘쳤습니다. 같이 이 자리에 같이 오게 돼서 너무 좋고요. 열심히 투쟁하고 끝까지 고용 승계되는 날까지 할 테니까 그 길에 같이 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정나영 조합원은 "오늘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고용 승계 쟁취해서 꼭 현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고공의 소현숙은 "희망 뚜벅이는 멈추지 않고 국회로 가서 니토덴코의 만행을 알렸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자는 쓰다가 버리는 부품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알게 하겠습니다. 끝까지 싸워서 반드시 고용 승계를 쟁취하겠습니다."

 

역시 고공의 박정혜는 "저희는 일본 기업 니코덴코에 맞서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413일째 고공 농성 중에 있습니다. (중략)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수많은 고통을 받으면서 투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작한 투쟁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확신과 더 열심히 싸워주고 동기 부여를 주시는 많은 동지분들과 말벌 동지들, 옵티칼 투쟁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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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옵티칼하이테크 조합원

 

 

문화제는 마무리되었다. 노래도 하지 않는데 응원하러 온 가수 임정득은 새로 나온 음반과 악보집을 선물해주고, 내 빠듯한 기차 시간에 맞춰 평택역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다음날은 월요일로 희망 뚜벅이 하루 쉬는 날이었다.

임정득 3집 <가능의 미래> CD를 종일 들었다. 악보 반 사진 반인 임정득 악보집은 노순택 작가의 사진집이기도 했다. 사진으로 하는 연대였다.

앨범에는 조영관 시인의 시가 가사인 노래들이 있었다. 2017년 2월 제7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 수혜식에 임정득이 초대가수로 왔었다. 이후 유성기업 투쟁부터 화성 아리셀 참사 희망버스까지 현장에서 종종 만나는 소중한 인연이 되었고, 그이를 볼 때마다 나는 초심을 상기했다. 걸을 때마다 새로운 길을 만나듯이. 

 

 

 

19일 차 : 2월 25일 화요일 한국니토옵티칼 평택 공장~진위역 17km 100명

 

다시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에 집을 나왔다. 그믐을 향해 뜬 가느다랗게 휜 달이 지구와 부쩍 가까웠다. 기차에 탄 나는 산과 건물을 사이에 두고 달과 숨바꼭질을 하며 달렸다. 무언가에 가려 잠시 보이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달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고 나 역시 그런 존재가 필요했다. 옵티칼 노조에게 희망 뚜벅이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7시 50분, 평택역에 도착했다.

한 시간 후 슬슬 평택역 서부 광장으로 나가보니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호야 노조 사무장 자동차를 타고 한국니토옵티칼 공장까지 왔다. 호야는 노조 규모가 작지만, 바로 맞은편 공장이라 든든했다.

 

이날, 그동안 참가일 전날과 당일에 꼼꼼하게 일정과 주의 사항과 평등약속을 문자로 알려주는 하은이란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지난가을엔 참가신청서를 쓰지 않고 걸어서인지 몰랐는데, 박문진의 문자보다 먼저 도착한 숨이차의 알림으로 참가신청서를 쓰고 걷게 된 이번 희망 뚜벅이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신속하고 조직적인 안내였다. 차편이든 도시락이든 질문하면 즉각 오는 응답에 홍보담당자 누군가가 걷지 않고 따로 사무실에서 연락망만 전담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하은은 늘 희망 뚜벅이와 함께 걷고 있던 또 다른 뚜벅이로 기록담당자였다.

 

공장 앞 농성 천막에서는 금속노조 김혜란 조직국장이 밤샘하고 나와 있었다. 그동안도 연대했지만, 희망 뚜벅이 이후 고공 농성자 제외 다섯 명뿐인 옵티칼 조합원이 천막 농성을 못 하자 여러 곳에서 분담하고 있었다. 그이로부터 전날인 24일 당진 현대제철 직장 폐쇄 소식을 들었다.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노사갈등과 투쟁. 우리 모두의 달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출발 직전에 박문진은 얼굴이 따갑다고 했다. 겨울 자외선 19일이면 피부를 상하게 할 것이다. 서둘러 자외선 차단제와 바셀린을 발라주는 사이 말벌 동지들은 평택 공장 앞에 분필로 표어를 쓰고 있었다. 구미 공장 옵티칼 조합원들이 고용 승계되어 출근하고 싶은 평택 공장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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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튀 말고 고용 승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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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공장 앞에서 출발

 

 

70여 명이 출발하는데 삼선 슬리퍼를 신은 말벌 동지가 있었다. 하나뿐인 운동화가 찢어졌다고 했다. 내 운동화랑 바꿔 신자고 해도 슬리퍼가 편하다고 했다.

희망 뚜벅이는 한 번 선두를 놓치면 웬만해선 따라잡기가 힘들다. 뚜벅이 사이에선 희망 축지법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쳐지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중간에서 걸은 덕분에 첫 뚜벅이인 마사회 과천지회장과 사북민주항쟁동지회장과 일정 구간을 함께했다. 함께 걸으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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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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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통고와 옵티칼과 세월호

 

 

점심시간에 시래기 김밥이 나눠졌는데 매우 별미였다. 희망 뚜벅이들에게 맛있는 김밥을 먹이기 위해 40분 걸리는 배달을 감행한 민주노총 경기도본부에게 감사를.

 

다시 걸었다. 잠시 신호 대기 중 장 작가와 쌍용자동차 동지가 할아버지의 보행을 돕고 있었다. 가끔 인간이 아름답다거나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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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걷다 쎄무 슬리퍼를 신은 말벌 동지도 등장했다. 그이는 도착 지점에 다다를 즈음 아예 슬리퍼를 양손에 끼고 양말 뚜벅이를 감행했다. 슬리퍼로 17km라니 젊음이 아니고선 상상할 수 없는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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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세월호 참사 임경빈 엄마 전인숙 님이 함께 걸었는데, 이분은 경빈이 휴대전화기로 사진을 찍는다고 하셨다. 아들에게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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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빈의 휴대전화기

 

 

경빈 엄마를 촬영하고 있는데 장영식 사진작가가 오셔서 찍어달라고 하셨다. 대선배 작가님이 나에게 사진을? 떨려서 셔터와 조리개를 맞추는 게 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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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엄마와 장영식 사진작가

 

 

앞에 가던 김진숙 동지가 이지영 사무장의 어깨를 감싸 안은 모습이 보였다.

동지란 어깨를 잡아주는 사람. 김진숙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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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어깨 잡아주는 김진숙

 

 

그리고 동지란 함께 걷는 사람. 말벌들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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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역 도착

 

 

평택이라 미군 기지 때문에 전투기 소음으로 시끄러웠지만, 젊고 생동감 넘치는 기운 덕분에 도착지인 진위역까지 힘들지 않게 다다랐다. 70여 명은 어느새 100여 명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양말 동지가 고공 농성자 중 한 명과 동갑이고 그날이 생일임을 알았다. 그이가 시 한 구절 같은 말을 했다.

 

"(상략) 옥상에서 지상까지 내려오는 가장 짧은 거리를 지금 가장 늦게 내려올 수밖에 없는 저 동지를 생각하면 제가 이렇게 조금 힘든 게 아무 힘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끝까지 완주해야겠다, 차를 타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끝까지 내려오시는 날까지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무리 발언에서 김진숙은 먼저 박문진이 필리핀 봉사활동 당시 8개월을 같이 살았던 강아지의 교통사고 소식을 전했다. 그래서 그날 박문진의 웃음소리를 한 번도 들을 수가 없었다고, 힘내라는 박수를 부탁했다.

아, 그래서 아침에 얼굴이 따가웠던 거였다. 눈물 자국 때문에.

김진숙은 발언을 이어갔다.

 

"우리 오늘은 유난히 비정규직 동지들이 많이 오신 것 같은데요. 우리 건강보험공단 동지들 제가 건강보험공단 동지들이나 도로공사 동지들한테는 되게 미안한 게 한창 투쟁하실 때 제가 암이 재발하고 그다음에 직장에 문제가 생겨서 직장을 잘라내고 난소를 잘라내고 난관을 잘라내고 담낭을 잘라내고 1년에 한 번씩 뭔가를 잘라내서 제 몸의 장기는 지금 다섯 개가 없습니다. 근데 너무 신기하지. 여러분들보다 훨씬 잘 걷습니다. 하나씩 잘라내세요. (웃음)

하여튼 그때 제가 우리 도로공사 동지들이랑 건강 공단 공직을 주장하는데 못 가봐서 너무 미안합니다. 그런데 우리 정규직들은 영원히 자신이 정규직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현대중공업에서 몇 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아들이 결혼해서 아이가 셋인데도 취업이 잘 안 됐데요. 그래서 아버지가 이 공장에 와서 하청이라도 일해라. 그럼 언젠가 정규직이 되겠지. 아들이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에 입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일하다가 혼자 일을 했는데 목에 호스가 감긴 채 시신으로 발견이 됐어요. 사측에서는 자살이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근데 이 아버지는 도저히 아들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정문 앞에서 8개월을 일인 시위를 했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결과는.

아들의 죽음에 진상이 밝혀지고, 회사가 사과하고, 보상이 이루어지고 이게 순서입니다. 그죠? 근데 아버지마저 잘렸습니다. 그 아버지가 지금 택시 운전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는 정규직의 일자리가 기본처럼 돼버렸는데 (중략) 저는 비정규직 문제를 없애는 길은 정규직들이 투쟁하는 길이라고 봐요. 근데 그걸 이미 우리 정규직 노동자들은 못 합니다. 왜? 정규직의 일자리는 기득권이 돼버렸거든요. 그리고 그것은 놓치면 안 되는 일자리가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민주노총의 주인은 장래 희망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돼야 된다고 믿습니다. 왜냐면 정규직들은 이미 초심을 다 잃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 힘쓰시더라도 힘내서 투쟁해서 정규직이 되는 게 아니라 노동 해방의 세상으로 갑시다. 투쟁!"

 

마지막으로 고공의 두 동지들과 전화 연결을 했다. 그들은 말벌 멜로디언 동지와 그리고 맘마 동지의 방문으로 아직 2만 보를 못 채웠지만, 연대 방문으로 행복한 하루였다고 했다. 둘의 행복이 전화 너머 그들을 위해 걷는 우리에게도 전해졌다. 이날 희망 뚜벅이들은 양말 동지가 가져온 생일떡을 받아 들고 흐뭇하게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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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차 : 2월 26일 수요일 진위역~수원역 23km 80명

 

진위역까지 완행으로 가는 길은 느리고 멀었다. 어느 한 역 지나치지 않고 정차하는 게 꼭 우직하고 요령 없는 내 모습 같았다.

진위역 40여 명이 출발했다. 얇아진 겉옷처럼 경쾌한 발걸음으로 오산시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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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역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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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도 하은 동지는 쉼 없이 문자를 하며 뚜벅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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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 동지

 

 

말벌 동지들의 깃발은 제각각 이색적이다. 그런데 이날 매우 엄숙한 검정 깃발 하나가 등장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문구 사이에는 전태일 열사의 얼굴이 있었다. 서울 강남에서 왔다는 그 말벌 동지는 아침잠이 많아서 못 일어날까 봐 밤을 꼬박 새우고 참가했다고 했다. 그에 비해 사뭇 경쾌한 어정쩡 연대도 있었다. 친구 둘이 만들었다는 그 연대처럼 뾰족뾰족 특색 있고 유쾌하게. 그게 말벌 동지들의 모토 잼투(재미있게 투쟁)였다. 하지만 이들도 생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이들. 각자의 사회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

 

이날 7일을 걷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말벌 동지는 가는 길에 면접을 본다고 했다. 부디 바른 사람을 알아보는 좋은 직장을 만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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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시간에 간식에 '지저 끔 드십시오'란 안내문이 있었다. 지저끔은 각자 알맞게 적당히라고 한다.

휴식시간에도 김진숙·박문진 두 분은 연락으로 분주했다. 안경 벗은 김진숙의 얼굴이 새까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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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가면 밥차가 있다고 했다. 우리밥연대에서 준비하니 간식을 조금 먹으라고 하셨다. 그 조언을 들었어야 했다. 다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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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시 평화공원에서 밥차를 기다려 점심식사를 했다. 기다리고 고대하던 '우리밥연대'밥이었다. 통영의 바다와 산의 맛이 물씬 나는 반찬은 비건과 논비건으로 나뉘어 풍성했고 밥도 백미, 콩밥, 잡곡밥 세 종류였다. 친환경 종이접시 위에 톳나물, 궁채, 돼지불고기, 배추된장국 등 공원에 한식집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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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맛이 격조가 있어 식후에 노동 음료인 인스턴트 믹스 커피를 마실 수 없었다. 두 맛을 섞으면 안 될 것 같은 품격 있는 맛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도 '우리밥연대'밥이었기에 믹스 커피를 못 마셨다. 나무젓가락 포장지에 '싸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밥연대'라고 쓰여 있는데, 우리는 답한다. '밥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휴식시간에도 말벌 동지들은 땅바닥에 앉아서 쉬고 멜로디언을 불고 창을 부른다. 이온 음료와 초코파이와 초코바로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사이 23km가 21km로 줄었다. 그래도 다리는 아팠다.

 

도착 지점에서 40여 명은 80여 명이 되었다.

 

박문진 동지는 나도 종종 가던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대해 발언했다. 백석과 사랑해 진향(眞香)에서 자야(子夜)가 된 김영한이 '무소유'를 읽고 법정 스님께 길상사를 시주하면서 "그까짓 천억,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라고 했던 일화. 우리의 투쟁도 천억이 아깝지 않아야 한다는.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나린다

(하략)'

 

이날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는 제6회 노회찬상 특별상 수상을 했다.

 

'맑고 향기롭게'

 

뚜벅이 후 서울시교육청 앞 희망 텐트에 김진숙·박문진·말벌 동지들이 간다고 했다. 장거리 도보로 매우 피로한 나는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날 밤 다리가 팽팽하게 부어올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급기야 내일은 못 걷겠구나, 걱정하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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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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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차 : 2월 27일 목요일 수원역~안양역 19km

 

인체 회복력은 놀라웠다. 아침에 다리를 들어보니 부종은 거의 가라앉았고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수원역에서부터 150여 명이 걸었다. 세월호 임경빈 엄마는 물집을 터뜨리고 왔다고 하고,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엄마도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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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젊은 청년이 김용균 재단 깃발을 들고 걸었다. 어쩌면 용균 엄마도 생각하고 있을 듯한 말을 건넸다.

"故 김용균도 살아있었다면 비슷한 나이였을 텐데요."

"저는 편안히 공부만 하는데……."

젊은이가 미안한 목소리로 답했다. 정작 미안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11시 반, 경기고용노동청에서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어갔다. 화장실에서 땀에 젖은 내복을 벗어야 했다. 내복을 챙기다 며칠 전 카메라 때문에 새로 산 엄지와 검지가 나오는 털장갑을 잃어버렸다.

 

12시 10분, 수원시 효행공원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박문진 동지 따라 비건 줄에 섰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톳나물, 궁채, 들깨토란국……. 신선한 재료와 정성 들인 요리로 수백 명이 먹고 또 먹을 수 있을 음식을 준비했을 노고로 우리밥연대는 식성에도 평등함이 있음을, 존중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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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B03510_ 우리밥연대.JPG

 

 

말벌 동지들은 저마다 스티커를 제작해서 나눠주고 캐릭터 인형들을 들고 행진한다.

한 인형에 대해 물으니 웹소설의 주인공인데 그가 자신의 운동 선배이고, 오늘은 그 주인공이 먼저 나가자고 했다고 한다. 음… 이해하고말고. 은목걸이에 생명을 불어넣어 <굴뚝새와 떠나는 정원 일기>를 쓴 나 아닌가. 짐짓 물었다.

 

"그 선배가(인형이) 가서 동지들 만나자고 했어요?"

"……옵티칼 고용승계를 위해서 아닐까요?"

 

우문현답이었다. 그 옆 사람 인형은 게임 캐릭터라고 했다. 앞에 걷는 이의 응원봉도 그 게임이라고 했다. 나는 이 젊은이들의 문화를 자세히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아이돌 등 팬덤 덕질은 건강하게 발전하여 국회의사당 앞에서 탄핵을 외쳤고 희망 뚜벅이에서 고용 승계를 외친다. 어릴 적 <요술공주 세리>나 <꽃천사 루루>가 되어 변신하고 싶었던 나보다 더 진화한 말벌 동지들은 그들만의 캐릭터로 실제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CKB03570' 운동 선배.JPG

 

 

14시 40분 휴식시간에 음료, 바나나, 과자, 젤리 등이 들은 지퍼백이 나눠졌다. 경기권으로 오니 간식이 풍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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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역까지 밝고 활기 있게 도착했다. 걷는 동안 말벌들의 생기는 개성 있는 깃발처럼 통통 튀어 피어올랐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목청 높여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팔로 하트를 날리는 젊고 생동감 넘치는 기운 덕분에 도착지인 안양역까지 힘들지 않게 다다랐다. 말벌 중 마법 소녀 동지가 노래를 불렀다.

"1987년 4월 일본 국철의 분할 민영화를 전후해 국철 노조원 200여 명이 자살합니다. 그때 제발 죽지 말고 살아서, 살아서 싸우자며 간절히 염원한 노래입니다."

 

마지막으로 김진숙 동지가 발언했다.

 

"예,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기는 안양입니다.

 

박창수 위원장이 안양구치소에 수감되고 안양병원에서 변사체로 발견이 되고, 강제 부검을 당해 갈가리 찢긴 시신을 전노협의 깃발로 감싸 솥발산 열사 묘역에 묻었습니다.

오늘 단병호 위원장님이 함께 걸으셨습니다. 전노협 시절 우리 노동자들은 정말 멋있었습니다. 노점상이 철거를 당해도 농민이 농약을 마신 채 죽어도 그 싸움의 노동자들은 함께하고 연대했습니다.

신발 공장 노동자들이 구사대에 짓밟힐 때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2천 명이 도로를 막은 채 삼화고무까지 걸어가서 그 노동자들을 구해냈습니다. 그때 우리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붙잡고 울었던 그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투쟁 끝에 저는 산자 회의법 위반으로 구속이 됐지만, 그 구속을 저는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창원의 노동자들이 연행이 될 때 전체 노동자들이 메인 스위치를 내리고 호송버스를 가로막았던 그런 용기가 우리 노동자들에게 있었습니다.

 

민주노총으로 조직은 몇 배가 커졌지만, 세종호텔 노동자는 15년을 투쟁하다 '저는 연대 동지들을 믿고 고공농성을 감행하기로 했습니다.'그런 글을 쓰고 고공으로 올라왔습니다. 민주노총 조합원이 조직이 아니라 연대 동지들을 믿는다.

지혜복 교사는 혼자 싸워줍니다. 전교조 조합원이 혼자 투쟁하다 이제야 비로소 말벌 동지들이 연대하는 실정이 됐습니다.

 

그저께는 제가 복직한 지 3년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제 생애 65년 중 가장 영광스러웠던 날, 저는 37년의 설움과 울분이 그날 하루에 다 씻겨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김진숙이라면 치를 떨었던 사장이 저에게 꽃다발을 주고, 90도로 인사를 하고, 정년 퇴직자들에게 주는 금 열 돈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그 금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기 말벌 동지들 중에 금이 필요하신 분 저한테 얘기하십시오. 우리 말벌 동지들한테는 아낌없이 줄 수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가 본 영화 중에 <수라>라는 영화와 그 영화가 저는 가장 감동적이었는데요.

우르갼이라는 노승과 앙뚜라는 동자승의 이야기입니다. 우르갼이라는 노승은 앙뚜가 린포체의 환생이라고 믿습니다. 그 앙뚜의 고향을 찾아서 눈 덮인 티베트 산맥을 넘어 안개의 고향으로 가는데 발도 얼고 온몸이 꽁꽁 얼었습니다. 그 어린 동자승의 온몸을 우르갼이 체온으로 녹여주면서 웁니다.

저는 우리 노동운동이 그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서로 언 몸을 녹여주고 눈이 푹푹 쌓인 길을 서로 손잡고 넘을 수 있는, 그게 노동운동이라고 믿었습니다.

 

여기 계신 우리 조직 동지 여러분들, 전노협 시절이면 우리가 비정규직을 외면했을까요?

이주 노동자들이 비닐하우스에서 죽어갈 때, 돼지우리에 떨어져서 죽었을 때 우리 같은 노동자들은 외면했을까요? 우리는 더 커지고 돈도 더 많아졌는데 우리는 왜 더 비겁해졌을까요? 그야말로 처음처럼 다시 시작하는 그 마음을 저는 이 기나긴 길을 걸으면서 말벌 동지들에게 배웁니다.

우리 동지 여러분들 반성해서 벗어납시다. 그리고 정말 처음처럼의 마음으로 우리가 왜 노동조합을 시작했는지 그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투쟁!"

 

1991년 당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었던 박창수 열사. 그가 전노협 탈퇴 공작에 저항하다가 고문치사 의문사 당한 후 병원에서 영안실 벽을 부수고 들어온 백골단에 의해 시신이 탈취되었던 곳. 그곳이 안양이었음을 발언을 통해 기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틀을 남겨둔 희망 뚜벅이가 안양역까지 걸었다.

 

CKB03612' 한국옵티컬 고용승계.JPG

 

 

 

 

고공 동지들과 통화 연결 후 단체 사진을 찍고 내일을 기약하며 해산했다.

 

이상하기도 하지. 화장실에서 몸자보를 벗고 카메라 정리를 한 뒤 안양역 지하철 플랫폼으로 내려갔는데 말벌 동지들 무리가 있었다. 그 너머에는 김진숙 동지도 보였다. 그들은 꿀잠에 간다고 했다. '원조꿀벌이 말아주는 싸우는 노동자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혹시나 해서 신청 링크에 연결해 들어가니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신청이 마감되었다는 공지가 있었다. 살짝 펼쳐보았던 마음을 막 접으려는 그때 말벌 동지들을 비집고 김진숙 동지가 다가왔다.

"일곱째별님도 시간 되시면 같이 가시죠."

그렇게 예상 못 한 길이 연결되었다.

 

영등포에 있는 꿀잠은 비정규노동자, 해고노동자, 사회 활동가들의 쉼터로 휴식 및 재충전, 치유, 교육과 문화 활동, 소통과 연대를 통해 시민운동을 활성화하고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기 위해 2016년 6월에 창립된 쉼터이며, 이야기하는 사랑방이자 문화예술과 만나는 장이다.

 

오후 다섯 시 반이 넘어 지하 1층에서 영화 <그림자들의 섬>을 상영했다. 부산시 영도에 있는 대한조선공사, 이후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이야기였다. 바다에 면한 거대한 조선소에 산업역군들의 모습이 등장했다. 김진숙을 포함한 인터뷰이들이 당시를 회상해 나갔다. 그러다 헌칠한 키에 봄눈 녹일 듯 따스운 미소의 김주익 열사 살았던 모습이 화면에 등장했을 때부터였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영화가 끝나자 옵티칼 이희은, 정나영 조합원이 김진숙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왜 김진숙 동지가 자기들을 돕는지 알겠다는 그들의 눈도 퉁퉁 부어 있었다.

 

이후 김진숙의 강연이 있었다. 그 내용을 이 지면에 다 쓸 수는 없다. 강화도 출신인 그이가 그 또래 가난하고 어린 여성이 겪었던 온갖 거칠고 험한 직종을 거쳐 1981년에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해 1986년에 노동조합 대의원이 되면서 휘몰아쳤던 인생이야기.

 

그이가 2020년 12월~2021년 1~2월  엄동설한에 자신의 복직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해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올 때 청와대 앞에서 다섯 명이 최장 47일까지 단식을 했다. 그때 단식자 인터뷰를 위해 매 주말 정읍에서 올라가 취재하고도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아 읽었던 <소금꽃나무>. 그 책보다 백 배 생생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신산한 이야기를 말벌 동지들에게 들려줘서인지 그이의 얼굴이 새삼 편안해 보였다.

강연 후 질문 시간은 다짐의 장이었다. '말벌'이라 칭하는 2030 세대들은 어찌 그리 똑똑한가. 하나같이 자신의 감상과 각오를 논리적으로 표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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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꿀벌이 말아주는 싸우는 노동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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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꿀잠 강연

 

 

 

22일 차 : 2월 28일 금요일 안양역~영등포역 14km

 

어디에선가 구슬프고도 애잔한 휘파람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했다. 안양역으로 향하는 길에 감은 눈시울이 살며시 젖어왔다. 엊저녁 김진숙의 이야기들이 조각조각 떠올라 눈물이 되고 있었다.

시뻘건 녹물 들어 구멍 뚫린 옷가지들이 널린 집에서 뛰어나와 퇴근하는 아빠 팔과 목에 대롱대롱 매달린 아이들, 어느 날부터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들, 무지가 죄이던 시절, 억울한 죄책감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노동자들, 목을 매야 했고 투신해야 했고 동료가 목을 맨 그곳에 따라 올라가야 했던 사무친 세월. 그리고 그 대가로 37년 동안 해고되어 급기야 명예를 되찾기 위해 암세포가 다시 퍼진 몸으로 부산부터 서울까지 걸어야 했던 투혼. 결국 왼쪽 가슴으로는 누구를 안을 수도 없었던 통증.

 

여운(餘韻)처럼 여루(餘淚-눈물 루)라는 단어가 있으려나 찾아보니 부절여루(不絶如縷)라는 말이 있다. 실처럼 가늘면서도 끊어지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짐. 그렇게 가느다란 실처럼 지난밤의 이야기들이 부산 산복동 골목 따라 고불고불 이어져 되살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상념에 젖어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안양역에서 출발해서 영등포역까지는 14km. 이 정도 거리는 희망 뚜벅이에게 휴식시간 없이 점심시간 한 번으로 끝내게 되었다.

이상적인 보폭은 신장-100cm. 그렇다면 나는 다른 뚜벅이들보다 더 빨리 걸어야 한다. 게다가 사진까지 찍어야 하니 뛰어야 한다. 그러나 희망 뚜벅이 행렬은 거침없이 빨랐다.

 

 

CKB03870' 보폭을 보라.JPG

CKB04625' 부감2.JPG

 

 

11시 45분 금천구청 앞에는 시민들이 손피켓을 들고 환호했다. 보이차와 커피 등 음료와 간식이 있고, 점심식사는 일회용 식판에 담겨 배식되었다.

혼자인 사람은 혼자인 사람을 보게 마련. 혼자 밥을 먹고 있는데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이 눈에 뜨였다. 제주도에서 올라와 3일 동안 걷는다는 소설가였다. 잠시 이야기를 나눠봤는데'국가 폭력'에 대해 아는 분이었다. 그 멀리에서 혼자서도 연대하러 오는 분, 희망 뚜벅이의 힘이었다. 

 

한 시간 후인 12시 50분에 다시 출발했다. 희망 뚜벅이를 하는 동안 김진숙과 이지영은 점점 더 가까워져 보였다. 한 세대가 지나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노동자의 삶. 그들을 이어주는 연대. 이 걸음에 이날 뚜벅이들은 160명에서 200명, 200명에서 3~400명이 되었다.

 

CKB04131_ 임경빈엄마와 김용균엄마와 녹색당 나무.JPG

CKB04334__ 김진숙과 이지영.JPG

 

 

그리고 또 한 시간 후 영등포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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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B04061' 부감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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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역 도착

 

 

마무리 때, 이날 아침에 서울시 교육청에서 지혜복 교사 부당 해임 철회 시위 중 노동자와 시민 23명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틀 전 26일에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 희망 텐트를 칠 때 가볼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CKB04871' 영등포역 도착 단체.JPG

 

 

오후 네 시에 종로경찰서 앞에서 기자회견이 있다고 했다. 희망 뚜벅이 속도가 너무 빨라서 걸으면서는 인터뷰할 수가 없어서 옵티칼 조합원 두 명을 기다리던 나는 집행부와 함께 움직였다. 승합차 안에서 발가락 양말을 신은 김진숙의 발을 보았다. 그이의 험난한 뚜벅이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듯해 안도가 되었다.

 

종로경찰서 앞에서는 긴급 기자회견이었는데도 백여 명이 모였고 온라인으로도 2~300명이 모였다.

노동자와 시민이 연대하고 있는 항의 행동은 서울시 교육청이 자초한 것이었다. 2023년 5월 말, 서울의 한 공립중학교 지혜복 교사는 상담 중 알게 된 학생들의 성폭력 피해상을 학교장 및 관리자에게 알리고 문제 해결에 나섰다. 학생들도 용기 내어 학교폭력전담기구에 피해를 접수했다. 그러나 학교 관리자들은 피해 사실을 축소·은폐하려고 했고, 피해를 신고한 학생들의 신원이 유출되는 일이 발생했다. 피해 학생들은 심각한 2차 피해를 입었다.

 

지혜복 교사는 이런 상황을 해결하고자 교육청에 문제 제기했지만, 돌아온 것은 다른 학교로 근무지를 옮기라는 전보 조치였다.

지혜복 교사는 이에 2024년 1월부터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부당 전보 철회 요구 시위를 했다. 하지만 교육청은 같은 해 9월에 지혜복 교사를 해임했다. 학생 인권을 위해 공익 제보한 교사를 부당 전보하고, 교사가 이를 거부하자 부당 해임한 교육청. 정근식 교육감은 '진보교육감'을 자처하면서 공익을 다투는 사안에 탄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래서 분노한 노동자들과 시민이 연대 투쟁하는 것이다.

 

'경찰은 즉각 연행자를 석방하라.

교육청은 노동자 탄압을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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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경찰서 앞 서울시 교육청 규탄 기자회견

 

 

기자회견 후 마침내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두 조합원 인터뷰를 했다.

 

배현석 조합원은 2010년 11월 29일에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 입사했다.

사원으로 3년 정도 있다가 조장으로 10년쯤 일을 했다. 현장 관리자였다. 그에게 왜 지금까지 남아있는지 물었다.

 

"물론 여기 있는 조합원들이 다 열심히 일했겠지만 저는 나름대로 진짜 열심히 일했거든요. 조장이었는데도. 그래서 회사를 포기하는 게 너무 아까웠어요. 한국옵티칼하이테크가 중소기업치고는 임금이 좀 많은 편이었어요. (3년 전) 불이 났을 때 제 나이가 서른여덟 살이었으니까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애들도 어리고 지금 나가면 어디 가서 또 이런 일을 구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솔직히 위로금이라는 게 11개월 치였어요. 조금밖에 안 됐거든요.

만약에 이직도 잘 안 되면 비정규직으로 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게 너무 아닌 것 같아서 남았죠. 솔직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이 투쟁이 이렇게 길게 갈 줄도 몰랐고 이렇게 힘든 건 줄도 몰랐죠.

지금 남게 된 이유는 그 기간이 너무 아까운 거고, 그렇다고 또 지금 그만두고 포기하고 뭘 하려고 해도 또 그 전으로 돌아갈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드니까 쉽게 포기를 못 하는 거죠."

 

남은 일곱 명 중 지회장과 배현석 조합원만 남자다.

 

"애들이 (8, 5세) 어리니까 엄마가 일을 제대로 못 해요.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너무 안 좋은 거죠. 활동성 좋은 애들이 방학 기간인데도 어디 가지도 못해요. 저는 밖으로 투쟁하러 나와야 되는 상황이고. 그만둬야 되나 이런 생각도 많이 하죠. 그런데 앞에 그만뒀던 친구들 있잖아요. 잘 된 친구들이 거의 없어요. 다 비정규직이고 그런 식으로 일을 하니까 포기를 못하는 거죠. 지금 2년 넘게 해오고 있잖아요. 내 인생을, 어찌 보면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잖아요. 가족 인생을 내가 투쟁이라는 틀 안에 박아버린 거니까. 그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커요. 만약에 불이 안 났으면 내 가족이 그렇게는 안 살았을 거 아니에요."

 

그런 상황에서 희망 뚜벅이 2차가 시작되었고, 희망 뚜벅이 하면서는 심경의 변화가 조금 생겼는지 물었다.

 

"심경에 변화가 생기죠. 매일매일 다른 분들도 오시지만 매일 오시는 분들도 계시고 하니까 너무 힘이 나는 거죠. 물론 본인들의 투쟁을 갖고 계신 분들도 계시지만 없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런 분들도 연대해 주시니까. 우리 일인데 본인하고 전혀 관련이 없는 분들도 계시잖아요. 근데 그렇게 도와주시면 엄청 고맙죠. 그런 거에 너무 힘이 되는 거죠. 볼 때마다 힘이 나고 그렇습니다.

저희가 2년을 투쟁해 왔지만, 솔직히 대외활동을 저나 조합원들은 잘 안 하고 지회장이나 임원들만 하니까 연대자들 접할 기회가 별로 없거든요. 근데 뚜벅이를 거의 매일 참가하고 나니까 서서히 벽이 무너지는 거죠.

어찌 보면 이제 공감대가 형성되고 맨날 보니까 그전에는 그냥 인사만 하는 정도였다면 이제 막 대화하고 서로 안부를 묻고 그런 사이로 변해가는. 소위 말하는, 다른 분들이 발언할 때 보면 연대로 이어져 있다는 거를 저희는 그전에는 솔직히 잘 못 느꼈는데 지금 이렇게 희망 뚜벅이를 하면서 그런 걸 새삼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저도 매일 보니까 반갑고 정들고 좋아요."

 

"그러니까요. 지금 아쉬워요. 솔직히 내일이 마지막인 날인 게. 매일 봤으니까 섭섭할 거 같아요. 갑자기 못 보게 되는 거니까."

 

"이제 내려오고 고용 승계돼야죠. 빨리 내려오기를."

 

"맞아요. 그렇죠. 빨리빨리 내려와야죠."

 

정나영 조합원은 2008년 10월에 입사해서 외관 검사를 하다가 원단 검사 공정 파트에 있었다. 15년 차인 2022년에 불이 났다.

 

"10월 4일에 불이 났는데요. 10월 3일까지 야간 특근을 들어갔어요. 그다음 날 아침에 나와서 그다음 날 또 들어가야 하니까 자고 있었죠. 그러다 반대 조에 교대하는 동생이 전화가 왔더라고요. 저한테 인수인계할 전화를 했는데, 그 사이에 불이 났어요.

(오후) 5시 조금 넘어서 전화를 받았는데, 15분 사이에 한참 전화를 하는데 계속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고. 저번에도 그런 조그마한 화재가 있어서 금방 꺼질 줄 알았는데 이게 큰 불이었던 거죠.

솔직히 그날 공장에 가고 싶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있어서 휴대폰 소식만 들었어요. 저희 집에서 공장이 보이는 건 아닌데 불나는 연기가 엄청 크게 아파트 사이로 올라오더라고요. 그다음 날 아침에 공장에 가 봤어요."

 

"다음날 가보시니 심경이 어떠셨어요?"

 

"아침에 봤는데 앞에 유리창이 이렇게 번쩍번쩍 정말 괜찮은 거예요. 아, 다행히 그래도 많이 안 탔다 싶었는데 한 바퀴 돌고 도니까 뒤에는 너무 심한 것 같아요. 20대 후반에 들어와서 거의 10년 이상 결근 한 번 안 하고 다녔던 회사인데 솔직히 회사를 너무 믿었던 것 같아요. 기다려 달라고 했기 때문에."

 

"회사가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그전에는 지금 대표이사가 현장에도 들어오고 인사하고 안부 묻고 얘기하고 이런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불이 나니까 완전히 사측으로 변한 거죠. 최소한 그전에도 1, 2차 희망퇴직 쓰고 회사가 괜찮았기 때문에 저는 조금 기대를 하고 있었거든요."

 

"고용 승계가 될 줄 알았어요?"

 

"회사를 재건할 거 같았어요. 그때는 재건도 하고 안 되면 (합병이라도.) 저희 노조 만들기 전에 평택에서 그 한 60명 정도 저희랑 합병하려고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2015년에 있었는데, 저희랑 같이 검사도 하고 기숙사도 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저희가 2016년에 노조를 만들고 나서는 무산됐어요. 평택 공장은 전공정 공장이었고 저희는 후공정 담당이었어요. 후공정 공장을 우리 구미 공장으로 만들려고 했었는데 그럼 지금 평택에서 후공정까지 다 해요."

 

"희망퇴직 있었는데 안 하시고 지금까지 버티셨는데 그 이유는 뭘까요?"

 

"회사를 너무 믿었던 것 같아요. 믿었고, 저도 솔직히 불났을 때만 해도 나이가 마흔두셋 정도였으니. 여기서 또 나가면 또 어쨌든 새로운 직장을 다녀야 하고 적은 나이도 아니고. (회사가) 외국인 기업이다 보니까 솔직히 복지가 좀 좋았어요. 지금 저랑은 상관없지만 교육비도 나오고 대학 등록금도 나오고 하니까."

 

"두 명이 고공에 올라갔을 때는 심정이 어떠셨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 나요. 솔직히 올라가는 것도 몰랐었고요. 저희는 처음에는 계속 집에서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랬는데 갑자기 아침에 지회장님이 급하게 오라고 해서 눈도 오고 하는데 급하게 갔더니 벌써 올라가 있더라고요. 저는 고공농성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응 그래, 오늘은 너희들이 올라가니까 내일은 우리가 올라갈게' 이랬었어요. 그러니까 다들 아 그거는 안 내려오는 거라고."

 

정나영이 다시 울먹거렸다.

 

"그렇게 지금까지 이어오셨는데 희망 뚜벅이 가을에 하고 지금 또 2차 하잖아요. 이거 하면서 어떻게 조금 그 심경의 변화라든가 삶과 생활의 변화 같은 게 생겼을까요?"

 

"희망 뚜벅이 시작하면서 모르는 분이 엄청 많이 도와주세요. 물도 그렇고, 반찬도 보내주시고, 그런 분들이 엄청 엄청 많이 생겼고, 어제 보고 오늘 보고 이런 분들이 저희를 도와주시고, 그게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저라면 솔직히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제가 며칠간 신발을 잘못 신어서 뒤꿈치가 까져서 계속 차 타다가 걷다가 했는데 지금 하루 남았으니까 솔직히 조금 많이 아쉬워요."

 

"봄에 빨리 내려오게 해야죠. 저는 그런 희망으로 걸었어요."

 

"맞아요. 어제 꿀잠에서 김진숙 동지 영상을 봤거든요. 너무 많이 울어서…. 내려오실 때, 꽃다발 걸어 줄 때 상상으로 우리 애들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맞아요. 두 동지들 내려올 때도 꽃다발 걸고 그렇게 내려왔으면 좋겠어요."

 

어느새 사무장과 지회장도 우리 곁에 와 있었다. 이지영 사무장도 말했다.

 

"희뚜(희망 뚜벅이)하면서 되게 행복했어요. 많은 분들이랑 함께해서 좋았고, 말벌 동지들이랑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좋았어요."

 

최현환 지회장은 연대의 확장성을 말했다.

 

"옵티칼 투쟁이 희망 뚜벅이에서 이렇게 동지를 확장해서 여기까지 왔듯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동지들이 구미 공장 고공을 찾아오고, 그다음에 이게 전 국민 사회적으로 더 많은 파장을 일으켜서 빨리 문제 해결되는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는 바람입니다. 뚜벅이에서 또 다른 투쟁으로 이어지길, 이제 마무리되는 과정인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연대로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

 

인터뷰를 마치고 종로 교차로에 서 있는데 그간 희망 뚜벅이와 조금 전 기자회견에서 본 강원도 태백 교사가 눈에 띄었다. 전날 경기도에서 힘차게 노래 부르며 희망 뚜벅이하고 강원도까지 내려갔다가 아침에 연행 소식 듣고 다시 기차 타고 올라온 것이었다.

그이는 서울시 교육청으로 가는 택시를 잡는다고 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이가 걸어가겠다고 했다. 서울 토박이인 내가 길 안내를 나섰다.

2km를 걸어 강북삼성병원 뒤 서울특별시 교육청으로 갔다. 근조 화환과 멜로디언 동지와 뚜벅이 때 못 본 하은 등 말벌 동지들이 보였다. 그날 변혁적 여성 네트워크 빵과 장미 활동가이자 강원도 태백 남정아 교사는 천막에서 밤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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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명이 연행된 서울시 교육청 앞

 

 

지칠 대로 지친 그 밤, 8일간 찍은 3,500여 장의 사진 속에서 몇 장을 추려 공룡 설해 감독에게 보냈다. 다음날 마지막 희망 뚜벅이 광화문 집회에서 상영할 기록영상에 보탤 용도였다. 함께하는 의미에서의 연대였다.

 

 

 

23일차 마지막 날,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용승계로 가는 희망뚜벅이

2025년 3월 1일 토요일 14km

 

아침에 일어나니 뚜벅이 셋째 날부터 시커멓게 죽어가던 왼쪽 두 번째 발톱이 퉁퉁 불어 들떠 있었다. 8일 걸은 내 발이 이런데 희망 뚜벅이 완주한 다른 분들의 발은 어느 지경일까?

 

오전 10시. 영등포역 앞에 모인 수백 명이 준비운동을 하고 평등약속을 낭독했다.

마지막 평등약속 담당자는 김진숙·박문진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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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평등약속 담당자 박문진과 김진숙

 

 

가래떡 간식을 나누며 출발 채비하는 수백 명의 인파 속에서 초록색 코트 입고 붉은색 머리칼을 한 나의 전령 비둘기(전서구) 숨이차를 발견했다. SNS를 하지 않는 나는 매번 그이의 알림으로 큰 집회 소식을 접한다. 이번 희망 뚜벅이도 박문진 동지보다 이틀 먼저 온 숨이차의 연락으로 신청할 수 있었다. 자, 그렇게 시작한 희망 뚜벅이 마지막 날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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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그곳에 보고 싶던 사람이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그이는 몽골 이주 아동에서 청년이 된 故 강태완의 친구였다. 하지만 강태완의 친구였지 내 친구였던 적은 없는데, 나는 그이를 친구처럼 불렀다. 전북도청 앞에서 태완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그를 처음 보았고, 산본 장례식장에서 두 번 본 게 전부였지만 '친구의 얼굴'이란 글을 쓰면서 그이를 많이 생각했었다. 광장은 그렇게 그리운 사람을 만나게 해 주는 장소였다. 그리고 잠시 후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국옵티칼 고용승계 국회가 나서라' 기자회견에서 차해도가 발언을 했다.

 

"언제쯤이면 도착할까? 언제면 옥상 동지들 내려올까 생각하면서 한 발 한 발 올라왔던 게 바로 오늘이 되었습니다. (중략)

국민도 보호하지 못하는 국회는 파산하는 게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동의하십니까? (투쟁)

우리 그날까지 힘차게 투쟁하며 또다시 세종 동지들을 만나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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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해도 한진중공업 퇴사자(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

 

 

기자회견 후 마포대교 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한참 사진을 찍다가 차해도 동지 옆으로 갔는데 그 옆에 걷는 누군가가 낯이 익었다. 친구였다. 춥고 외로웠던 정읍에도 해남에도 찾아와주었던 그 사람.

 

2022년 4월 진도에서 앞으로 나를 찾는 사람만 인연으로 여기리라고 휴대전화기의 연락처를 전원 삭제했을 때, 마음에 걸린 한 사람이 있었다. 전날 연락하기로 했던 사람. 한 명 한 명 새롭게 다시 휴대전화기에 이름들이 저장되던 3년 동안 그이의 전화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나게 되는 법. 광장에서, 길 위에서 나는 기다리던 사람을 마침내 만나고 말았다. 희망 뚜벅이가 다시 이어준 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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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B05214' 마포대교 위 희망 뚜벅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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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대교를 지났다. 방송 차량의 민중가요 데시벨이 지나치게 높았다. 시민들에게 소음공해로 들릴까 염려되었다. 그때 김진숙이 차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운전자에게 음악을 바꿔달라고 했다. 말벌 동지들이 좋아하는 곡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면 자연스럽게 상대의 취향을 염두에 두게 된다. 구미에서 서울까지 3주 동안 350km를 걸어오면서 김진숙은 선두를 옵티칼 조합원과 다른 이들에게 내어주고 말벌 동지들과 대화하면서 걸었다. 그러면서 그들의 생각과 생활을 알게 되고,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음악은 다시 지난겨울 국회의사당 앞에서 탄핵을 외치던 K-Pop 개사곡으로 바뀌었다. 김진숙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다. 그런 게 동시대적 감각이다. 그건 열린 가슴과 평등 의식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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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시. 서울역 근처에서 잠시 쉬었다. 교통경찰이 통제하기에 토요일 낮 중구 교통은 매우 혼잡했다. 게다가 희망 뚜벅이의 속도는 무섭게 빨라 경찰들을 몇 번이나 당황시켰다. 미처 신호를 잡기 전에 뚜벅이들이 도착하기 때문이었다.

좌회전하자마자 세종호텔 앞으로 달려갔다. 새만금 생생페스티발 때 왔던 캄캄밴드가 연주하고 있었다. 그중 서울시 교육청 희망 텐트 시작하던 날 희망 뚜벅이를 했던 로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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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호텔 고공 농성장 앞에 도착한 김진숙과 박문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김진숙은 고공을 응시하고, 박문진은 눈물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호텔 쪽으로 몸을 돌려 고공을 찾았다. 옥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선을 낮춰 목격한 그곳은 고공이 아니었다. 허공이었다. 농성장은 차선이 확장되는 교차로의 지하차도 위 구조물이었다. 그곳은 사람이 앉을 수도 누울 수도 먹을 수도 잘 수도 없는 공간이었다. 지하로 빨려들 듯 쌩쌩 지나가는 고속의 차량과 남산 쪽으로 빠져나가는 차량은 극히 위협적이었다. 그곳은 소음과 진동과 매연으로 17일이 아니라 17분도 있을 수 없는 극악한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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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엄마가 농성장 앞으로 와서 손을 흔들며 고진수 동지와 인사를 나눴다. 현수막을 만들어 온 젊은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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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시 30분. 정리해고 철회 세종호텔 고공농성 17일 차 연대 집회가 시작되었다.

 

박문진 동지가 발언했다.

 

"저 험한 고공 농성을 결행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눈물의 시간을 보냈을까요? 콧물과 눈물이 뒤섞여 통곡 소리 나는 유서를 얼마나 많이 썼다 지우며 수많은 밤을 지새웠을까요?

집을 나서며 닫혀있는 현관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내가 다시 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까 얼마나 고심했을까요?

고공으로 향하는 고진수 동지는 오늘의 행군을 시작하는 순례자의 마음이고,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것처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노동자의 기개와 자존심으로 노동자다운 매화향을 피우기 위한 고공 투쟁은 칼바람과 비바람 날씨에 따라 뜻밖에 이르는 상황에 놓일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저도 75미터 고공 투쟁 때마다 칼바람이 불 때마다 온몸이 날아갈까 봐 기둥에 밧줄을 묶어야 했고 유서를 매번 다시 쓰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러나 동지들, 칼바람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것은 이 투쟁이 잊히는 외로움과 고립감입니다.

 

박정혜, 소현숙이 이겨서 땅을 딛고 옵티칼 고용 승계를 위한 희망 뚜벅이가 구미에서 서울 이곳까지 23일 동안, 처음 길을 나설 때 막막하고 아득하게 멀어져만 보였던 길이 점차로 희망 뚜벅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커지면서 길은 단단하게 이어져 갔습니다.

길 위의 걸음은 정직했고, 유쾌했고, 위로와 다짐이었고, 기도였고, 축제였고, 길에서 먹는 밥은 인삼이었습니다.

 

어제 서울교육청에서 주장하던 지혜복 동지와 말벌 동지들 23명이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정근식 교육감 당신은 벌집을 건드렸다.'

오늘 헌법재판소에서 서울 교육청까지 행진하는 말벌들의 제목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포스터입니다.

 

그동안 자본가들과 거기에 기생하는 정치가들과 정부는 수시로 우리의 벌집을 건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면피용 싸움으로 비정규직이 정착되고, 정리해고가 합법화되고, 그래서 노동자들과 청년들의 삶은 위태롭고 양극화는 갈수록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광장에서, 길 위에서 너, 나, 우리는 노동자와 성 소수자, 청년이 되었고, 농민과 장애인이 되어 세계와 세계가 서로 다시 만났습니다.

이전에는 노동자와 학생들의 노학 연대였지만 이젠 노동자 말벌들의 노말 연대로 만난 우리들의 세계는 고진수, 박정혜, 소현숙, 지혜복, 거통고를 외롭고 고립되게 만들지 않을 것이며, 당당하게 승리해서 살아서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면피용 싸움이 아닌 내 삶을, 사회를 바꾸는 투쟁은 모든 것을 걸어야 가능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3.1절입니다. 나라 독립을 위해서 전 재산과 목숨을 바쳐 불굴의 정신과 실천을 하는 독립투사들의 정신을 살려 우리 모두 불법의 선을 과감하게 넘어갑시다. 동지들.

 

강철 같은 노말 연대 고용 승계 쟁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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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

 

 

이지영 사무장이 먼저 세종호텔 고공농성장을 향해 섰다. 그리곤 울면서 외쳤다. 

 

"고진수 동지, 저희 왔어요. 늦게 오게 돼서 너무 죄송합니다."

 

그때부터 내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기운이 쫙 빠졌다. 잘 몰랐다는 죄책감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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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사무장

 

 

인권네트워크 바람 명숙의 방송 차량 위 사회로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종로에서 배 '연대투쟁호' 한 척이 등장해 차량 뒤와 희망 뚜벅이 앞에서 굴러갔다.

어느덧 파란 한복을 입은 남태령 동지가 발언하고 시민들에게 연신 하트를 그려 보이며 "사랑합니다"를 연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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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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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투쟁호

 

 

비가 내렸다. 당황하지 않았다. 장영식 사진작가는 땀이 눈으로 들어가는지 연신 손으로 눈을 닦아내다 급기야 휘청거리셨다. 23일 중 21일을 그 무거운 카메라 몇 대씩 바꿔 들며 단체 사진과 출발할 때, 신호등 멈춤마다, 갑자기 육교나 건너편 차선에서, 행진하는 희망 뚜벅이 사이에 털썩 앉기도 하며 촬영해서 실시간 업데이트하신 괴력의 사진가. 내가 맥을 놓고 있을 때도 그분은 쉬지 않으셨다.

 

어느새 나는 촬영을 멈추고 행렬 속에서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그런 내 옆에 차해도 동지가 걷고 있었다. 수백 명의 인파 속에서 착착 발맞추어.

 

9일 동안 희망 뚜벅이를 하면서 내일 아침에도 눈뜨면 누군가랑 걸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김진숙·박문진처럼 서로 대화할 친구도 없고, 말벌 동지들처럼 재미있게 투쟁(잼투)하지도 않고, 혼자 무거운 카메라 들고 뛰고 걷기를 반복하면서도 그들과 있는 게 좋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그게 온몸 관절마다 파스로 도배하고, 터질 듯한 종아리와 빠질 듯한 발톱으로 최선 다해 희망 뚜벅이를 하려고 새벽부터 일어나 차 타고 기차 타고 지하철 타고 올 수 있던 요인이었다. 연대는 그것이었다. 함께!

 

우리가 걸을 때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박정혜와 소현숙도 옥상에서 함께 걸었다. 2만 보, 3만 보. 희망 뚜벅이가 끝나도 남은 걸음 수를 채웠다. 선두의 배현석은 나날이 늠름해 보였고, 최현환은 발언을 거듭하면서 패기가 차올랐고, 이지영은 쑥쑥 당당해졌고, 정나영과 이희은도 밝은 생기가 차올랐다.

 

물론 혼자도 걸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걸어 출발한 희망 뚜벅이의 인원수가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늘어나 마침내 서울 종로 도로 전체를 가득 채웠을 때, 그 정점의 순간에 세상은 고요했다. 우리는 침묵했고 한 가지 생각으로 그 순간 함께 걷고 있었다. 뚜벅뚜벅. 희망 뚜벅이, 희뚜. 완뚝이로.

 

15시 광화문. 구미에서 서울까지 희망 뚜벅이 23일 차 마무리 집회 사회자는 그동안 매일 아침과 밤에 안내 문자를 보내주고, 역에서 차량을 연결해 주고, 행진할 때도 쉬지 않고 문자를 주고받고, 영상을 찍어 올리는 기록 담당 하은 동지였다. 그이의 목은 팍 쉬어 있었다.

 

공룡 설해 감독이 만든 영상물이 방영되었다. 당일 사진까지 있는 걸로 보아 설해 감독은 밤을 새우고도 그날 내내 전송된 사진들을 뚜벅이보다 더 바쁘게 편집했을 것이다. 오직 희망 뚜벅이들을 위해. 그 영상의 주인공은 2025년 2월 7일부터 3월 1일 구미에서 서울까지 걸은 모든 희망 뚜벅이들이었다.

그 모든 뚜벅이들의 선두 김진숙 동지가 단에 올라 90도로 인사했다. 그리고 발언문을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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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운 이름 박정혜, 소현숙을 안고 우리는 겨울에서 봄으로 왔습니다.

제게는 청춘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 열세 시간을 휴일도 없이 일하거나, 두 다리가 다 부러지거나, 옆에서 일하던 동료가 죽거나, 그런 현실을 바꾸려다 해고되거나, 대공분실에 끌려가 묶인 채 두들겨 맞거나, 거꾸로 매달려 내 몸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을 세거나, 구속되거나 수배되거나 또 구속돼 입은 채로 싸면서도 그래도 살겠다고 혓바닥으로 죽을 핥아먹었던 징벌방에서의 삶들이…… 그건 청춘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한 시절도 빛나 보지 못했던 나의 청춘.

 

내가 여기 끌려 온 걸 누구라도 알았으면…… 내가 어디서 누구의 손에 죽는지 단 한 사람이라도 알았으면 했던 간절함. 외로워 본 사람은 외로움이 얼마나 큰 절망인지 압니다. 제게 외로움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박정혜, 소현숙을 더 이상 외롭게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타협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삶을 얼마에 팔겠습니까? 얼마면 다 팔고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정치가 이 울분을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혁명을 꿈꾸었습니다. 성 소수자가 행복한, 페미니스트가 자랑스러운, 장애인이 자유로운, 농촌이 소멸되지 않는, 그리고 해고노동자가 없는, 더 이상 고공으로 내몰리지 않는, 그런 세상을 광화문에서, 남태령에서, 한강진에서 겨울 내내 전국 곳곳에서 이뤄지는 투쟁들을 보면서 그 투쟁의 주역이 저의 다음 세대 여성들이라는 게 저는 기뻤습니다.

 

오래 꿈꿔왔던 저의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 동지들……. 그래서 이제야 제게도 청춘이 있었음을…… 그런 삶도 청춘이었음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새벽에 차를 몇 번씩 갈아타고 희망 뚜벅이하고 울산으로 돌아가 저녁 알바 갔다가 새벽에 이수기업 투쟁에 결합하는 동지와 부산에서 와서 함께 걸었던, 그리고 세종호텔에 갔다가 새 직장을 찾아 면접을 보러 간다던 말벌 동지. 함께 걸었던 말벌 동지들 대부분이 비정규직이거나, 일자리를 잃은 청춘들이었고, 그럼에도 강풍 속에서도 깃발을 한 번도 내리지 않은 수많은 동지들을 보며 날마다 웃고 날마다 울었습니다.

 

불탄 공장 폐허 위 박정혜, 소현숙 동지가 희망을 가지는 게 기뻤고, 옵티칼 동지들이 씩씩해지는 게 벅찼습니다. 오늘 희망 뚜벅이는 마치지만 우린 투쟁을 이어갈 것입니다. 소현숙, 박정혜가 아직 고공에 있고…… 세종호텔 고진수도 고공에 있고, 지혜복과 말벌 동지들은 유치장에 있습니다.

 

승리는 어느 날 벼락처럼 오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한 발 한 발 걷다 보면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여 승리가 됨을 저는 믿습니다. 동지 여러분, 우리가 정직하게 한 발 한 발 걸어온 이 걸음을 희망 버스로 이어갑시다. 3월 말, 늦어도 4월 초, 옵티칼로 가는 희망 버스를 제안합니다. 전국의 동지들이 박정혜, 소현숙에게 희망이 됩시다.

 

우리 말벌 동지들 고맙습니다. 많이 보고 싶을 겁니다. 희망 버스에서 다시 만납시다. 박문진 동지, 차해도 동지, 장영식 동지, 그리고 하은 동지를 비롯한 우리 희망 뚜벅이 실무팀 동지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꼭 오셔야 했던… 고진수, 지혜복, 서재유 그리고 스물두 명의… 말벌 동지들을 유치장에 두고 가는 발걸음이 무겁지만, 우린 투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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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울면서 울면서도 끝까지 발언문을 다 읽은 그이가 다시 90도 인사를 했다. 박정혜·소현숙을 더는 외롭게 둘 수 없었다는 대목에서부터 한 손으로는 우산을 받쳐주면서 한 손으론 눈물을 닦던 하은 동지는 아예 철철 울다가 곧 그쳤다.

 

최현환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장이 발언했다.

 

"(상략) 작년 1월 8일, 박정혜 소현숙 동지가 모두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옵티칼 첫 깃발을 올렸습니다.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불탄 공장 옥상에서 419일째 고공 농성 중입니다. 이 두 동지를 하루빨리 이겨서 땅을 딛도록 우리가 만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투쟁)

(중략)

힘내라 박정혜

힘내라 소현숙

힘내라 고진수

힘내라 지혜복

힘내라 거통고

힘내라 말벌 동지들

끝까지 투쟁해서 현장으로 돌아가자.

(중략)

동지들 함께 싸워 함께 세상을 바꿉시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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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옵티칼하이테크 조합원

 

 

거통고 조선하청지회장 연대 발언 이후 박정혜·소현숙 동지 영상 발언과 세종호텔 고진수 지부장 영상 발언 그리고 금속노조 위원장 발언이 있었다.

 

마지막 순서로'옵티칼 희망 뚜벅이 약속문'을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배현석 조합원, 4.16 세월호 참사 단원고 2학년 4반 임경빈 어머니 전인숙 님, 삼선 슬리퍼 연대 시민 김선빈 동지, 희망 뚜벅이 장영식 사진작가가 대표로 읽어 주셨다.

 

"우리 희망 뚜벅이는 2월 7일 구미 공장 앞에서 고공의 박정혜 소현숙 동지가 땅으로 내려올 길을 만들기 위하여 걸음을 시작했다.

첫날은 70여 명이 걸었으나, 그 걸음은 점차 늘어 많은 날은 600여 명의 사람들이 이곳 광장으로 함께 걸어왔다.

고공의 두 사람을 위하여 먼저 하늘로 올랐던 두 여성 노동자 김진숙과 박문진이 걸었다.

고공 농성자의 동료인 최현환, 이지영, 정나영, 배현석, 이희은 그리고 수많은 민주노총 조합원이 말벌 아저씨처럼, 노동자들을 지키러 뛰어온 시민 연대자들이 함께 그 길을 걸었다.

350km 23일의 여정은 오늘로 마무리되지만, 희망을 만드는 걸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여정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를 위해 함께 약속한다.

 

하나, 우리는 박정혜·소현숙이 이겨서 땅을 딛고 싶다는 염원을 잊지 않고 국회의 역할을 촉구할 것이다. 3월 7일 국회의장과의 면담에서 고용 승계를 약속받을 수 있는 니토덴코와의 교섭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주시할 것이다.

 

하나,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조합원들이 해고자가 아닌 노동자가 되는 길에 함께할 것이다.

우리는 희망 뚜벅이 속에서 조원들에게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끝까지 싸워 니토덴코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들었다. 싸우는 노동자들이 여는 길 그 길에 희망 뚜벅이는 언제까지고 함께 걸을 것이다. 먼 일본에서의 연대 투쟁과 옵티칼 평택 공장에서의 농성과 선전전, 서울에서의 공동망 투쟁에 함께하며 투쟁의 힘을 계속 더해갈 것이다.

 

하나, 우리는 노동자가 쓰다 버려지고 땅에 살 수 없어 고공에 오르는 세상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희망 뚜벅이는 노동조합 조합원으로서 함께 싸워 세상을 바꿔온 동지들뿐만 아니라 연대 정신으로 눈비 함께 맞으며 긴 시간 함께해 온 말벌 동지들이 주축이 되었다.

희망 뚜벅이 속에 우리는 앞으로의 세상을 바꿀 동지들을 얻었다.

먹튀 자본에 대한 책임을 촉구하는 먹튀 방지법 제정, 옵티칼과 세종호텔 노동자들을 거리로 쫓아낸 정리해고법의 철폐, 모든 노동자들의 노동권 보장을 위한 노조법 2조·3조의 개정을 통한 더 큰 국회의 역할을 촉구하기 위하여 목소리를 낼 것이다.

 

하나, 니토덴코는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놀랐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흐트러지기보다 강인해지는 노동자와 연대하는 사람들을. 강인해진 우리 희망 뚜벅이는 이 길을 멈추지 않고 걸어 구미 공장의 노동자들이 평택 공장에 올 때까지 연대할 것이다. 고공의 노동자들이 또 하루를 또 한 달을 더 고공에서 보내는 것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오는 봄까지도 여전히 고공에 노동자들이 여전히 고립되어 있다면 우리는 더 큰 연대를 조직하여 희망버스로 함께할 것이다. 그때는 23일을 나눠 함께했던 동지들이 한 번에 모여 강인한 연대의 희망으로 힘으로 희망으로 함께할 것이다.

 

2025년 3월 1일

 

가자! 국회로 옵티칼 고용 승계로 가는 희망뚜벅이 참가자 일동"

 

CKB05567' 옵티칼 희망 뚜벅이 약속문 낭독.JPG

 

 

어느새 비가 그쳤다.

서로가 서로를 안았다.

한참을 기다려 나도 박문진을 안았다.

 

"걷다가 어느 길에서 또 만나요."

 

그이는 곧 만나자고 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 날 내가 "다음엔 미리 알려주세요. 그래야 다른 일정을 잡지 않을 테니까요."라고 한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 길디긴 길을 걷는 내내 활짝 활짝 웃는 커다란 웃음이 자비 그 자체였던 보인 박문진. 우리는 곧 만날 겁니다.

 

김진숙을 그이 오른쪽으로 살포시 안았다. 말벌 동지들을 만나고 왼쪽 가슴으로 안아도 아프지 않게 되었다고 했지만 그래도 조심했다.

 

"또 만나요."

 

나는 미소 담은 눈빛으로 답했다. 순간순간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단문과 뜨겁게 달궈진 강철같은 감동으로 내 가슴에 깊숙이 자리한 김진숙. 내일 만나지 못해도 좋다. 우리는 또 만날 것이다. 그건 아직 연대해야 할 이들이, 변혁해야 할 세상이 남아있다는 의미이다.

그중 가장 먼저 쟁취해야 할 것은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옵티칼 복직! 옵티칼 복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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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티칼 고용승계로 가는 '희망뚜벅이' 23일간의 기록 (BGM_길 그 끝에 서서 / 지민주)

https://youtu.be/p8pLezt02UE?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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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용 승계로 향하는 - 가자, 국회로! 희망 뚜벅이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용 승계로 향하는 가자, 국회로! 희망 뚜벅이 1일 차 : 2025년 2월 7일 금요일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구미역 12km "언제든 걸으시면 함께 할게요." 지난해 12월 1일, 희망 뚜벅이 마지막 날,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에...
    Date2025.03.14 Views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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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5년 새해를 맞으며

    2025년 새해를 맞으며 <전북도청 앞 새만금생태계복원기원 월요미사와 군산 팽팽문화제> 2025년 1월 1일 수요일 새해 첫 태양을 맞이하고, 군산시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로 향했다. 조문으로 시작하는 2025년, 부디 안전하고 평안한 해가 ...
    Date2025.02.08 Views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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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4년, 전라북도에서 보낸 12월

    2024년, 전라북도에서 보낸 12월 전북도청 앞 월요 미사와 군산 팽팽문화제와 수라갯벌 2024년 12월 2일 전북도청 제19차 새만금 생태계 복원 월요 미사 12월 첫 월요일 오후 세 시. 부안군 해창 갯벌이 아니라 전주시 전북도청 앞으로 갔다. '새만금만이 ...
    Date2025.01.13 Views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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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투쟁 승리 - 김진숙·박문진 희망 뚜벅이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투쟁 승리 김진숙·박문진 희망 뚜벅이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났다. 비가 내렸다. 여섯 시 반에 새만금 해창 갯벌 진흙이 묻은 낡은 등산화를 신었다. 대전역에서 08:06 출발 무궁화호를 탔다. 토요일에 온 문자 때문이었다. 발신인...
    Date2024.12.10 Views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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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새만금 상시 해수유통과 생태계 복원...

    새만금 상시 해수유통과 생태계 복원 기원 월요 미사 새만금 상시 해수유통과 생태계 복원 기원 미사에 7월 22일 1차와 29일 2차 후 탈핵 순례 사진전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했다. 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원회 10주년 기념행사 이후 9월 말이 되어서야 다시...
    Date2024.12.08 Views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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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갯벌도 살리고 사람도 살리는 - 살살 페스티발

    갯벌도 살리고 사람도 살리는 살살 페스티발 2024년 10월 26일 토요일 14:00 팽팽문화제 가을날이 청명하고 창창했다. 600년 생애 최고였을 지난여름의 혹서를 견딘 팽나무는 더욱 장대하고 우람했다. 군산시 옥서면 선연리 산205, 하제마을을 지켜온 팽나무의...
    Date2024.11.07 Views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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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공항 말고 해수 유통

    공항 말고 해수 유통 -제주 제2공항·신공항 반대와 새만금 생태계 복원 기원 제주 제2공항 기본계획 고시 중단 및 도민결정권 촉구 결의대회 2024년 7월 10일 비 오는 수요일 오전 11시 세종시 국토부 북문 앞으로 갔다. 우비를 입고 카메라를 메고 우...
    Date2024.10.26 Views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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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고성부터 나아리까지 자전거 순례

    고성부터 나아리까지 자전거 순례 월성원전인접지역주민이주대책위원회 10주년 2024년 8월 25일 일요일 고성 통일전망대~화진포 9km 월성원전인접지역주민이주대책위원회 10주년인 2024년 8월 25일. 고성 통일전망대 인증센터에는 배롱나무 분홍 꽃이 활짝 피...
    Date2024.10.06 Views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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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죽음과 차별을 멈추러 달려간 희망버스

    죽음과 차별을 멈추러 달려간 아리셀 희망버스 2024년 8월 5일 월요일 지인으로부터 문자 한 통이 왔다. '오는 8월 17일 토요일에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서울출발) 8.17 죽음과 차별을 멈추는 아리셀 희망버스에 탑승해 주세요. '같이 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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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금강아 흘러라 1 - 금강 자전거 순례길에서 만난 세종보

    금강아 흘러라 1 -금강 자전거 순례길에서 만난 세종보 작년 5월부터 일 년에 걸쳐 군산 하굿둑에서부터 대전 대청댐까지 금강 자전거 순례를 완주했다. 그중 2024년 6월 현재 6년 동안 열어두었던 수문을 다시 닫겠다는 세종보에 관한 이야기다. 2024년 5월 9...
    Date2024.06.10 Views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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