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권지숙 조합원
여성이 자신의 일을 하면서 가족을 챙기고 좋아하는 여가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선 아직도 녹록지 않다. 그만큼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야말로 벨런스를 잘 맞춰 나가야 한다. 오랫동안 향린교회에서 안면은 익숙하였지만 말을 섞은 적이 없어 서로 아는 바가 전혀 없던 터에 인터뷰를 계기로 대화를 나누게 되어 반가웠다. 직장 일로 시간을 내기 어려운 가운데 명절을 앞두고서야 만남을 갖게 됐다.
Q : 설 명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내나요.
내일(1월 27일) 시어머니가 계시는 울산에 내려가려고 해요. 남편 고향이 울산이지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서울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내일 일기가 전국적으로 폭설이 예보되어서 날씨가 안 좋을 것 같아 좀 걱정이 되긴 합니다.
Q : '길목'은 전부터 알고 있었죠? 근데 근래에 와서야 가입을 하였네요.
길목이 길목선교센터로 처음 출범할 때 저도 조합원으로 가입했었습니다. 그러다 도중에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바뀌면서 다시 조합원으로 가입했어야 했는데 그냥 있다 보니 지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길목에서 하는 행사도 가끔 참여하기도 하고 인문학 특강도 듣곤 했습니다. 또 아주 가끔 주변에 마음이 힘들어하시는 분들을 보게 되면 우리 길목 협동조합에 '심심' 치유프로그램이 있는데 상담을 받아 보는 게 좋겠다고 연결을 해주기도 했었습니다. 고상균 목사님께서 주최하시는 맥주 인문학 프로그램도 좋아하는데, 목사님께서 길목 가입활동을 권하셨습니다. 현재의 길목은 변화를 거쳐 처음엔 교회에서 출발하였지만 이제는 더 영역을 넓혀 말 그대로 사회적 활동을 하는 협동조합인 줄 알고 있습니다.
Q : '길목'에는 어떤 기대를 하고 있나요.
사회적 협동조합으로서 길목이 시간이 쌓이면서 정말 잘 자리 잡아 나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입니다. 좋은 인문학 강좌를 더 풍성하게 마련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월에 예정되어 있는 '의료 민영화'에 대한 강연을 들을 생각에 설렙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저도 힘이 된다면 '도시락 싸 들고'와 같은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을 해보려 합니다.
Q : 직장에 나가는 줄 압니다.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대학교 행정부서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리자면, 교무처 학사지원팀에 있어요. 학사지원팀의 일은 학생들의 휴학, 복학, 자퇴, 재 증명발급 등의 학적업무, 교과과정 운영과 수업, 성적 등 학사제도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입니다. 학생들의 학습활동을 지원하고, 교육 수요자에 대한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일이지요. 학생과 학부모의 문의가 많은 부서입니다.
Q : 첫 직장인가요.
아니요. 지금은 '유안타'증권으로 이름이 바뀐 '동양'증권에서 3년 정도 일했습니다. 학부에서 경영학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경영학과지만 회계 커리큘럼이 많은 수업을 들었어요. 그래서 선배나 동기들이 은행이나 증권 쪽으로 많이들 가는 추세였고 이미 선배들도 보통 은행 아니면 금융권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런 수순을 밟아 가게 되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전의 증권회사는 잘 나갔지만 IMF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즈음 주식거래는 종이에 기록하여 거래하던 시절이었는데 그 이후 컴퓨터 작업으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산화가 되었던 거죠. 저는 97년 말부터 2000년까지 증권회사에 본사에서 HTS 개발업무에 참여했지요. 정말 일이 많았었습니다. 급여는 좋았지만 너무너무 일이 많아 지쳐 있었습니다. 우연히 제 친구 중에서 학교 교직원을 하는 친구를 봤는데 방학도 있고 학생들이랑 생활하는 것이 그때 당시에는 조금 '워라밸'을 즐기는 사람처럼 느껴졌었습니다. 방학이라고 해서 행정 파트는 쉬지는 않습니다만 어쨌든 그때 마침 공채가 있어 지원을 했습니다. 제가 증권회사를 다닌, 흔히 얘기하는 대기업에 있었던 게 플러스가 된 것 같습니다. 이미 검증을 거쳤다는 것이지요.
Q : 일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하는 일이 제게 적성에 맞기도 하고요, 뭐랄까, 대학교 행정직이 어찌 보면 반은 좀 공무원 같은 느낌이긴 해요. 아무리 사립대라고 해도 국가의 지원도 많고 제재도 많습니다. 교육부랑 같이 상호 협조가 돼야 되는 부분도 많고요. 저는 어떤 집단에 속해져 있을 때 좀 안정감을 느낍니다. 제가 매우 창의적이거나 앞장서하는 일은 못하지만 살짝 이렇게 뒷받침해 주는 면에서 저의 성향이랑 학교가 잘 맞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말했던 것처럼 학생과 교수들을 원활하게 도와줘야 되는 것에서 보람도 가집니다. 봉사까지는 아닌데 교육 서비스라도 할 수 있는 학사행정은 누군가를 서포트하는 부서이기에 저의 성향과 잘 맞습니다.
Q : 오랜동안 일해 오면서 대학의 변화를 현장에서 체감하기도 했겠습니다.
제가 90학번인데요, 90년대에 제가 알기로는 대학진학률이 30% 정도였습니다. 지금 2020년대에 와서는 거의 80%가 대학 교육, 즉 고등 교육을 받는다고 합니다. 양적으로는 많이 늘었지만 단순하게 학벌이 높다고 해서 교육의 질이 좋은 건 아니지요. 교육의 질적 저하가 많이 되었다 생각해요. 또, 교육의 양적 성장은 됐지만 언젠가부터 학력 인구 감소로 사립대학의 경우에는 재단이 굉장히 든든하지 않은 이상 살아남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국공립뿐만 아니라 사립대학에도 많은 국가 지원이 있기는 합니다. 제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도 서울에 있고 이공계가 강하다 보니 아직까지도 잘 살아남은 학교이기도 한데, 국가의 개입이 굉장히 많은 편입니다. 의대 정원을 늘려라 하는 것처럼 '반도체 학과를 만들어라, 안 만들면 국가 지원이 없다', 이런 식입니다. 제가 한 번도 프랑스 교육 장소에 가보진 않았지만 그럴 거면 정말로 파리 1대학 2대학, 3대학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공익적인 목적도 있고 한다면 서울대, 연대, 고대, 나눌 게 아니라 그렇게 나누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통폐합을 하는 방식 말입니다.
Q : 일 외에 여가활동은 어떻게 하나요.
시간이 날 때는 향린의 청년여신도 친구들과 어울립니다. '노는 언니'라고 하여 같이 영화도 보고, 미술관 가고, 여행도 가고, 차를 마시며 이야길 하는 걸 좋아합니다.
일과 가정을 같이 병행하여 일하다 보니 육아가 가장 문제였습니다. 일하는 모든 여성들의 문제이지요. 친정엄마와 언니들의 도움 등 가족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쉽진 않았을 겁니다. 이제 아이들이 다 성장하여 대학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수험생 엄마역할이 끝났어요. 2025년에 둘째가 대학교 2학년 올라갑니다. 그래서 이제까진 크게 여가 생활이라고 못 했습니다.
Q : 종교 생활은 언제부터 하였나요.
모태 신앙은 아니지만 친정 부모님이 믿음이 깊으셨어요. 중고등학교 때 같이 따라다녔습니다. 저희 큰언니 내외가 향린 교회를 90년대 초에 잠깐 다녔었습니다. 그러다 친정 부모님 근처에 살다 보니 언니네는 친정 부모님이 다니시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대학생 때, 91년 강경대 열사 사건이 터지면서 시위현장에 나갔는데 그때 향린교회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남편도 열심히 시위현장에 나갔던 터라 향린을 알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결혼하고 2001년도 직장을 옮기면서 향린에 나왔습니다. 그때 아이들도 낳기 시작해서 저희 아이들은 향린에서 다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사실 향린교회는 처음부터 찾아오는 교회는 아니잖아요. 이런저런 이유로 끝에 찾아오게 되는 교회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사회 선교 활동이라든지 제가 추구하는 부분과 맞아서 향린에 왔기 때문에 이제까지 감사하며 다니고 있습니다. 향린은 저에게 정말로 친정과 같은 곳입니다. 남편은 종교가 없는데 향린교회라면 오케이다 이럽니다.
Q :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꿈이 있을까요.
이제까진 안(못) 해봤지만 시간이 좀 여유가 생긴다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지금 길목에서 하는 '도시락 사들고'에 꼭 참여하고 싶어요. 아니면 보육원 같은 곳의 봉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생각을 입 밖으로 내야 실천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