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복지나 녹색복지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습니다. 대체로 "자연 생태 안에서의 여가와 삶을 누릴 수 있는 복지" 쯤으로 생각할 것 같습니다. 즉, 우리가 흔히 쓰는 주거복지, 의료복지, 문화 복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다운 주거생활을 누리는 것이나, 의료적 혜택을 받는 것, 더 나아가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삶을 누리는 것을 의미하듯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수혜대상자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전혀 다른 개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노인복지는 노인이 누리는 복지이고, 장애인 복지는 장애인이 누리는 복지, 동물복지는 동물이 누리는 복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생태 복지는 "생태"가 누리는 복지인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볼만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생태"가 무슨 행위와 권리의 주체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만, 식물의 생존권을 위해 나무 위에서 오랫동안 투쟁을 했던 버터플라이 힐 같은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뉴질랜드의 왕가누이 강처럼 생명이 있는 주체로 법인격을 부여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생태복지는 다만 인간만을 위한 개념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점도 생각해 볼만한 것입니다.
물론, 복지(福祉)라는 말의 어원은 희랍어의 '에우다이모니아(eudemonia)'로 "인간의 행복, 평안" 등 "사람이 잘 사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복지(welfare)는 영어단어 그대로 사람이 잘(well) 사는(fare) 것입니다. 잘 사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의식주'라고 하는 생존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들도 비슷한 조건에 있고, 생태계에서의 모든 생명들은 상호 역동적인 의존과 순환의 관계 속에서 구속되거나 촉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초원에서 사자의 복지는 초식동물에게는 죽음이듯이 "인간의 복지"는 다른 생명에게는 죽음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해에는 40여 년 동안 허용되지 않았던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가 승인되었고, 올해 착공 1주년 기념식에는 학교 어린이들까지 홍보에 나선 바가 있습니다. 설악산 국립공원에 케이블카 설치가 승인되자 광주 무등산, 울주 신불산, 대전 보문산, 보은 속리산, 영주 소백산, 대구 팔공산, 서울 북한산까지 줄줄이 케이블카 사업추진이 검토된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국립공원에 케이블카를 찬성하는 이들의 최대 명분은 장애인과 노인 등의 교통약자들의 복지실현, 즉, 녹색복지 혹은 생태복지에 있습니다. 아울러 관광객 유치를 통한 지역경제의 활성화도 주요 명분입니다만, 이것도 역시 지역주민들의 복지가 목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설악산 생태계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논리를 반박할 근거나 명분 또한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장애인과 노인이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오르는 것이 과연 생태복지이고 녹색복지의 본질인가 하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일상의 삶에서 이동권도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설악산 케이블카가 교통약자의 생태복지는 위선일 것입니다. 또한, 지역 경제의 활성화 효과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객관적인 통계지표에 의해서도 많은 케이블카 사업들이 적자이듯이, 케이블 카 타고 점찍고 내려오는 얕은 경험(shallow experience)의 관광트렌드가 지속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얕은 경험, 간접적인 경험, 일회적인 경험으로는 깊은 통찰(deep insight)이 어려울 것입니다. 인공지능시대, 기후위기의 시대라고 일컫는 인류문명의 위기에 직면하여 우리는 더욱 깊은 통찰력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 위기는 생태복지로서 케이블카 문제의 인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대로 인식 전환과 시대정신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적 위기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욱더 긴밀한 숲과 자연의 생태적 접촉을 통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높여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실감영상이니 증강현실이니 하는 사이버와 사이비(似而非)의 간접경험 범람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살림"이고, "삶"이며 사람의 삶, 생명의 삶의 양식이 "생태"입니다. "살"은 존재의 생태적 양식입니다. 우리는 살로 세상을 접촉하여, "살갑거나" "살떨리는" 일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촉감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살을 만지는 감촉입니다. 세상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뛰어난 질감의 재료는 사람 "살" 그 자체인 것입니다. 첫아기를 손에 만졌을 때의 느낌이 세상의 가장 신비로운 감촉이었듯,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살의 감촉은 짜릿하고 촉감일 것입니다. 영화에서 "향기"에서 지상최고의 향, 천국의 냄새는 사람의 "살" 냄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제 디지털 장갑과 디지털 마스크를 끼고 세상과 만납니다. 이것이 진정한 생태적 복지의 "잘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점점 "사람"의 "살"로 "살아가는" 능력, 즉 생태복지의 역량이 퇴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기후위기 등 환경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로 나아갈 가장 책임 있는 주체는 사람일 것입니다.
책임(責任)이라는 말은 뭔가 주어진 임무처럼 생각되지만, 영어로는 responsibility입니다. 이 리스판서빌러티는 리스폰스response와 어빌러티ability가 합쳐진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응답하는 능력이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책임은 곧 응답능력, 대응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환경문제, 기후위기문제, 생명살림에 응답할 수 있는 가장 주도적인 지구 생명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 살릴 사람은 사람밖에 없다"라고 한다면 생태복지의 최대의 시혜자이자 수혜자도 사람일 것입니다.
퇴계 이황선생이 산을 노니는 것이 독서라고 했듯이, 우리에게 숲이 글이고, 산이 책이어야 합니다. 또, 연암 박지원 선생이 곤충의 더듬이와 꽃술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문심(文心)이 없다 했듯이 글을 짓는 마음,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 상상력과 창의력의 토대는 숲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숲과 자연을 통해 누리는 생태복지는 단순한 여가와 관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문명의 위기를 돌파하는 깊은 통찰을 얻고 새로운 길을 찾는 생태적 삶을 의미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다만, 인간의 복지만이 아니라 생태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지속가능한 복지일 것입니다. 즉, 사람의 복지를 실현하는데도 동물들의 생태와 그 삶에 대해서도 고려하는 것, 나아가 식물과 존재의 영성까지도 배려하는 것, 이것이 녹색의 본질인 모든 생명의 소중함과 그 존재가 삶을 잘 살아가도록 하는 생태공동체의 웰빙(Well-being)이자 진정한 '생태복지' 아닐까 합니다.
생태복지의 패러다임은 인간중심적, 성장지상주의적, 물질 중심적, 획일적 복지가 아니라 가치 중심적이며 생명 중심적이며, 균형적이며, 역동적인 지속가능성을 중시하는 복지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태복지는 주체적 측면에서는 사람과 자연이 종속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공생관계로서 생태공동체 구성원의 복지 이해당사자라는 생태철학을 기반으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협력과 연대를 통한 공생의 패러다임을 형성해 가는 복지라고 하겠습니다.
숲에서 누리는 생태적 삶은 생태복지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입니다. 생태란 곧 둥지요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 글쓴이 약력 |
2022 산림문학신인상,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작 『두어 번 날갯짓에 명왕성을 난다』, 에세이 『숲에서 길을 묻다』. 2011 국민포장, 2017 대통령표창 수훈.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 (사)산림문화콘텐츠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