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이 팔레스타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거운 마음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에 가 본 적이 있고,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팔레스타인 친구가 있는 저 또한 그렇습니다.
인연의 시작
제가 처음 팔레스타인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3년입니다. 기억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던 해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중동이니 이라크니 하는 것에 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미국이 일으킨 전쟁을 보면서 점점 국제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팔레스타인이 나라 이름인지, 지역 이름인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이스라엘 군인이 팔레스타인 어린이를 향해 총을 쏘는 사진은 커다란 놀라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거대한 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자그마한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돌을 던지는 모습을 보고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팔레스타인과 맺은 인연이 어느새 20년을 넘기고 있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는 참 많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팔레스타인인이 사는 마을 주변에 높이 7~8m 장벽을 쌓는 일도 있었고, 임산부를 실은 구급차가 이스라엘의 검문소에 막혀 길에서 출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유대인이 다수를 이루는 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아랍인을 쫓아내는 일도 있었고,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대표하던 야세르 아라파트가 암살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2023년 10월 7일부터 시작된 전쟁은 그동안 있었던 일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울 만큼 큰 사건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도 특히 피해가 심각했던 곳은 가자 지구라는 곳입니다. 휴전이 시작된 2025년 1월 19일까지 가자 지구에서만 4만 7천여 명이라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게다가 1만 1천 명가량이 실종되었습니다.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로 사람이 실종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건물이 무너지자, 그 잔해에 그대로 깔렸던 겁니다. 폭격이 계속되고 있어 잔해에 깔린 사람을 구해낼 엄두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11만 명 이상의 부상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팔과 다리를 잃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에서 구조되어 의식을 되찾고 보니 자신의 다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다리 어디 갔어요' '내 다리 돌려주세요'라고 울부짖기도 했습니다.
많은 어린이는 자신이 곧 죽을 거로 생각했고, 매직으로 팔과 다리에 이름을 적기도 했습니다. 어린이들조차 폭격으로 죽으면 시신이 온전치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팔과 다리에 이름이라도 남겨 죽은 뒤에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랬던 겁니다.
가자에서 온 편지
알라딘은 한국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입니다. 2024년 7월 27일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알라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2023년 10월 20일 이스라엘 전투기가 저의 삼촌들과 그의 아이들이 살던 집, 그리고 그 주변에 있던 대부분의 집까지 폭격해서 40명이 넘는 어린이들과 여성, 남성이 사망했습니다. … 저는 가까운 친척들인 람지Ramzi, 니다Nidaa, 라드Raad, 라파트Raafat, 와엘Wael과 그들의 아이들 모두를,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를 잃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주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을 가진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계속되는 폭격과 굶주림 속에서도 알라딘의 동생과 다섯 조카가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2025년 1월 17일 알라딘이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가자 지구에 있는 동생 무함마드가 한국인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잔혹한 전쟁은 돌이나 나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파괴했지만 우리의 희망마저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470일 동안 끝없는 파괴를 보았고, 계속해서 피난을 다녔으며, 수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
가자 지구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우리의 시작은 어렵고 미약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지지와 연대가 있다면 절대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무함마드와 저는 같은 해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한국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고, 무함마드는 가자에서 크나큰 죽음과 파괴의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무함마드가 아이들과 함께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온갖 애를 쓰고 있을 생각을 하면,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미안한 마음마저 듭니다.
1월 19일 휴전이 시작되자 가자의 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모습을 영상으로 본 어떤 분은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슬픔에 빠져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앞 집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 알라딘
어찌 슬프지 않고 괴롭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살아남았지만 앞으로 무얼 먹고 어디서 잠을 잘지부터 걱정일 겁니다. 그동안은 살아남기 위해 헤매느라 느끼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던 가족을 잃은 아픔과 상처가 한꺼번에 밀려올 수도 있을 거고요.
휴전이 되고, 난민으로 떠돌던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집이라고 해야 여기저기 무너지고 불에 탔습니다. 다시 제 집으로 돌아온 난민들은 부서진 벽돌을 치워 누울 자리를 만들고, 유리창 대신 커다란 천으로 벽을 가려 찬 바람을 막고 있습니다. 벌써 시장에는 농산물을 내다 파는 사람과 이를 사러 나온 사람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거대한 살인과 파괴가 잠시나마 멈추자 다시 삶이 시작되고, 삶의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길고 참혹한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무함마드는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심지어는 '아름다웠던 과거를 떠올리며 눈물 흘리는 것보다는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전쟁이 끝나 기쁘기도 하고, 많은 것을 잃었기에 슬프기도 할 겁니다. 삶이 너무도 간절했을 무함마드에게 먼 곳에 있는 동갑내기 친구가 당신의 안녕을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