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혜의 뉴욕 스토리 24 - 새해의 결심, 집밥 맛있게
지난 12월 뉴욕한국문화원이 주관하는 “Harmony of the Eight Providence”(팔도 음식의 조화) 문화행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팔도란 현재 남한의 팔도가 아니라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를 포함한 조선시대의 팔도를 의미한다. 음식 관계자들과 문화계 인사들에게 한식을 알리는 행사였다. Daniel Boulud(다니엘 불루)의 식당 Café Boulud(카페 불루)에서 수세프로 일하고 있는 Jae Jung(정재은)씨가 삼계탕으로 시작하여, 강원도 영덕물회와 평안도 백김치말이, 함경도 꿩만두와 송로버섯, 이동갈비와 해주비빔밥, 삼합 등 모두 7코스로 준비하였다. 때로는 북한과 남한음식을 함께 페어링하면서, 백세주와 복분자주를 곁들여 전통을 살리면서 창의적인 프리젠테이션으로 한국의 맛을 선보였다. 이 음식을 먹으면서 잊혀졌던 나의 오래전 “김치말이”가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 어렸을 때는 김장을 하고 독을 마당에 파묻던 시절이다. 추운 겨울 이맘때 밤참으로 김치말이 밥을 먹던 기억이 난다. 독에서 김치와 얼음이 동동 떠 있는 동치미 국물을 퍼다 김치를 송송 썰어 참기름에 무쳐 밥과 말아 먹던 기억.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해하시던 아버지 얼굴이 떠오른다. 아버지께선 아마 떠나온 이북의 고향을 생각하셔서 김치말이를 좋아하셨는지 모르겠다. 추운데 덜덜 떨어가면 먹던 김치말이가 그립다.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 모시고 삼청공원 근처의 맛집 “눈나무집”에서 김치말이 국수, 빈대떡을 맛있게 드셨던 기억도 떠오른다. 좀처럼 그런 말씀 하시지 않느데 “여기 또 오자.” 하시던.
함께 한 테이블에는 이민자 세프들의 요리책을 쓴 사람, 부르클린 레스토랑 세프, 세프들의 멘토링 프로그램과 그랜트를 관장하는 사람, 요리학교를 운영하는 사람들이어서 음식에 관한 흥미로운 대화가 오갔다. 한 세프는 그린소스로 유명한 집, 레서피를 알기위해 거기서 일하던 세프를 고용했는데 알고보니 이미 상품화된 그린소스를 주문해서 써서 낭패를 보았다고 하고, 유명 스테이크하우스에서 맛있는 스테이크를 굽기 위해 기름이 제일 많은 신장 부위의 기름을 쓴다고 한다. 아이러닉하게도 음식 관계자들의 테이블에서는 집밥을 맛있게 해먹는 것이 가장 건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행지에서 쿡킹 클래스를 들어 보는 것도 전에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음식을 통해 그 나라나 그 지역을 알게 되고, 또 집에 와서 응용을 할 수 있고, 한끼 식사를 해결하니 “일거 여러득”인 것 같다.
스페인 출신의 한국 샘표 대리인을 뉴욕에서 만나니 흥미로웠다. 샘표의 발음이 특이해서 그 샘표가 내가 아는 샘표인지 인식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사우스 스트리트 시포트 지역에서 연두요리학교(Yondu Culinary Studio)도 운영한다고 한다. 미국시장을 상대로, 콩을 발효하고 야채를 우려낸 “연두”를 이용한 레서피와 요리강좌, 식생활 세미나 등을 한다. 연두요리학교가 있는 사우스 스트리트 시포트 지역은 브르클린 브리지가 바로 보이고 월 스트리트와도 멀지 않다. 약속하지 않고 방문했더니, 문이 닫혀있어 실내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밖에서 유리창으로 비치는 너른 공간에 상큼한 시설로 쾌적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바쁜 직장인들이 사먹지 않고 집밥을 쉽게 간편하게 도와주는 한국 브랜드의 식품이 세계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자리 잡은 것을 볼 때 한식의 세계화를 감지할 수 있다.
테이블에서 나누었던 대화들이 자극이 되어 음식에 관한 생각들이 계속 머리 속에 맴돌았다. 또 하나는 지난해 가을부터 유독이 감기가 자주 들고 또 오래 가서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친구와 하다 음식을 잘 챙겨 먹냐는 질문에 나의 식생활을 돌아보게 되었다. 건강하게 먹는다고, 소금, 설탕, 기름을 가능하면 안 넣고, 이것 빼고 저것 빼고, 날로 먹거나, 찌거나, 끓이는 조리법을 썼는데 그러다 보니 음식이 제한되고 너무 맛없게 먹은 것 같다. “too much of a good thing” 이 오히려 건강한 식습관이 아닌 것 같다. 올해는 새해결심 같은 것 정말 안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쥐어 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솟아 나왔다. “집밥 맛있게”로.
1월은 아마 내 생애 중 가장 열심히 요리를 한 달인 것 같다. 요리 프로그램에는 관심이 없다가 백종원의 요리 비디오를 보기 시작했다. 전에는 양지머리 고기를 오래 푹푹 끓이고 기름 싹 거두어 무를 넣고 끓였는데, 고기를 볶고, 기름 거품을 미리 거두지 말고 쉽게 쉽게 갔다.(그런데 솔직이 담백한 것을 좋아하는 개인의 취향은 어쩔 수 없다.) Netflix에서 하는 세프 테이블(Chef Table) 시리즈도 보기 시작했다. 정관 스님 편은 정말 백미이다. 아름답고 멋진 한국의 사찰음식을 세계에 알린 다큐멘타리다. 기회가 되면 사찰음식을 배우고 싶다. 34가 Macy백화점 건물 8층에 있는 De Gustibus Cooking School에서는 유명 세프를 초대하여 음식을 시연하거나, 직접 만드는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서울의 “발우공양”을 생각나게 하는 일본의 쇼진요리(사찰음식)를 하는 Kajitsu의 세프도 여기서 강연을 했다고 들었다.
남들은 이 나이에 부엌 오븐 문을 닫는다고 하는데, 나는 미니 오븐을 하나 장만했다. 붙박이 오븐이 너무 커서 사용하려면 그 속에 있는 후라이팬과 냄비를 꺼내고 귀찮아서 몇 번을 생각해야 하는데, 이 오븐은 너무 편하다. 이 귀여운 오븐이 토스트, 베이크, 로스트를 하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다. 아직 김치말이 밥은 만들어 먹지 못했다. 어제 씨름을 하면서 담근 한 포기 김치가 익으면 만들어 먹어야지. “김치 담그느라 진 빼지말고 김치사다 거기에 무를 큼직큼직 썰어 집어넣어요. 그런면 짜지도 않고 무도 맛있게 간이 배요. 반은 홈메이드에요.”하는 후배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