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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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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정읍댁의 정원일기 2 - 배롱나무 구출기

posted Sep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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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정읍댁의 정원일기 2 - 배롱나무 구출기 

 

 

포르르~ 분홍별이 초록 융단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 책상 앞에 앉아있던 내 눈이 반짝 떠졌다. 늦여름바람이 배롱나무가지를 산들산들 흔들자 잎사귀들이 한들한들 거리며 꽃잎을 떨어뜨리던 8월. 별가루처럼 배롱나무 꽃잎들이 잔디 잎새 위로 살포시 내려앉고 있었다. 나비 날개보다 더 얇은 꽃잎은 촘촘한 레이스처럼 오글오글했다. 손끝으로 잡아도 바스라 질까 조심스런 여린 속살 같았다. 매끈하니 배배꼬인 모양새에 수많은 사찰에 관상수로 있었지만 그저 부처의 나무려니 하고 지나쳤던 배롱나무. 나태주 시인이 시 ‘풀꽃1’에서 그랬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책상 앞 창 밖에 펼쳐진 정원에 서있는 배롱나무 분홍 꽃들이 솔솔 부는 바람에 온몸을 여리여리 흔들며 춤을 추던 그 날, 나는 배롱이 그렇게 사랑스러운지 처음 알았다. 그 분홍 꽃이 ‘자미화’임을 알았고, 백일 동안 피어서 ‘(목)백일홍’이라고도 불리고 충청도에서는 수피를 긁으면 잎이 흔들리는 게 웃는 것 같아 ‘간지럼 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도 간신히 기억해냈다. 하지만 그날 박종영 시인의 ‘배롱나무 웃음’이란 시를 찾아 읽고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선산에 붉은 꽃 흰 꽃 한 쌍으로 심은 배롱나무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배롱나무 옆에 서있는 나무도 배롱나무라는 걸 원조 정읍댁인 집주인을 통해 알았다. 게다가 그 나무의 꽃은 하얗다고 했다. 그런데 화사한 분홍 꽃 배롱나무와는 다르게 하얀 꽃 배롱나무에는 꽃이 한 송이도 피어있지 않았다. 왜? 가까이 가서 보니 웬 가시나무 두 그루가 배롱나무 가지 사이로 날카로운 가지들을 무성히 뻗어 올리고 있었다. 나는 가시에 찔려 신음하고 있는 배롱나무를 구해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곤 낫으로 가시가 가득한 이파리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하나둘 셋 넷 가지를 베어내다 보니 나무 두 그루를 아예 잘라버려야겠다 싶었다. 그 나무도 생명인데? 하지만 난 배롱나무를 살려야 했다. 한 쌍으로 심긴 분홍 꽃나무처럼 나머지 나무도 하얀 꽃을 피울 수 있게 해줘야 했다. 톱이 없기에 낫으로, 가늘지만 질기고 강한 나무줄기를 찍어냈다. 나중에 담장을 넘어드는 똑같은 나무를 통해 그 나무 이름이 두릅이란 걸 알았다. 새순을 삶아서 고추장 찍어먹는 그 두릅 말이다. 두릅도 생명이니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굳이 이유를 대자면 그 나무는 배롱나무 가지 속으로 파고들어가 아프게 괴롭혔으므로 제거의 명분이 있었다. 담장너머로 내 손에 들려진 낫날이 여러 번 허공을 가르고 찍어냄으로 결국 두릅나무 두 그루는 댕겅댕겅 잘려나갔다.   

나는 이파리 사이사이 바람이 실컷 드나드는 배롱나무에게 속삭였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너를 괴롭히는 걸 싹 제거해 줬으니 이제 꽃 피우는 건 네 몫이야.’ 

보슬비가 내렸다. 헤어컷 이후에 머리를 감겨주는 것처럼 시원했다. 내 정원손질을 하늘도 칭찬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날마다 배롱나무에 하얀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응원을 해 주었다.  

 

두 주쯤 후 태풍 마이삭이 지나갔다. 초록 나무 대문은 가운데 나무가 하나 부서졌고 대문 옆 돌흙담은 무너졌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배롱나무가 하이얀 꽃송이들을 피워냈다. 비바람속이라 더욱 기특했다. 내 마음을 알아주고 반응해 준 하얀 꽃 배롱나무에게 고마웠다. 어느덧 나는 식물과 교감하고 있었다.   

 

정읍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태풍 하이선이 지나간 다음 날, 나는 새벽부터 정원 손질을 했다. 초보 정원사지만 비가 오고 난 뒤 젖은 흙에서 풀이 잘 뽑힌다는 것쯤은 삼척동자처럼 아니까. 쓰러진 해바라기를 기와로 세우고 그새 또 자란 잡초를 마구잡이로 뽑고 화초와 나무에 방해되는 것들을 싹싹 걷어내 주고 숨겨진 잔디 속 돌다리를 찾아내었다. 끼니도 거른 채 풀과 흙 속에서 진주를 찾듯 몰입하는 동안 여러 생각이 들고 났다. 김해자 시인이 왜 밭일을 하다 지렁이가 나오면 얼른 흙을 덮어주었는지 나도 알게 되었다. 잡초를 뽑아 걷어내자 그 아래 고동색 곤충 두 마리가 사랑을 나누다 지붕이 사라져버려 깜짝 놀랐지만 허둥댐은 잠시, 하던 사랑을 곧 다시 계속하는 걸 보며 사랑은 천재지변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절반이 잘린 두릅은 어느새 가지 끝에서 새순을 틔워내고 있었다. 그대로 두었다. 내가 예쁜 것엔 좀 약하기 때문이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두 시간이 넘는 어쿠스틱 인디팝송모음이 다 끝나고도 낫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달라진 나를 발견하는 그 시간 그리고 그 즈음 내내 나는 한 사람에 대한 생각을 가득 하고 있었다. 지난여름 문자로 받았던 부음, 평론가 김종철. 2000년부터 20년간 정기구독하고 있는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 그는 이 시대의 생태 사상가이자 진정한 선생님이셨다. 내 유년기와 청년기가 성경에 근거한 삶이었다면 장년기는 <녹색평론>에 의지해 살아왔다. 비록 두 달에 한 번 배달이 돼도 끝까지 다 읽은 적이 거의 없고 몇 번을 읽어도 알지 못하는 지식의 깊이에 매번 한탄했지만 <녹색평론>은 실업기간에도 구독을 끊을 수 없던 내 유일한 생태 신지식의 창구였다. 

길담서원 강좌에서 김종철 선생님을 뵌 적이 있다. 버스에서도 뵈었다. 나는 <녹색평론>을 통해 알게 된, 안드레 블첵의 글은 언제 또 실리냐고 여쭤봤었다. 선생님은 그 글이 꽤 오래 전인 2014년에 실렸던 걸 기억하고 계셨다. 마지막은 2018년 가을 프레스센터에서였다. 김해자 시인의 만해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러 간 길이었다. 로비에서 인사를 하고 내 소개를 간단히 하자 선생님은 내 이름과 연락처를 얇은 수첩에 적으시며 원고 청탁을 하겠다고 하셨다. 그 얼마 전에 탈핵 관련 원고 청탁을 ‘삶이보이는창’에서 받았다고 하자, 그때 막 실내로 들어서는 황규관 시인이 선수 쳤다며 아까워하셨다. 그리고는 연락이 없으셨다. 다행이었다. 어찌 내가 감히 <녹색평론> 필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발행인과 필자이든 발행인과 독자이든 상관없이 선생님은, 선생님은 오래 살아계셨어야 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이후 이 땅에 본받을만한 생태계 스승의 자리를 그 누가 지켜내고 있는가. 그가 없는 이 세상을 나는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까? 흙을 솎아내고 나무를 어루만지며 나는 예수님과 김종철 선생님을 생각했다. 예수의 죽음 이후 기독교가 부활한 것처럼 김종철 선생님이 가시고 내 삶의 생태가 점차 본격적으로 지식에서 실천으로 나아감을 알았다. 진정한 추모란 명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다. 

정읍의 정원에서 배롱나무를 구해주면서 나는 앞으로의 삶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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