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이네
공주 보화터에 다녀온 다음 날 아침, 갈 곳은 다시 이전으로 좁혀졌다.
생태마을이냐 이층집이냐, 아니면 전혀 다른 집이냐. 서둘러 인터넷으로 대전 월세를 알아보았다. 전망이 확보된 곳은 쓸데없이 크거나 무척 비쌌다. 작년에 가봤던 이층집을 찾아보았다. 집은 아직도 임자를 못 찾고 사진 그대로였다. 그런데 보증금이 절반으로 내려져 있었다. 보증금은 그대로 두고 월세를 깎아볼까 하고 부동산에 전화를 했다. 부동산에서는 나를 기억하고 당황했다. 그날 계약하러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람이 계약금을 부치겠다는 걸 거절했다고, 그러면서 내게 계약금을 부칠 수 있느냐고 했다.
집주인에게 전화했다. 작년 가을, 주인댁에서 한번 자고 온 적이 있어 연락처가 있었다. 주인은 내 전화에 화들짝 반가워하셨다. 주인은 누군가 그 집에 계약하러 오는 길이라는 걸 알고 계셨다. 하지만 부동산에 연락해서 나와 계약하고 싶다고 하셨다. 계약금을 보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누구하고도 의논할 새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걸 가로챈 것 같아서 계약금을 보내고도 내내 찜찜했다. 부동산에선 원래 계속 안 나가다가 꼭 그렇게 몰리는 법이라고 했다.
몇 주 후 마침내 계약일이 되었다. 부동산에 들어가자마자 그때 계약하려던 사람 건을 물었다. 부동산에선 대수롭지 않은 듯 넘겼다. 주인에게도 여쭤보았다. 주인은 그 사람과 계약하는 걸 마땅치 않아 하고 계셨단다. 때마침 내게 연락이 와서 정말 잘됐다며, 세입자 복이 있다고 좋아하셨다. 환대받는 곳으로 가리라던 내 원대로 되었다.
내 이름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수년간 꼬박꼬박 납입한 저축 담보 대출로 보증금을 내고 첫 월세를 송금했다. 열 명도 잘 수 있을 스물두세 평 넓은 집이 내게 주어졌다.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냈다. 그 사이 안방에 붙박이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거실 벽지도 깨끗하게 도배돼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 집 앞 공터에 커다란 공장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산자락 일부를 가릴만한 높이였다.
이삿날 늦은 오후, 대전 원도심레츠에서 탈핵신문 읽기 모임 인원 세 명이 유기농 쌀과 두부와 달걀과 딸기와 휴지를 사 와서 5분 만에 갔다. 짜장면이라도 먹고 갈 줄 알았는데 약속이 있는데도 내가 걱정되어 들러본 것이었다.
첫날 밤, 깜깜한 밖을 보니 눈앞 산등성이에 빨간 불들이 반짝거렸다. 송전탑이었다.
‘하아~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렇게 고르고 골라 온 집이 송전탑이 보이는 곳이라니.’
집 보러 왔을 때 저 멀리 산자락에 보이던 송전탑들이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밤에 그렇게 위협적으로 빨간 불이 번쩍일 줄은 몰랐다.
다음 날, 급한 대로 해남 백련재 문학의 집에서 제작해 준 입주작가 토크콘서트 현수막을 거실 창에 붙였다. 그 현수막은 커튼이 오기 전까지 걸려있었다. 꽤 오래.
생필품
이사 올 때 내가 들고 온 물건은 할머니가 할아버지께 세 끼 밥상을 차려 올리시던 소반과 엄마가 쓰셨던 스테인리스 대야와 유럽 성당에서 사 온 촛대 둘. 그리고 20대 때 유작 악보에 가사를 써주고 선물 받은 십자가 소녀상과 오래전 사순절 새벽기도 개근으로 10년 동안 하나씩 받은 십자가 목걸이 중 몇 개. 그리고 큰고모가 챙겨주신 밥공기, 국그릇, 접시, 머그컵 한 쌍씩과 작은 냄비 둘과 달걀말이용 후라이팬과 중식도.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사람이 사는 데는 용도별 많은 물건이 필요하다.
이사하자마자 구입한 물건은 다음과 같다.
3만 원짜리 중고 책상과 두 개에 45,000원 하는 의자. 새것 같은 중고라 손님용으로 들여놓기는 했는데 그 이상의 중고물품은 사절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의 오래 묵은 기운을 새출발하는 집에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생활을 위해서는 자잘한 소비를 해야만 했다. 평소에 잘 가지 않는 대형마트에 갔다.
맨 처음 산 건 수공구세트였다. 그리고 메모리폼 토퍼와 패드, 발매트, 휴지통, 옷걸이, 변기커버, 욕실화, 밥주걱, 집게, 칼과 가위, 비누받침, 칫솔꽂이와 컵, 수저통, 접시 둘. 최소한으로 샀는데도 수십 만 원이 지출됐다. 초기비용이니 어쩔 수 없었다.
다음날 전입신고를 했다. 나는 이제 서울시민이 아니다.
내가 산 최초의 가전제품은 냉장고. 전기제품에 크기도 커서 고민했지만, 달걀과 두부라도 상하지 않게 먹으려면 냉장고는 필요했다. 대기업 제품이 아니면서 디자인은 예쁘고 에너지 절약을 할 수 있는 제품을 찾아보았다.
출근 때문에 비대면으로 설치된 냉장고는 전원을 켜자 벽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문의해 보니 ‘직접냉각방식의 냉장고의 경우 벽면을 차갑게 얼려 냉각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내외부 온도의 차이가 크거나 첫 가동시보다 더 성에나 물기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직접냉각방식의 냉장·냉동고는 냉각파이프가 내부를 직접 감싸고 있는 구조기 때문에 보다 냉각효율은 높고 소음과 전력 소비량이 적으며, 냉장·냉동고 내부를 촉촉하게 하여 음식물을 보다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제품의 성에발생은 냉장고 문을 여닫으면서 따뜻한 공기가 유입되어 표면에 물기가 생겨 어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여하튼 소음과 전력 소비량이 적은, 좋은 냉장고란다. 촉촉하게 하여 신선하게 보관하는 게 장점이라니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춘분에 전입신고를 했는데 4월이 되자, 손빨래가 웬말이냐며 절친 도톨이 세탁기를 사주었다. 하얗고 잘 돌아갔다.
의자는 포레가 사주셨다. 우리나라 최고의 의자였다. 의자 조립 시 포장 비닐이 끼어 들어갔는데 논산까지 갔던 기사님이 다시 와서 분해해서 비닐을 빼주고 가셨다. 그들의 실수이긴 했지만 그래도 요청하면서 미안했다. 그런데 정말 친절하게 해결해주고 가셨다. 역시 최고의 기업은 근무자들 태도도 우수하다.
친지로부터 집들이 선물 송금을 받아 손님용 토퍼 하나와 평소 좋아하는 브랜드의 그릇과 수저 리퍼브 제품을 샀다. 처음으로 국와 밥과 반찬을 제대로 차려 먹었다.
커튼
가전제품도 사지 않은 나는 커튼에 상대적으로 엄청난 투자를 했다.
햇빛이 들어오는 창이 중요한 만큼 해가 지고 나면 실내를 가려줄 천이 필요했다.
커튼과 부자재들이 왔다.
전화상담 후 3등분 된 천장 커튼박스에 들어갈 라운드 레일을 주문했는데 내 힘으론 구부릴 수 없었다. 30cm나 넉넉하게 온 레일도 줄톱으로 자르라는데 줄톱이 있어야 자르지. 줄톱이 있다고 한들 내 힘으로 자를 수나 있나?
아마 그때부터 우울이 시작된 듯하다. 며칠이나 라운드 레일을 거실 바닥에 포장째 놓고 궁리하다가 결국 반품하고 일자형 레일을 주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작은 방 천장에 커튼 봉 부자재도 박을 수도 없었다.
힘없는 여성 혼자 살면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동안 나는 이사도 대부분 혼자 했고, 웬만한 수리를 직접 해 왔었다. 그래서 남성의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커튼은 이삿날 전문업체에서 해주고 갔던 것이다. 그것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다. 마침내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캠핑용 워터저그받침대 둘을 주문했다.
의자 위에 의자를 놓자 천장에 손이 닿았다. 석고로 된 천장에 드라이버로 레일과 커튼봉을 달았다. 전동 드릴이 없어 손으로 나사를 돌리며 우울감이 자신감으로 변했다. 거실엔 크림색, 작은 방엔 초록색 커튼을 달았다. 부엌 바란스 커튼은 봉을 사서 손수건 두 장을 걸고, 안방 커튼은 두 번이나 취소하고 제작 주문을 했다. 커튼이 자리를 잡을 때마다 집이 집다워졌다.
쓰레기와 상추
사람이 살면 반드시 따르는 문제가 쓰레기 처리다. 이 동네는 분리수거일도 없고 쓰레기차도 오지 않는다. 면 소재 행정복지센터에 전화해 쓰레기처리장을 물어보니 그런 전화 처음 받는다고 한다. 알아보니 이 동네는 쓰레기를 버리려면 종량제 봉투를 들고 몇백 미터를 걸어가 길가 수거함에 넣어야 한다. 음식 쓰레기는 수거하지 않는다. 땅에 파묻거나 개울가에 버리라고 한다. 그래도 썩는 음식쓰레기는 처리불가 핵쓰레기 보다는 낫다.
집 건물 옆 가스통 옆에 흙이 있다. 삽으로 땅을 파고 음식물쓰레기를 묻다가 그 땅을 밭으로 만들고 싶었다. 삽으로 잡초를 캐고 있는데 뒷집 아저씨가 집 옆으로 지나가셨다. 며칠 후 그 땅이 곱게 싹 갈려있고 쇠스랑이 가운데 꽂혀 있었다. 누군가 다녀간 것이었다. 너무 놀라고 겁이 나서 집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혹시 다녀가셨어요? 집 옆에 흙이 싹 갈려져 있어요.”
“응. 우리가 갔다 왔지. 상추 심고 싶다며?”
그랬었다. 정원 가운데 작은 꽃밭에 상추를 심고 싶다고 하니 여주인 권사님은 꽃이 좋다고 하셨다. 그때 아무말도 못하고 시무룩했었다.
“(한껏 상기한 톤으로) 네, 상추 심고 싶어요. 어디서 사오면 돼요?”
“우리가 사다주지.”
정말 기쁘고 감사했다. 상추만 심어도 집에 정이 들 것 같았다.
친구들
팽목항에 다녀온 다음 날 친구들이 왔다.
대전에서 한우와 된장찌개거리와 밑반찬이 캠핑용 물품과 함께 와서 정원에 펼쳐졌다. 나는 중국 음식을 시키려고 했지만, 아무 데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월요일은 이 동네 중국집 전체 휴무인가 보다. 민망한 호스트인 내가 한 일은 밥 2인분(압력밥솥이 2인용이므로)과 국물내기까지 포함된 재료로 된장찌개를 끓이는 일뿐이었다. 왜가리가 바리바리 싸 오신 음식으로 풀코스 조리에 참나무 모닥불까지 피우고 난 후 대전 친구들은 가고 탈핵 벗들이 남았다.
친구들이 다녀가고 오디오 세트와 책상이 생겼다. 한 달간 불도 제대로 못 끄고 자고 어두워지면 안방 밖으로 못 나오다가 그날 밤 처음으로 안방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사람의 온기가 두려움을 몰아내 주었다.
신고식
두 번째 월세를 송금한 날, 주인 어르신 내외가 오셨다. 농부 친구가 삼등분 해 북돋워놓고 간 밭을 다시 싹 갈아 평평하게 만드셨다. 그리곤 검은 멀칭 비닐을 덮으시고 구멍을 뚫으셨다. 그 구멍에 물을 넣은 후, 상추와 쑥갓 모종을 심었다. 그리고 화분에서 떨어진 다육이를 빈 화분에 흙을 채운 뒤 심었다. 호미를 들고 잡초를 뽑았다.
권사님이신 집주인은 내게 냉장고가 없는 줄 알고 마을정보센터에서 얻어 놓으셨다고 했다. 세탁기도 뒷집에 거의 새것이 있다고 했다. 동네에 이야기했다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미 구비한 상태. 차 한 대로 움직이다가 트럭이 필요하게 돼 버렸다.
냉장고가 있다고 하니 권사님이 반찬을 네 통이나 주셨다. 며칠 전 상할까 봐 멸치볶음만 놓고 가셨다고 했다. 순식간에 밭을 만들어 주시고 주인 내외는 가셨다.
이층에 올라와서 밥을 했다. 미나리 물김치와 멸치볶음과 고들빼기 무침을 전날 대전 CORNER SHOP에서 산 독일제 왝wack 유리 밀폐 용기에 담았다. 자연드림에서 산 두부 스테이크를 부쳐 네모난 접시에 담았다. 눈물이 울컥 올라왔다. 상추밭과 반찬이라니. 이런 사랑을 받다니…… 감사했다.
처음으로 바닥에 소반이 아닌 책상에 음식을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서 먹었다.
라디오에서 베토벤 교향곡 5번 황제 1, 2악장이 나왔다. 사는 것 같았다.
가신 줄 알았던 주인 내외가 다시 오셨다. 그리곤 마을정보센터에서 내 신고식을 한다고 하셨다. 나도 모르는 내 신고식을? 얼결에 수저와 친환경 토마토 세 알 든 상자를 들고 갔다.
빨갛게 버무린 우여회가 있었다. 집주인 권사님은 부여 분이셨다. 우여회는 부여의 특산품이라고 하셨다.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곳에서 사는 우여가 저며져 미나리와 함께 새콤달콤 아주 맛있었다. 우여회 두 접시와 양념에 비빈 밥까지 먹었다.
“아무거나 잘 먹어서 좋네.”
“잘 먹어서 좋네.”
여자 셋, 남자 여섯. 아홉 분의 동네 어른들이 날 지켜보고 계셨다. 밥을 다 먹고 일어섰다.
“저는 요리를 안 했으니까 설거지를 하겠습니다.”
10인분 설거지를 했다. 그렇게 신고식을 잘 마쳤다. 진작 이런 걸 겪었더라면 이전의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그때의 나는 나이만 먹었지 아무것도 몰랐다. 하긴 이전의 실수가 있었기에 지금의 사람 구실 하는 내가 있겠지.
귀신 소동
전주국제영화제에 다녀온 날 피곤해서 일찍 잤더니 다음 날 새벽에 깼다. 그래서 처음으로 책상을 옮겨놓은 작은 방에서 글을 썼다. 그런데 새벽 다섯 시가 지나고 여섯 시가 되기 전에 쿵쿵쿵쿵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들리나 집안을 살펴보는데 천장 같았다. 굴착기 공사를 하나 하고 밖을 내다보았는데 아니었다.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정원을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집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소리는 계속 들렸다. 환청인가 싶어 녹음을 해 보았다. 환청이라면 녹음되지 않을 터였다. 재생해보니 아주 작게 소리가 들렸다. 실제상황이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소리가 계속되자 우산을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강아지 콩이를 데리고 100미터쯤 나가봤다. 지붕에서 누가 뛰는 것 같았지만 집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작은 방에는 다락이 있다. 마치 그 다락에서 강시처럼 귀신이 뛰는 것 같았다. 공포심이 극에 달했다. 전화하면 달려와 줄 사람이 절실했다. 귀신 나오는 집이라면 당장 보증금을 빼서 나가야 했다.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막막하고 절박했다.
10시가 넘어 집 밖으로 나갔는데 1층 문이 열려있었다. 모르는 여자가 현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어제 여기서 주무셨어요?”
“네.”
“주인분 친지세요?”
“이모요.”(권사님의 동생분이셨다.)
“혹시 새벽에 일하셨어요?”
“내가 잠이 안 와서 마늘이랑 생강을 찧었어요.”
“아휴~ 저 정말 무서웠어요. 다행이에요. 무슨 소리인지 밝혀져서.”
콩이
두 번이나 취소하고 재주문했던 안방 커튼은 끝까지 애를 먹였다. 집에 있는 레일에 걸어보니 내 실측 부주의로 10cm나 짧았다. 깡뚱한 커튼이 내 멍청함과 허술함의 증거처럼 보여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나는 급기야 무너지고 말았다.
며칠 후 묘안으로 제일 굵은 커튼봉을 주문해 링을 달아 길이를 길게 했다. 그런데 안방 천장에 장착돼 있던 레일 때문에 커튼봉 브라켓 나사를 박을 수 없었다.
또 며칠을 고민하다 석고 천장에 커튼봉을 박았다. 봉끝이 튀어나와 붙박이장 문 한 쪽을 열지 못했지만 짧은 커튼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기다려요. 당장 가서 해 줄게요.”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아마 계속 누군가에게 의존했을 것이다. 이곳에는 뒷산도 교회도 성당도 없다. 남자친구나 할머니도 없다. 의지할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
제일 자주 보는 이들은 부엌 창 너머 마을정보센터 위에 있는 파란 단발머리 소녀와 파란 날개 하나 달린 곤충 모형. 며칠에 한 번씩 오시지만 조용히 다녀가시는 주인 내외. 오가며 인사하지만 아직은 거리감 있는 뒷집. 그나마 내가 마음을 붙이는 대상은 매일 물과 사료를 주는 강아지 콩이.
온종일 집안에 처박혀 있다가 해질녘이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계단을 내려가면 콩이가 내 쪽을 보고 앉아있다. 나는 말뚝에 걸려있는 녀석의 목줄을 잡아 올린다. 그리곤 그 길이만큼의 다른 줄을 연결한다. 콩이는 신이 나서 내달린다. 힘센 말처럼 펄쩍펄쩍 뛰어나간다. 온종일 1미터짜리 끈에 묶여있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뒷집 분들은 우리를 보면 한마디 하신다.
“콩이 호강하네.”
콩이 덕분에 나도 산책을 한다. 녀석이 없으면 아마 집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거다. 예전에도 그랬었다. 그렇게 원조 집순이이던 내가 어쩌다 도보순례를 하고 이런 낯선 곳에서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콩이는 밖에서 사는 개다. 목욕도 안 하고 털도 뭉쳐있다. 뭉친 털에 진드기나 뾰족뾰족한 열매가 파묻혀있다. 풀숲으로 다니기 때문이다. 손으로 잡아 뜯으면 아파서 낑낑거리면서도 나를 물진 않는다. 이발기로 콩이 미용을 시켜준다. 전동 소리가 싫어 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지만, 이래저래 대충 털을 잘라내 주었다.
콩이는 이제 엎드릴 때마다 따가운 열매가 배에 박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빈집을 지키다가 이층에 내가 있으니 좋을 것이다. 나도 콩이 덕분에 조금 안심을 한다. 대문도 없는 이 큰 집에 그애와 나, 단둘이 산다. 서로 의지하지 않으면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탈핵신문과 잡지 <내일을 여는 작가>와 국민건강보험료 영수증이 빨간 우체통으로 도착했다. 하지만 이 집은 아직 별이네가 아닌 콩이네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