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요리 1 - 오늘은 잔치국수
가끔 담백한 옷차림이 더욱 매력적일 수 있다. 특히 남자에게 그렇다.
흰색 와이셔츠에 회색 정장바지, 녹색 톤의 양말은 복숭아뼈만 보여줄 뿐 갈색 구두에 가린다. 잘 닦은 구두와 벨트는 담백함을 더하는 액세서리다.
흰색 백자에 상아색 국물에 담긴 하얀 국수를 보면 엘리트 같은 팀장을 만나는 듯하다.
특히 하얀색 탁자보 위에 하얀 백자 그릇과 양념간장 종지, 놋으로 만든 젓가락이 놓여 있는 테이블 세팅을 바라보는 느낌은 뭐랄까. 어떤 화려한 록스타나 근육질의 프리미어리그 축구선수보다는 평범하지만 깔끔한 직장인이 흰색 종이의 보고서 한 장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국수를 하얀색 와이셔츠를 입은 직장인으로 묘사했지만, 사실은 국수라 함은 더운 여름 엄마가 대충 점심으로 때우기 쉬운 용도로 만들어 놓거나, 잔치 집에서 돌리는 음식으로 먹는 다. 국수는 자고로 여러 사람이 함께, 빠르게, 넉넉하게 먹기 위함이다.
그래서 담백하고 하얀 국수 안에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함이 있고 관혼상제의 인생사가 있으며 나의 엄마가 있다. 인생은 혼자만 사는 게 아닌 것처럼 국수도 혼자만 먹는 음식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국수를 40대 넘어서 홀로 사는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 먹기로 했다. 그건 순전히 집에 멸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집에 어떤 재료가 있는 지 볼까나...
재료 1. 멸치와 디포리. 그들은 남해에서 왔다.
왜냐면 여름바다로 거제도에 갔기 때문이다.
거제도는 대통령 탄생설화가 있는 곳이고 전노협 진군가 가사에 나오는 옥포의 조선소가 있는 곳이고, 멸치들의 탄생 처이기도 하다. 마른 멸치 한 박스와 디포리를 거제도에서 샀다. 디포리 다시물은 우유향이나 버터 맛이 살짝 난다. 색깔도 예쁘게 만들어서 잔치국수를 귀티 나게 변화시켜준다.
재료 2. 오징어. 그들은 동해안에서 왔다고 했다.
삶아 먹기 위해 사둔 오징어가 냉동실에 있었다. 통째로 쪄서 소주한잔 먹는 게 일품, 그러나 계란으로 고명을 만들기는 너무 귀찮고 자신도 없었다. 그래도 단백질은 필요할 것 같아서, 전주식 콩나물국밥처럼 오징어를 쪄서 총총 썰어 넣기로 했다. 결과적으로는 권하지 않는다.
재료 3. 호박과 붉은 고추. 그들은 전라도 나주에서 내가 키웠다.
흙과 자연과 거리가 먼 나로서는 아스팔트와 인공 건축물이 더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데, 전라도와서 처음으로 한번 키워봤다.
재료 4. 참기름과 간장, 고춧가루. 그들은 태초에 존재했다.
참기름은 아마 중국산은 아니고 간장과 고춧가루는 그냥 집에 있었다. 참기름과 고춧가루는 아마 누가 줬을 것이고 간장은 지역 로컬푸드점에서 산 것 같다. 그냥 냉장고에 있었다.
그럼 만들어 보겠습니다.
STEP 1 멸치 다섯 마리와 다포리 한 마리 넣고, 다시마는 너구리 두 장 만큼 넣고 냄비에 끓입니다. 면은 삶으면 되고, 이후에 찬 물에 식히면 되죠. 면은 3분 내외로 삶으면 된데요.
STEP 2 양념장은 간장, 참기름, 파, 간 마늘, 양파를 넣으면 되는 데요. 저는 그냥 있는 거 간장, 참기름, 고춧가루뿐입니다.
STEP 3 고명으로 남은 오징어를 삶아서 넣었는데요. 아까 말씀드린 부드러운 식감으로는 역시 그냥 계란 지단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근데 혼자 있으면 이것도 귀찮으니, 그냥 드세요. 단백질이 정 필요하면 그냥 스팸 씹어 먹어요. 아니면 계란을 삶던가요.
만들어 놓은 국수를 보면 정말 매력적이에요. 가만히 보면 담백한 모습에 여름 한철 때우기 좋죠.
혼자 만들어 보니까 왁자지껄함과 거창한 인생사는 드러나지 않지만, 어깨너머로 본 엄마의 국수가 떠오르네요. 그렇게 센티하지 않아요. 사실은 우리 인생이 그렇잖아요. 한 끼 먹으면 되죠.
국수에 무슨 엘리트 팀장의 옷이 나오고 옥포의 조선소 노동자까지 나오겠어요. 하지만 홀로 요리할 때의 특권은 나 혼자 무궁하게 생각하고 무진하게 의미를 두는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