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미티 트레킹 4부 - 5, 6일차 기록
#Dolomiti트레킹_Day+5 (2018. 8. 16. 목)
Tri Cime, 트리 치메라 읽는다
그럼 그렇지! 트레킹 코스란 자고로 이렇게 설계해야 하는 거야. 처음엔 살짝 보여주는거지, 그리고는 다른 모습을 슬쩍슬쩍 끼워 넣는거야.. 그러면서 강도를 높여나가 마지막에 클라이막스를 찍도록 하는거지.. 어스럼한 저녁에 트리 치메 앞에 서 있으면 그저 모두가 황홀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초승달 걸려 있는 트리치메 앞에 서서 생각한다. 삶의 방향을 어디로 정해야 하나
봉우리 세개가 뭐에 그리 대단하랴마는 돌로미테 트레킹을 나섰다면 필히 이 세 봉우리를 마주 하고 있는 Drei Zinnen Hutte(2450)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번 트레킹에서 꼭 하룻밤을 고르라면 단연코 드레이지넨 산장에서 묵는 것이다. 다른건 모르겠지만 돌로미테에선 드레이지넨 산장에서는 꼭 하루를 보내야 한다. 이게 답이다. 8월이지만 2,500고지의 밤은 춥다. 이 추위에 산장 아래 공터에는 비박하는 트레커들이 즐비하다. 두툼한 침낭안에서 눈만 빠꼼히 내놓고 저 달과 세 봉우리를 쳐다보며 잠 드는 것이다.
Drei Zinnen Hutte를 바라보며
오후에 가이드 막심의 인생사를 듣으며 걷는데 방랑자 그의 인생 중 뉴칼레도니아에서 트레일 코스를 개척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가진 꿈 중 하나가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는 비무장지대에 평화의 순례길, 이름하여 “DMZ 평화올레”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한반도 근현대사에서부터 동북아 평화공동체까지 산길을 오르며 이야기했다. 자연를 사랑하여 트레킹 안내자로 업을 삼은 막심은 내 이야기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한다. 덕분에 오후 1000미터 업힐 5시간 코스를 아드레날린 충만케 왔다.
산장에 짐을 풀고 트리치메를 바라보며 맥주 한잔
인생의 방향을 0.5° 정도 틀 수 있을 것 같다. 몽블랑 트레킹 일주일, 연이어 돌로미테를 일주일 동안 걸으며 삶이 거듭날 것 같은 희망이 보인다. 이제야 내가 뭘하면 기분이 막 좋아지는지 알게되었으니 인생항로를 0.5° 수정한다고 한 것은 박한 평가인가?
오늘의 사족 1. 이 트레킹이 가능했던 것은 가족 모두 방학을 맞아 한국으로 갔기 때문이다. 또한 파견지인 OECD는 여름 휴가가 길다. 2. 무슨 남아 도는 돈이 있어 가족들이 모두 방학을 맞아 한국으로 간 것은 아니다. 파견 나올때 기간이 1년이었다. 그래서 일년 오픈으로 비행기표를 예약해서 왔다. 이 표는 기간 연장이 되지 않아 1년 안에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라 어쩔 수 없이 귀국하였다. 3. 덕분에 나는 홀로 여름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쉽게 길을 떠날 수 있었다. 걸으며 감사했고 이런 호사와 기쁨을 누렸으니 어떻게 갚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Dolomiti트레킹_Day+6 (2018. 8. 17.)
백 년이 지나고 남은 것
흔하다곤 할 수 없지만 전쟁의 흔적은 넓디넓은 돌로미테 어디에서건 쉽게 눈에 띈다.
1차 대전 당시 상대 진영을 향해 날아다녔던 포탄은 여기 산장 계단의 장식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Drei Zinnen 산장 계단 장식에 사용된 탄두
아침 트레킹 코스는 지도에서도 찾기 어려운 전쟁 당시 군인들이 파 놓은 터널 속을 기어 올라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난 밤 Drei Zinnen 산장에는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머물렀다. 여름 시즌에는 베드가 늘 만석이라고 들었다. 아침 일찍 산장으로 줄지어 올라오는 트레커들에 비하면 우리 팀이 선택한 이 코스로 오르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전쟁 당시 군인들이 파놓은 오르막 터널
돌로미테 트레킹 준비물에는 헤드램프가 있었다. 야간 산행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헤드램프를 가져오라는지 의아해하며 챙겨 넣었었다. 오늘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족히 삼사백 미터나 되는 급경사 터널을 만든 군인들은 후대에 자기들이 파놓은 이 터널이 어떤 용도로 사용될지 상상이나 하였을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전쟁하느라 파놓은 터널 때문에 이 같은 황홀한 광경을 연출하였으니 어찌 인생이 한번은 비극 한번은 희극으로 되풀이된다는 말을 흘려들을 수 있으리오.
터널을 기어오르다 역시 전생 용도로 파놓은 곳에서 바라본 트리치메
터널이 끝나고 이어지는 코스는 트리치메를 등반하는 록 클라이밍과 트레킹으로 나뉘어 진다. 터널에서 만난 커플은 터널 끝에서 하네스를 하고 등반준비를 한다. 우리 팀은 다시 급경사 내리막이다.
사면을 가로지르며 펼쳐진 긴 트레킹 코스
자갈밭 내리막길에서 일차대전 당시 누군가를 겨누었을 총탄의 남겨진 녹슨 탄피가 눈에 띄었다. 경계를 둘러싼 분쟁이 어디 국경뿐이겠는가? 살다 보면 매일 만나는 일이 경계와 영역을 가름하는 일이 아닌가 한다. 전쟁은 끝났고 우리는 백년전 군인들이 개척한 길을 다시 걷고 있다.
녹슨 탄피와 하늘거리는 개양귀비 꽃, 탄피가 저리 반듯이 서 있을 리 만무하다. 연출이다.
삼만오천 보 연속 사흘 걷고 오늘 이만 보로 마무리하려니 아쉽다. 일행들은 돌로미테 트레킹의 마지막 밤을 보낼 산장으로 내려가고 나는 삼 봉 가운데 가장 낮은 치메 피콜로 앞까지 다녀왔다.
치메 피콜로 앞에서 포즈
오늘 숙소는 레퓨지 라바헤도(2344)이다. 돌로미테 트레킹을 위해서는 일주일이 필요하지만 일정이 짧다면 여기를 경유하여 트리치메를 올라갔다 오는 당일 코스가 가장 보편적이다. 어제 머문 Drei Zinnen Hutt에서 가까운 트레일을 따라가면 두 시간 채 안 걸리는 거리다. 라바헤도 레퓨지는 트리치메 남동사면을 바라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구조 헬기가 떴다
번외로 할만한 주제가 여럿 있는데 오늘은 객적은 소릴 그만해야겠다. 어제 트리치메를 바라 보느라 샤워를 건너뛰었다. 오늘은 산장에 들어오자마자 씻고 나오는데 노란색 레스큐 헬기가 와있다. 사고가 있었다 한다. 룸메이트 시몬이 이탈리아어를 좀 해서 산장지기와 구조대 사이의 대화를 넘겨 들었는데 혼자 등반하다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헬기 접근이 마땅치 않은 곳이라 수습하기 힘들다고 한다. 두어 번 떳다 내렸다를 반복하더니 임무를 마쳤는지 다시 내리지 않고 시야에서 멀어졌다. 오르고자 하는 욕망은 필히 추락의 가능성을 동반한다.
이번 트레킹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서서 십자가를 부여잡다
점심식사 전에 오른 봉우리 Cime Fiscoline(2600)은 이번 트레킹에서 가장 높다. 봉우리 위에 세워진 십자가는 낭떠러지 바로 앞이다. 봉우리에 올라 십자가 옆으로 가서 서니 꽉 잡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 뒤로 말 그대로 천 길 낭떠러지다. 오금이 저린다는 표현이 딱 맞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멀지 않다.
봉우리 뒤 낭떠러지
십자가 옆에 누군가 써 붙였다. “Don’t forget, we are all barefeet in our socks.”
의식화와 사회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 페르소나를 한 겹 벗겨낸 진짜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하였다.
오늘의 사족 1.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다시 생각한다. 나는 피안의 경계에 다다르기 전에 무얼 해야 하나? 2. 짧게 다녀와야 하는 일정이라면 여기 라바헤도 산장과 드레이지넨 산장을 중심으로 둘러봐도 좋겠다. 이번 트레킹의 대략 코스는 아래와 같다.
https://goo.gl/maps/nj3MREpaQHs
3. 으뜸이고 버금이고 다 부질없는 짓이다. 한다와 안한다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