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랑(螳螂)이 거철(拒轍)한들
1. 운문사(雲門寺)는 청도에 있는 절이다. 월정사 입구에 전나무 숲이 있다면 운문사 들어가는 길엔 소나무 숲이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반겨주는 절집이라니! 그 사이를 걷고 있노라면 절로 정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2. 구름문(雲門)을 열고 들어서면 비구니 도량이 나온다. 정갈한 마음이 되었으니 가람을 돌 때도 절집 곳곳에 모셔진 부처님을 뵈올 때도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려말선초(麗末鮮初)라고 연대기가 표시되었으나 내 눈엔 고려시대의 미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부처님의 미소를 보고 있자면 정갈한 웃음이란 저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된다.
3. 언젠가 초파일 근처에 공양간에서 땀 흘리며 열심이시던 공양주 보살께 누룽지를 얻어먹기도 했다. 절집 앞 너른 밭에는 울력을 나온 비구니 스님들이 회색 옷자락을 스치며 사분사분 작물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4. 소나무 이야기를 한 번 더 해야겠다. 식민이 남겨 놓은 잔혹함은 칠십 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치유되지 않았다. 수백의 소나무 한 그루도 빼놓지 않고 송진을 징발하기 위해 상처를 내었던 나무 밑동은 아직도 선명하게 그 잔혹함을 증명하고 있다.
나는 매번 올 때마다 그 상처를 어루만진다. 누구든 그러하지 않으랴마는…. 운문사 경내에 있는 처진 소나무는 화를 피했다. 경내에 있어 상처를 받지 않은 것인지 송진을 뽑아내기 힘든 모양새여서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5. 언제부터 바뀌었는지 오늘은 초입에 주차장은 비어 있고 줄줄이 차들이 올라간다. 주차비와 문화재 관람료를 드라이브 스루로 내고 소나무 숲을 지나쳐 올라가는 차들을 물리치고 다리 아픈 어미를 배려하지도 않은 채 입구 한쪽에 차를 세웠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보다 애틋한 사연과 역사를 품고 있는 소나무숲 길을 차마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것이다. 엔진 굉음 요란히 오르막을 오르는 차 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는 심사가 복잡하다. 절집 앞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지레짐작할 수 있으니 더욱 괴롭다.
6. 선방에서의 참선과 울력으로 다져온 전통은 어찌하고 절집 앞 너른 밭이 주차장이 되고 말았나. 어지러운 심사를 뒤로 하고 운문호를 돌아 나오는데 가로수로 심은 감나무에 감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달린 걸 보고 오지호의 감이 떠올랐다.
7.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 올라오던 길 봐 두었던 집으로 차를 돌렸다. 사하촌 식당들은 대개 그만그만하여 부러 좀 떨어진 마을에 마당이 넓은 집으로 왔다. 가을 하늘이 좋아 밖에서 식사해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선선히 그러라고 한다. 마당 한 편에 백구가 묶여 있어 한참을 같이 놀았다. 순한 줄 알았는데 다른 손님에겐 사납다.
8. 떨어진 감을 몇 개 줍고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을 받아먹고 오지호의 감을 검색하니 감나무는 아직 잎도 피지 않았고 햇살 아래 백구 한 마리 늘어지게 자고 있다. 정작 붉은 감 휘어지게 달린 그림은 오치균이었다.
9. 빌린 공유차 반납하고 고향집으로 걸어오는 길은 벼가 익어 가는 벌판을 가로질러야 한다. 황금이 여기에 열렸구나.
10. 벼가 익어 가는 향기에 코를 벌름이고 걷다 당랑이 거철하다 바닥에 제 자국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 자국을 맞닥뜨렸다.
농부의 유전자가 각인된 노모는 혀를 찼다. 이 벌판을 지나가는 지하철이 아래 동네 대학을 잇는다고 들어서고 역세권 개발이라고 이 너른 뜰에 아파트를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한숨을 쉰다. 삼한시대 이 일대가 압독국이었다고 하니 족히 두 번의 밀레니엄 넘는 시간 동안 인간의 허기를 채워주었던 논밭이 개발된단다. 개 발을 만지며 즐거웠던 점심때가 차라리 좋았다.
사족: 코로나 팬데믹의 위세가 아직 지구촌을 휘감고 있어 이번 추석도 작년에 이어 허위허위 가버렸다. 작년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찾아 함께 햇살 좋은 가을날 나들이 나갔다가 절집 문 앞 떡하니 들어선 주차장에 심사가 배배 꼬여 몇 자 적었다. 이번 추석에도 저 들판에 벼는 여물고 있었으나 그 수확이 얼마나 더 갈 수 있으랴. 우리는 저 당랑의 신세를 면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