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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국의 걸으며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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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교체에 관한 보고서

posted Mar 0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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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교체에 관한 보고서

 

 

‘별도 달도 따다 주마’

이런 낯간지러운 레토릭을 살며 주워섬긴 적은 없는 듯하다. 하지만 별도 달도 따다주겠다는 의지가 없었던 바는 아니다.

 

교회가 이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주방에서 사용하던 냉장고를 집으로 옮겨 오고, 집에 있던 냉장고는 처분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업이 부지불식간에 생겼다. 냉장고를 오랫동안 창고에 두면 기능을 상실한다는 우려도 있고 멀쩡한 걸 버릴 수는 없고 팔기는 더 마땅치 않아 우리 집 오래된 냉장고와 교체하고 새로 입주하는 시점에 필요한 교회 냉장고는 헌물하기로 마음을 먹으니 모든 상황이 편안하다. 하여 있던 냉장고 처분은 서울시의 무료 방문 수거라는 신박한 서비스(Tel: 1599-0903)를 통하여 처리하고, 옮겨오는 서비스는 냉장고를 판매한 L모 업체에 비용을 얼마간 부담하면 수거해서 배달 및 설치까지 해 준다니 말끔하다. 하지만 복잡까지는 아닐지라도 몇 통의 전화와 각 장소에 방문 시간에 맞춰 인원 배치라는 수고스러움은 어쩔 수 없다. 적시적소(適時適所), 알맞은 때, 알맞은 장소에 필요한 인원.. 세상사가 이 세 요소만 만족하면 매끄럽지 아니한가!

 

정작 힘든 일은 십 수년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덩치 큰 냉장고가 있던 자리를 청소하고 냉장고를 채우고 있었던 음식과 재료를 보냉백에 옮겨 담는 일이었다. 수거하러 온 청년에게 이 오래된 냉장고의 운명이 어떻게 되냐고 말을 붙이니 파쇄기로 직진이란다. 프레온 가스만 분리하고 나머진 부순 다음 재활용한단다. 생의 마지막이 물건이나 생명이나 허무하긴 마찬가지로구나!  

 

어부인은 일정이 있어 나가야 한단다. 들어올 냉장고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텐데.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씨에 냉장고를 들어내고 다시 들이고 하는 와중에 마루와 부엌 바닥을 훔치며 든 생각이 별도 달도 따다 주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이만한 일로 찌푸릴 순 없지. 온화한 페르소나를 유지하며 ‘잘 다녀오시라’, ‘우의는 챙겼느냐’, ‘내 것이 사이즈가 넉넉하니 가지고 가시라’ 이런 유의 덕담을 보냈다. 하지만 저 깊은 무의식엔 다른 놈이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잘 쌓아서 옮긴다는 것이 아차차. 유리그릇은 깨지고 아직 괜찮은 냉동 식재료는 옮겨올 예정인 냉장고의 냉동실엔 들어가기 힘들거라 지레짐작하고 음쓰로 직행한다.

 

하여간 모든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고 새로 자리 잡은 냉장고와 벽 사이에 생긴 좁은 공간에 쓸만한 선반을 사러 동네를 어슬렁 나왔다가 마땅한 것이 없어 돌아가는 길에 와인바가 보이길래 들어와 앉았다. 

 

비오는 거리를 바라보며 별도 달도 따다 주겠다는 심정으로 산다는 의미를 되새기다

 

마음씨 착한 청년이 오픈도 하기 전에 들어온 아저씨에게 바깥 창 쪽 자리로 안내하고 한 잔을 허락하기에 비 오는 거리를 바라보며 냉장고 교체에 관한 보고서를 쓰다. 시절 인연으로 만나 한 세월을 같이 살며 지니는 여러 생각을 주섬주섬 주워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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