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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국의 걸으며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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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그리고 황금빛 키스

posted Mar 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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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호수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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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jpg

 

 

서류의 빈칸을 채워나가다가

변호사는 그 남자의 직업란에 이르러

무직이라고 썼다.

그 여자는 항의하였다. 그는 무직이 아니라고, 시인이

며 꽤 유명한 민주 운동 단체의 의장이었다고,

얼굴이 대리석 계단처럼 번들번들하던 변호사는 짐짓

웃었다. '법적으로는 무직이지요, 취미라든가 그런······?'

그 남자는 순간 한쪽 팔 떨어져 나간 문이 되었다

먼 사막에서 불어오는 황사에 섞여 우둔한 먼지가 되었다

아물아물해지는 그들의 젊은 시절

황금빛 키스

아물아물해지는 그들의 자유

황금빛 키스

이혼 사유서를 다 썼을 때

변호사는 짐짓 땀을 씹으며

처음으로 정서적인 말을 던졌다. 한숨과 함께

'걱정 마세요. 무능 아니 무직은 법적으로 이혼 사유가

되니까요'

그들은 요약되었다. 한 장의 이혼장으로

사유는 그 남자의 무직, 아니 무능

 

오늘은 길일(吉日)이다.

결혼식이 오전부터 저녁까지 빼곡하다.

여의도에서 시작한 혼사는 신도림을 거쳐 다시 여의도로 그리고 마지막은 정동 어디 가톨릭 연고가 있는 건물에서 끝난다. 두 번째 신랑신부 걸음걸이를 보며 나는 내가 달리기를 소홀했다는 걸 깨달았다. 가방엔 늘 달릴 준비가 되어있다. 오늘 들은 덕담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말씀은 부모님 용돈은 온라인으로 보내세요였다. 이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자 마지막 예식장 방문을 온라인 송금으로 대체하고 나는 달리러 갔다.

 

결혼식장을 두 탕, 트랙을 수십 바퀴 뛰고 돌아온 밤, 내 앞에 놓인 시는 강은교의 황금빛 키스

 

나이 지긋한 혼주들의 아들딸을 두고 하는 덕담을 들으며 강고한 문화를 생각한다. 예식장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삶의 편린들, 혼주들의 결혼 날짜를 호명하고, 때론 스크린으로 삼십여 년 삶의 여정을 거치기 전 앳된 얼굴의 혼주들을 마주하며 이젠 세월의 강을 건너와 다시 결혼식장에 손잡고 들어오는 늙은 신랑과 신부들..

 

달리길 잘하였다. 해가 지고 난 공기는 차갑고 트랙을 돌며 심장은 뜨거워졌다. 다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일었다. 

김영국.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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