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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국의 걸으며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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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사랑

posted Feb 0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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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때를 지난 시간.

어찌어찌하여 용산역 앞에 내려 끼니를 해결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찾아 들어간 식당은 한적하다. 앞 테이블엔 연인 둘, 옆에는 건장한 이십 대 남자 네 명이 홀에 인원 전부다.

네 명 식탁엔 소주병이 몇 개 보였으나 이십 대 청년들은 소곤댈 뿐이다.

맑은 국물을 떠먹다 불현듯 적막함에 고개를 들었다.

젊은이들은 소주를 더 시키고 모두 연기를 마시러 나갔다. 그제야 앞 테이블의 연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조용한 사랑이 식당 안에 가득하다. 손으로 눈빛으로 주고받는 그들의 언어는 경이롭다.

 

걸으며1.jpg

[용산우체국 뒤 광천옥 반반순댓국]

 

 

원고를 하나 마감해야 하고 리뷰할 논문도 있다. 읽다만 한강 책도 있고..

금요일 오후, 은밀한 장소가 필요하다. 하여 찾아간 곳에 기네스를 한 잔 시키고 잡히지 않는 글머리를 찾아 헤매다 겨우겨우 마무리하고, 남이 공들여 쓴 논문에 감 놔라 팥 놓아라 쓰잘데기 없는 군소리 늘어놓다 탈출하여 한강으로 돌아왔다.

 

밥부터 먹고,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해.

인주는 새우 초밥 하나를 집어. 아이를 길러본 여자답게 단호한 손동작으로 꼬리를 떼어내고, 휘휘 겨자를 풀어놓은 장을 찍어 내 얼굴 앞으로 내밀었을 것이다.

......팔 아파 죽겠다. 먹어.

인주의 입가에 가느다란 실주름들이, 보일 듯 말 듯한 기름한 볼우물이 패었을 것이다.

 

너는 아무래도 돌연변이야, 라고 인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곤 했다. 너처럼 예민한 사람의 유전자는 분명히, 진화과정에서 이미 도태됐을 텐데.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64~65쪽)

 

예민하지 않은 유전자는 포식자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냉정한 진화의 과정에 선택된 자들은 모두 예민을 유전자에 각인하고 대물림하였던 사피엔스 아니었던가 하며 고개를 도리도리하다 이내 조용한 사랑이 떠올라 그만 기네스를 한 잔 더 시키고 말았네~

뉴스만 틀면 나오는 허무맹랑한 말들이 이젠 대낮에도 환청처럼 울려 손짓과 눈빛으로 주고받던 그 조용함이 못내 그립기만 하다.

 

뱀발: 용산, 딴지, 도리도리 모두 현 시국과 무관한 자의적 단어 선택의 결과물임

김영국.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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