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에 우리는 국악의 소개를 보았다.
“왕부터 기생의 레퍼토리까지 포괄하는 조선의 음악문화유산, 무형문화재 또는 민족주의자들의 액세서리, 교과서에 실린 음악, 트로트, 씨름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사람 능력에 비하여 좋은 대학을 보내주는 마력의 도구, 저작권이 없어서 마구 방송되어도 되는데 인기는 없음”
이번 지면에서 또 다른 국악의 쓰임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렇게까지 국악이 뭔지 알고자 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세상 이치가 이곳에서만 특별하게 이상스럽게 돌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라 믿으며, 무언가 배울 점을 찾아본다. 스스로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존재가 자신을 포장하는 방법. (이 글은 2월 국악의 쓰임 1. 부끄러운 국악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2. 어려운 국악
국악을 시작할 때부터 국악공연장에 가면 사회를 보는 사람이 꼭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여러분, 국악이 지루하다거나 어렵다는 편견을 내려놓으세요.”
어느 순간부터 알게 되었다. 국악에 종사하는 사람들, 국악공연의 사회자 또는 국악 관련 글을 쓰는 사람들은 스스로 국악이 지루하다거나 어렵다고 느끼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편견을 내려놓으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국악이 뭔지도 모르는 또는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편견을 내려놓으라는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그 또한 지난번에 이야기 했던 스스로 가지고 있는 부끄러움 때문에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끄러움을 걷어내고자 국악은 많은 변신을 꾀해왔다. 그 부끄러움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부끄러움을 걷어내는 데만 집중한다. 사람들이 국악을 더 이상 찾지 않는 이유를 ‘국악’에서 찾으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어려운 국악을 쉽게 만들 방법을 생각했다. 그래서 서양음악의 유입 이후 100년 넘게 비슷한 류의 시도를 하고 있는데, 바로 국악의 어려움 도려내기다. 국악에서 어렵게 느껴지는 요소는 지우개로 지우고 특별해 보이는 부분에 형광펜을 칠해 강조한다. 그렇게 국악은 개조된다. 국악에 형광펜을 칠하는 부분을 예로 들면 5음을 쓰기만 하면 된다는 것 또는 음악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않고 들려오는 ‘덩기덕 쿵 더러러러’ 같은 장단 류가 있다. 가끔 이런 형광펜 칠한 부분을 더욱 강조해서 만든 음악을 들으면 나의 정신에 이 음악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결론짓는다. 그런데 국악은 왜 어려운가.
우리는 익숙하지 않아서 까다롭게 느껴지는 것들에 ‘어렵다’는 표현을 하게 된다. 이것은 매우 상대적이다. 그리고 어렵지만 매력을 느낄 수 있고, 어려워서 포기하기도 한다. 대체로 어려운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는 견뎌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굳이 또 새로운 어려움을 안으려 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쉬운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우리에게 국악은 음악이다. 현시대 음악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즐김의 속성으로 관계한다. 우리에겐 농경사회의 화합을 도모하는 일노래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제사를 모시는 음악도 필요치 않다. 스마트폰만 쥐고 있으면 언제나 나를 자극하는 많은 볼거리에 노출되니 굳이 노력하지 않는다. 심각한 애호가나 전문가가 아니라면 어려운 음악에 나를 던질 이유가 부족하다. 게다가 국악보다 서구 음악을 기본으로 한 음악에 훨씬 익숙하다는 것은 국악을 더 어렵게 느끼게 한다. 지금의 우리에게 아직까지는 영어보다 한국어가 익숙하지만 몇 년 뒤에는 달라질 것이다. 머지않아 지역어들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사라지면 그 지역어들도 거의 사라질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바로 국악이 그런 것처럼.
국악은 애호가나 전문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미숙함이나 형편없음이 그대로 공연으로 올라가고,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도 극소수다. 하지만 일반 관객들은 국악 공연이 노잼인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국악은 암묵적으로 보호받고 있고 그저 공연되면 그만이기 때문에 무대 위의 책임감 그리고 결과물의 수준이 날로 추락하고 있다. 마술공연에서 눈속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마술사는 바로 퇴출될 것이다. 그것은 너무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인데, 국악은 그렇게 지켜보는 눈이 없다. 눈을 가진 자들도 국악을 알아볼 수 없거나 국악 앞에서는 눈을 감는다.
이쯤 되면 “어려운 국악”에서 가장 어려움에 처한 것은 국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국악은 ‘어려움 도려내기’의 일환으로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잃었다. 사람들은 국악의 눈을 파내고 사지를 잘라냈다. 실험적인 무대라는 명목 하에 국악의 잘라낸 신체들이 이리저리 가서 붙는다. 잘라낸 팔은 머리위에 붙여보고 잘라낸 다리는 옆구리에 붙여본다. 아닌 것 같으면 이리저리 다른 곳에 붙여본다. 그도 생명이라고, 이제 국악의 볼에서는 손톱이 자라나고 배꼽 위에 이빨이 자라난다. 우리는 그런 걸 국악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국악의 상황도 어려워지고 국악도 어려워진다.
그저 국악기로 연주한다고, 국악인이 연주한다고 그게 다 국악이 된다면 참 좋겠다만. 기괴한 모습의 국악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미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국악이 뭔지 너무도 정리하고 싶었고, 서양음악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진 음악이라고 외치고 싶었던 1세대 국악 학자들은 이제 모두 이 땅에서 사라졌다. 얼마 뒤면 그 뒤를 이은 사람들도 사라질 것이고, 나도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국악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논리보다 감정을 채워 정리하다 만 국악이론과 그 해석이다. 음악 나고 이론 났지 이론 나고 음악 났나. 그것이 ‘어려운 국악’의 속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악은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려움에는 처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항상 생각한다. 사람이 문제다.
(다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