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국악은 전통음악을 의미하는 용어로 통용되지만 실상은 전통음악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전통음악을 흉내 내거나 전통악기로 연주한 모든 음악 예컨대 가요, 락, 재즈, 팝 등을 내포하며 혼용된다. 이러한 면에서 국악찬송은 국악이 맞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 우리가 쓰는 국악찬송은 전통음악풍 찬송, 즉, 서구음악 관점에서 만들어진 전통음악을 흉내 낸 서구음악이다. 국악찬송의 대부분은 5음계의 장조 또는 단조로 이루어져 있는 화성음악 일 뿐, 경제도, 우조도, 계면조도, 육자배기도, 메나리도 없다.
어떤 이들은 ‘찬송’인데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자칭하는, 그리고 전통음악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니는 몇십 년 동안 교회 안에서 연주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늘 불편한 마음을 겪어야 했다. 내가 하고 있는 악기는 전통음악에 최적화된 악기여서 오선보에 있는 서구음악을 구현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거니와 국악 연주를 들려달라고 하면서 내게 연주를 요청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서구음악(찬송가)을 연주할 것을 강요받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전통음악은 교회 내에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쓸모없는 음악이었다.
전통음악은 하나의 선율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음악의 좋음을 결정한다. 음들이 수평적인 형태로 나열되며 음악이 진행된다. 시나위를 보면, 각기 다른 악기들이 큰 틀에서는 거의 동일한 선율을 연주하지만, 세밀하게는 각 악기의 특성이 반영된 표현을 하며 같은 선율을 조금씩 다르게 연주한다. 이 ‘홑선율’들이 모여 만드는 선율적 입체감은 시나위가 왜 좋은지 알 수 있게 한다. 산조나 민요, 풍류, 시조, 전통가곡 등 모든 전통음악은 이 홑선율을 어떻게 연주하는지에 따라 잘하고 못하고를(좋고 나쁨을) 구분한다.
이와는 달리 서구음악은 화성체계를 기반으로 한다. 화성을 이루는 음들은 수직적 배열로 구성된다. 이 수직적이고 동시적 배열이 만들어내는 음악의 결과는 전통음악이 홑선율을 계속해서 다른 방식으로 전개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서구음악에 익숙한 우리는 전통음악의 이 수평적 전개방식이 낯설다. 뭔가 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기에 화음을 붙인다. 그제서야 우리 귀에 좀 그럴싸하게 들린다.
음정 개념 또한 마찬가지다. 전통음악의 ‘음’은 서구음악에서 정확한 수치로 고정되어 있는 음 개념과 달리 어느 정도의 범위 안에서 음이 움직인다. 이렇게 다른 개념, 익숙한 것과 다른 낯섬은 외국어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모르겠다’, ‘어렵다’로 이어지거나, 서구음악에서 기준하는 정확한 음정을 따르지 않고 시김새로 작동하는 전통음악의 음들을 체계의 ‘다름’이 아닌 음정의 ‘틀림’으로 여기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대한민국이다.
이렇듯 안타깝게도 전통음악은 서구음악양식에 기대지 않으면 더 이상 스스로 설 자리가 없다. 락이 아니면, 팝이 아니면, 재즈가 아니면, 가요의 형식이 아니면 전통음악을 찾아 듣지 않는다. 전통음악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이다. 다만 그것은 전통음악이 가진 정체성을 담보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본래의 것을 제대로 앎으로서 시작될 수 있다. 물론 피자만 먹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청국장 맛을 알기란 어렵다. 그러나 청국장 맛을 아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청국장도 사라진다. 전통음악은 이미 이러한 상황에 있다. 우리 사회에서 본래의 것을 제대로 아는 일은 전문가들의 일로만 주어져있다. 음악은 모두가 향유할 때 문화로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전통음악은 그러한 향유 없이 그저 우리 문화라는 당위와 명분밖에는 존재 가치가 없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이 글을 보는 이들에게 전문가의 영역으로만 우리 음악을 방치, 방관하지 말고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그 맛을 아는 우리 음악의 진짜 주인이 될 것을 권하고 싶다. 전통과 예배의 결합에 있어서 단지 전통악기로 연주하고 국악찬송가라고 쓰인 것을 부른다는 형식적 명분, 무조건 우리 것은 좋은 것이니까 부르는 맹목적 민족주의를 넘어 이 음악이 좋은지, 나쁜지, 왜 좋은지, 왜 나쁜지,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스스로 느낄 수 있을 때 더욱 발전된 음악문화가 교회 안팎에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전통음악 전문가들은 전통음악을 직접 노래하거나 연주하지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언어와 같이 많이 듣고 경험하여 표현을 알아듣고 그것의 좋음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을 ‘귀명창’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 귀명창들이 많아지면 국악찬송도 달라지지 않을까. 끝으로 국악찬송가의 시발점인 향린교회의 교회갱신 선언을 공유한다.
찬송가와 성가를 비롯하여 예배에 사용되는 문화적 표현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담아낼 수 있도록 내용과 형식을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구 문화의 영향이 지나치게 강한 찬송가와 성가 및 다른 예술적 표현들은 우리의 고유한 정서와 가락이 담긴 민족음악 형식의 찬송가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산출된 민중 찬송가 및 그와 같은 문화·예술적 표현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배에 사용되는 악기도 우리 것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에는 여전히 ‘어떻게’라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 이것은 전문가들만의 영역이 결코 아니다. 뜻을 같이 하는 모든 이들, 문화를 향유할 모든 이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