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영화 100편 엿보기]에 소개하게 될 영화들은 대부분 영화 평점으로 가장 폭넓고 권위 있는 메타크리틱(Metacritic)에서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인 작품들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 소개하는 <시네도키, 뉴욕>(Synecdoche, New York)이라는 제목부터 낯선 작품은 메타크리틱 평점이 67점에 불과하다. 이는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양극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네도키, 뉴욕>에 대한 많은 평가는 꼭대기를 향해 달리고 있다.
2007년 제작된 <시네도키, 뉴욕>은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뿐이었다. 변변한 상 하나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평론가들의 평가는 양분되었고, 당연히 흥행은 참패했다. 하지만 이제는 BBC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20위, 가디안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7위, 저명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Roger Ebert) 선정 2000년대 최고의 영화 1위 등 각종 영화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 위키피디아의 첫 문장은 이 영화를 “포스트모던 심리 드라마”라고 콕 집어 말한다.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표현이라 하겠다. 이 영화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 영화가 지나치게 어렵고, 가식적이며, 우울하고, 자기도취에 빠진 영화라고 비난한다. 아마도 한국 내에서는 이 영화를 접한 사람도 적을 뿐만 아니라 이런 영화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일 것으로 생각된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 찰리 카우프만 각본 <존 말코비치 되기>
이 영화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감독인 찰리 카우프만(Charlie Kaufman)의 행적을 따라가 보아야 한다. 카우프만은 또 한 명의 미국 포스트모던 영화의 대명사인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 감독이 만든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 1999)의 각본을 썼다. 이 작품으로 카우프만은 감독 존즈와 함께 미국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만들며 주목을 받았다. 연이어 역시 존즈 감독이 2002년에 만든 수작 영화 <어댑테이션>(Adaptation)의 각본도 카우프만이 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카우프만이란 이름을 널리 대중적으로 알리게 된 것은 프랑스-미국 포스트모던 영화의 같은 ‘패거리’인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 감독의 2004년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영화는 향후 [위대한 영화 100편]에 포함될 예정이다)의 각본을 쓰면서였다.
이들 ‘패거리’의 놀라운 솜씨에 흠뻑 반한 소니영화사(Sony Pictures Classics)는 카우프만과 존즈에게 호러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존즈가 또 다른 영화인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감독을 맡게 되어 이 프로젝트에서 빠져나간 사이에 홀로 남은 카우프만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마음껏 펼치는 ‘큰 사고’를 친 것이다. 이는 마치 영화 <시네도키, 뉴욕>의 주인공인 변두리 연극 연출가 케이든(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뜻하지 않게 맥아더 기금을 받게 되어 연극 ‘시네도키, 뉴욕’을 만들면서 대형 사고를 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카우프만의 감독 데뷔작인 이 영화를 본 많은 영화평론가들은 너무나 비대중적인 이 영화에 크게 실망했다. 그들은 스파이크 존즈(그는 2013년 <그녀>를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더욱 널리 알려졌다)의 재기발랄과 미셸 공드리의 달콤한 버무림이 없는 카우프만의 홀로서기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고 혀를 찼다. 하지만 존즈와 공드리가 처음의 출발선에서 많이 멀어진 대중영화 감독으로 길을 가는 것에 반해 카우프만은 꿋꿋하게 자신의 독창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끝없이 난해한 영화 <시네도키, 뉴욕>으로 인해 카우프만은 영화 속의 주인공 케이든이 자신이 연출한 연극 속에 스스로 파묻혀 죽어가듯이 영화계에서 철저하게 바닥을 쳤다. 하지만 그는 2015년 성인 애니메이션 영화 <아노말리사>(Anomalisa)로 각종 상을 휩쓸며 화려하게 재기하였고, 2020년에는 꼭 보아야 할 영화의 하나로 꼽히는 수작 <이제 그만 끝낼까 해>(I'm Thinking of Ending Things)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그가 각본을 쓰거나 감독한 영화를 줄줄이 나열하는 이유는 이 모든 영화가 하나의 맥락을 이어 나가기 때문이다.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줄기차게 ‘시간’이란 소재를 탐닉하고(<메멘토>를 필두로 <임썸니아>,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등 모두 시간에 대한 탐구이며 이는 도를 지나쳐 <테넷>에서는 다소 실족하였다), 캐나다의 대표적인 문제적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인간의 ‘몸뚱이’를 가만 놔두지 않고 이리저리 못살게 굴 듯이(<플라이>, <대드링거>, <크래쉬>, <폭력의 역사> 등) 카우프만의 영화들은 하나의 초점을 향해 돌진한다.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 또는 그것에 대한 자기 인식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은 ‘포스트모던’이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온전하게 찾거나 보전하거나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해체되고 분산되고 희미해지고 중첩된 포스터모던 시대의 인간 정체성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부하여 영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각본 또는 감독으로 카우프만의 대표작인 <존 말코비치 되기>, <어댑테이션>, <이터널 선샤인>, <시네도키, 뉴욕>, <아노말리사>,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한 편 한 편 볼 때마다 뇌가 얼얼해진다. 쭉 따라가다 보면 저 멀리 ‘나’ 자신의 정체성이 얼핏 스쳐 지나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지 모른다. 미셸 공드리 감독이 달달하게 버무려 놓은 <이터널 선샤인>은 흔히 두 남녀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쯤으로 관객들의 뇌리에 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 또한 ‘기억’이라는 실체와 그것으로 구성되는 자기 정체성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들 뿐만 아니라 이를 영상적으로 기막히게 구성해낸 수작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경우 유머와 재기가 넘치는 SF적 요소로 그저 재미 삼아 날름 삼켜버리는 것으로 족할 수도 있지만, 영국의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SF적 영화 <언더 더 스킨(Under the Skin)>(이 영화도 향후 [위대한 영화 100편]에 포함될 예정이다)만큼이나 깊숙이 인간의 삶을 뒤집어 헤쳐 그 파악할 수 없는 본질을 향해 허망하게, 그러나 끈기 있고 진지하게 팔을 휘저어보는 영화이다.
이제 <시네도키, 뉴욕>으로 돌아가 보자. 이 영화의 줄거리는 구구절절 소개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어차피 영화를 보면 복잡한 혼선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략 맛만 보자면, 이런 식이다. 연극 연출가 케이든은 어느 날 갑자기 횡재하여 마음껏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칠 기회를 얻는다. 그는 그 돈을 몽땅 뉴욕주의 시네도키라는 곳에 거대한 연극 무대를 만들고 그 안에서 ‘현실’을 그대로 모사한 연극을 실험한다. 케이든 자신의 역은 그를 몰래 따라다니던 스토커 새미가 연기를 한다. 케이든을 연기하는 새미는 다시 또 다른 배우가 연기를 한다. 케이든이 현실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연극 속의 새미가 사랑하고 결국 관계는 복잡하게 중첩된다. 이제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연극인지 분간할 수가 없게 된다. 실제로 연극은 공연되지 못하고 수년, 수십 년 끝없는 리허설만 진행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파국에 직면하여 마지막 ‘죽음’을 연기할 때에야 비로소 케이든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어렴풋이 체험한다.
이 영화는 다른 모든 것을 다 제쳐 놓더라도 2014년 애석하게 세상을 뜬 명배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Philip Seymour Hoffman)의 신들린 듯한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함을 남길 수가 있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4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것은 영화배우의 죽음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이었다. 90세를 바라보는 안소니 홉킨스나 마이클 케인이 여전히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호프만의 죽음은 그야말로 ‘요절’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호프만은 영화배우로서 특출한 외모를 가지기는커녕 작은 키에 배가 나온 평범한 마스크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그는 관객을 진저리 치게 만드는 최고의 악당(<미션 임파서블 3>)에서 가장 선량한 어린 양(<매그놀리아>)에 이르기까지, 절대적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왜곡된 신념의 소유자(<마스터>)에서, 파탄에 이른 삶을 주체하지 못해 허우적거리다가 더욱 깊은 늪에 빠지는 인물(<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 영화 <시네도키, 뉴욕>의 뭐라 정의를 내리기 힘든 해체된 정체성의 인물까지 그의 모든 연기는 소위 ‘인생’ 연기였다. 어떤 영화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 무엇보다 배우의 표정이나 몸짓 등 연기가 먼저 떠오르게 만드는 배우가 바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다. 그가 만약 살아 있었다면 그 후 또 얼마나 다양하고 풍요로우며 깊이 있는 캐릭터를 스크린에 새겨 놓았을까를 생각한다면 참으로 영화계의 크고 애석한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시네도키, 뉴욕>에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연기한 주인공 케이든이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케이든과 공간적으로 분리된 곳에서 화면이 구성되는 경우는 딱 두 번뿐인데, 하나는 기이하게도 벽의 일부에 항상 불이 붙어 있는 집을 사기 위해 한 등장인물이 둘러보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케이든의 분신 같은 존재로 영화의 마지막에서 연극의 연출을 떠맡아서 케이든에게 연기를 지시하는 여성의 사적 공간이다. 영화에 많은 조연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처럼 주인공 한 명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긴밀히 밀착하는 경우는 보통 그 영화의 내용이 주인공의 주관적 체험, 관점, 인식, 혹은 상상으로 구성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추후 [위대한 영화 100편]에 소개될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과 밀착해 있는 경우이다.)
이렇게 구성된 <시네도키, 뉴욕>은 주인공 케이든에 대한 치밀한 입체적 해부라고 할 수가 있다. 물론 관객은 그 해부를 통해 어떠한 결론도 쉽게 끌어내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어렵사리 단순화하여 케이든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어떤 정의를 끌어낸다면, 버거운 삶이 와해되는 가운데 하릴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보려는 마지막 죽음 앞에서(혹은 죽음 저편에서)의 도전이라고 표현해 보고 싶다. 사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주인공 케이든은 영화의 전반부에서 이미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온갖 병이 몸에 침투하는 가운데 아내가 딸을 데리고 베를린으로 떠나버리고 홀로 남겨져 너저분한 아내의 작업실을 병적으로 깨끗하게 청소한 그다음 장면, TV의 만화에서는 “당신은 죽습니다”라는 대사가 나오고 케이든이 바닥에 누웠을 때 그는 이미 죽은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장례식 장면이 다섯 번이나 나오고, 케이든은 늘 신문에서 부고란만을 열심히 살펴보며, TV의 만화에서조차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그러니 이 영화는 죽음 속에서의 삶에 대한 반추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시네도키, 뉴욕>을 보면서 관객이 쉽게 소화할 수 있는 매끄럽게 연결된 스토리를 구성해내려고 시도한다면 단연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그런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간도 괴이하게 진행되며 공간도 얽혀 있다. 그냥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하기 힘든 10차원쯤 되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속 편하다. 하지만 벽에 걸린 그림 하나, 소도구 한 가지, 슬쩍 지나치는 대사 한 마디, 감추어진 듯한 배우의 표정 하나조차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이다. 비록 아주 복잡하고 난해하지만 이 영화는(영화 앞부분에서 주인공 케이든이 연출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 560개의 조명 큐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대사를 통해 슬쩍 내비치듯이) 매우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등장인물 중 한 명인 헤이즐이 읽고 있는 책으로 슬쩍 언급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스완네 집 쪽으로>(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권)와 카프카의 <심판>은 이 영화에 모티프를 제공한 문학 작품이다. 20세기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심판>이 풍기는 기묘한 냄새를 <시네도키, 뉴욕>에서도 맡을 수가 있다. 뒤얽힌 시간에 알알이 박힌 섬세함의 체험은 프루스트의 자유 연상을 느끼게 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현실’을 연극에 담아야겠다는 케이든의 강박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무죄를 증명하려는 <심판>의 주인공 K가 직면한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연극의 연출자였던 케이든이 어느새 연기자로 뒤바뀌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연기로 지시받는 한 마디, “죽는다.”로 영화가 끝이 났을 때라야 죽음의 저편에서 바라본 삶의 단편들이 조금씩 색채를 가지기 시작한다. 카우프만의 일련의 작품들이 담고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인간 정체성 해부는 <시네도키, 뉴욕>에서 최고의 방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게 평가되는 이유는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알지 못한 것을 두 번째 보았을 때 새롭게 알게 되며, 두 번째에도 깨닫지 못한 의미가 세 번째 보았을 때 불현듯이 머리를 스치며, 또 계속해서 파편화되어 있던 이미지와 대사가 점점 더 ‘시네도키, 뉴욕’이라는 미지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의미를 재구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막막하던 상태에서 어슴푸레 어떤 실마리를 얻게 되는 순간, 이 영화가 얼마나 정교하게 그 실마리를 구축해내는지 비로소 감탄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영화는 이런 질문을 만든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정말로 나 자신인가?
나는 연극무대에 오를 수 있는 확실한 정체성을 가진 주인공인 된 적이 있는가?
끝도 없이 나 자신을 연기하기 위해 삶의 변두리에서 리허설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죽음 이외에 내가 나임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부잡스러운 기억의 파편들을 부실한 이성적 사고가 그럴듯하게 긁어모아 만들어 놓은 그런 정체성이 아니던가?
로로(길목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