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뒤몽 감독의 <예수의 삶>
- 뒤틀린 자유만 충만할 때 구원은 어떻게 가능한가?
올해로 140년이 되는 영화의 역사를 시대 구분한다면,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로 나누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현대영화의 기점은 흔히 1959년으로 잡는데 그것은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 잡지의 이론적 바탕으로 '누벨바그'가 시작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프랑스 영화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영화로 경향성을 퍼트리며 질적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 질적 변화란 1) 선형적 구조와 명확한 인과관계 스토리에서 비선형적 구조와 복잡한 시간 구성으로, 2) 일정한 법칙을 준수하던 촬영과 편집에서 자유로운 카메라 움직임, 점프컷, 실험적 편집, 다양한 시각 효과의 사용으로, 3) 선악의 구분이 명확하고 성격이 일관적인 캐릭터에서 복잡한 내면을 가진 입체적 성격과 모호한 도덕성으로, 4) 보편적 윤리와 가치를 강조하던 데에서 사회적 도전, 개인의 실존 등 다양한 관점의 제시로 발전한 점이다.
특히 영화감독을 '작가'로 보는 관점이 확립되었는데, 그 이전의 영화 제작 시스템에서 감독은 제작자가 고용하여 촬영 현장을 관리 감독하는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으나(그래서 동일한 영화를 찍다가 감독을 교체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제는 감독이 독립적으로 자신의 세계관과 예술관을 추구하는 예술 작가로 변모하는 경향이 대두된 것도 중요한 측면이다. 물론 고전영화 시기에도 존 포드, 히치콕, 무르나우, 채플린 같은 작가 수준의 감독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이것 자체를 <카이에 뒤 시네마>가 새로운 시각으로 '발견'한 것이다), 현재에도 수많은 영화에서는 감독의 작가성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아마도 엔터테인먼트 기술자 정도가 적합한), 작가로서의 감독이라는 관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확립한 것은 현대영화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처럼 서설을 길게 까는 이유?
<카이에 뒤 시네마>는 1951년 창간 때부터 매년 올해의 최고작 10편을 순위를 매겨 발표해 오고 있다(1969년부터 12년간을 무슨 이유인지 중단했었다. 아마도 당시 편집 책임자의 주관 때문일 듯), 그 후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1967년부터, 그리고 1990년대부터 영국영화협회를 필두로 <뉴욕 타임스>, <가디언>, <BBC> 등 유수의 언론사들이 뒤를 이었으며, 한국의 <씨네21>도 2000년대 초부터 올해의 영화 선정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카이에 뒤 시네마>가 매년 발표할 때 특정한 감독이 영화를 만들기만 하면 그 목록에 거의 포함되는 경우가 있는데 최근 10여 년간을 본다면 예를 들어 홍상수, 브루노 뒤몽, 데이빗 크로넨버그 등이 대표적이다. 홍상수 영화와 크로넨버그 영화는 가능한 대부분 보았지만 1997년 첫 장편영화를 만든 뒤몽 감독의 영화는 아직 한편도 보지 못했었다. 지금까지 주목받는 작품만으로도 15편 정도가 되는데 한국에서 개봉된 것은 4편 정도이며 그것도 아주 잠깐 상영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뒤몽의 영화를 언젠가는 좀 접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포스터를 보면 정이 가질 않았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 스타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종종 영화 스틸 사진을 보더라도 밝고 화사한 장면이 대부분이라서 도대체 왜 <카이에 뒤 시네마>가 이 작가를 집요하게 주목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어제 처음으로 (그냥 일종의 변덕으로) 다짜고짜 그의 첫 장편 데뷔작인 <예수의 삶>을 틀어버렸다. 이 영화의 포스터는 다른 영화와 달리 매우 추상적이다. 어떤 분위기, 어떤 스타일, 어떤 내용인지 종잡기가 어렵다. 뒤몽이 그 후에 잔 다르크를 다룬 영화 2편을 만들었고,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을 다룬 영화도 만들었으니 실제로 예수를 다룬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그 해석은 매우 색다르고 도전적일 테지만.
그러나 첫 장면을 보자마자 "아니군"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예측하기 쉽듯이 "예수처럼" 사는 삶 이야기 혹은 예수를 상징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쯤으로 생각이 옮겨졌다. 그러나 반쯤 보니 그것도 역시 전혀 착각이란 것을 알았다. 이 영화에 예수는 없고, 예수 비스므리한 존재도 없다. 그런데 왜 제목이 "예수의 삶"일까? 그 이유를 묻고 찾는 일은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본 후까지도 오로지 관객의 몫이고 관객은 작가 뒤몽과 심리적인 가상의 대화를 해야만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위의 한 장면이 이 영화의 분위기와 내용을 거의 다 말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저 위치에서 무료하게 있는 젊은이들의 시퀀스는 약 3분간 지속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대부분 전문 배우가 아니다.) 영화의 2/5 지점에서 추운 겨울이 (관객이 눈치채기도 힘들게) 갑자기 무더운 여름으로 바뀐다. 그럼에도 분위기과 스토리는 전혀 변화가 없이 그대로 이어진다. 이것이 이들 삶의 항상성의 본질적 성격이다.
10대 청소년인 주인공은 간질을 앓고 있다. 그가 어울리는 또래집단은 모두 불량 청소년처럼 보인다. 학생이지만 학교 다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은 딱 한 장면뿐이다. 삶의 목표도 없고 싸구려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며 자유(단지 갇혀있지 않다는 것이 자유의 본질이라면...)를 발산하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이다. 중간에 제임스 딘이 출연한 고전영화 <이유없는 반항>을 상기시키는 자동차에 돌진하는 담력 테스트 장면이 나오지만 이 영화를 <이유 없는 반항> 이후 쏟아져 나온 할리우드식 '앵그리 영 맨' 영화(경제적 풍요 속 젊은 세대의 정신적 방황과 불안을 다룬다)의 프랑스판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영화 스토리의 변곡점은 이들 집단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투실투실한 여학생을 학생들이 가득 모인 공간의 한 모퉁이에서 집단 성희롱(거의 강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이다. 그리고 영화 전편을 계속 따라오는 범죄 심리는 아랍계 학생에 대한 인종차별적 언행과 태도이다. 그 아랍계 학생의 태도와 행동 때문에 나는 뒤몽이 이 아랍계 학생을 예수에 비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잠시 착각하기도 했다. 사실 이 영화는 프랑스 북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희망과 삶의 목표를 상실한 청년들의 사회 부적응 문제, 소외된 삶으로 인한 습관적인 폭력성과 성적 욕망의 분출, 그리고 인종차별의 관습적 문화가 곰팡이가 번식하듯 좀체로 누그러지지 않는 문제 등을 까발리는 소셜리얼리즘 영화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예수의 삶"이라는 제목이 단단하게 옥죄고 있다.
결국 살인에까지 이르는 이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이상야릇하게 이들에게서 일방적으로 규정할 악을 발견하기 힘들다. 이들은 순진하기도 하고 돈독한 우정을 가지고 있고 때론 윤리적이기도 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창피해하기도 한다. 인종차별은 악행이라기보다 뿌리 깊은 문화에 가깝게 보인다. 다시 말해 이들 집단 특히 주인공을 단죄하려는 심리를 관객에게 형성시키지 않는다. 성적 욕망이 표출되고 그래서 성범죄까지 벌이지만 이들의 성 윤리는 건전하다고 말하는 것이 적합하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와 있다면서 아들에게 올라가서 섹스하라는 듯이 말해주는 장면은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은 프랑스식의 전형이다. 성교 장면에서 성기가 클로즈업되고 삽입 장면까지 잠시 보여주는데 이런 장면은 할리우드식의 에로티시즘 양념치기용이라기보다 도리어 이들의 성관계가 건전하다는 느낌까지 준다.)
뒤몽의 대부분의 영화가 그러한 것처럼(생각되는데) 모든 장면이 밝다. 그러나 햇빛이 쨍하지는 않다. 항상 밝지만 하늘은 파란색이 아니라 무채색에 가깝다. 놀랍게도 영화 전편에 걸쳐서 밤 장면이 없고 어두운 분위기의 장면조차 없다(주인공이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후의 마지막 한 장면만 빼면). 밤이 없고 낮만을 배경으로 이어가는 뒤몽 감독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 영화에서 특이한 그래서 인상적인 것은 거리에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자동차는 많이 세워져 있지만 움직이는 차는 스토리와 맞물리는 아주 분명한 목적으로 드물게 나타난다. 그러니 건물 사이의 거리든 농촌의 거리든 한산하다. 그 빈 공간을 청소년 오토바이들이 마음껏 자유롭게 질주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시그니처이다. 청소년들은 어떤 억압이나 제재를 받지 않는다. 청소년들이 마을 공동체와 엮이는 장면은 어른들과 함께 브라스밴드를 하는 정도인데 이때 청소년들은 자발적이며 이를 즐기는 모습이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종종 잔소리를 하지만 전혀 억압적이지 않고 걱정하는 마음을 표현할 뿐이다.
자. 이런 이야기가 왜 "예수의 삶"일까? 이는 작가 뒤몽이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이다. 나는 이에 대해 논리적으로 답을 말할 수가 없다. 나 또한 어렴풋한 감흥으로 겨우 추상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푸석푸석하고, 진실은 무감각하고, 악행은 본능처럼 삶속에 스며들 때, 우리에게 밝은 빛처럼 환하게 노출된 방향을 잃은 자유는 우리를 어떻게 구원(희망 또는 삶의 의미라고 말해도 되리라)에 이르게 할 수가 있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그럼 예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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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찬찬히 뒤몽의 대표작 <휴머니티>, <플랑드르>, <하데비치>, <릴 퀸퀸>, <잔 다르크>, <프랑스> 등을 찾아볼 일이 남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카이에 뒤 시네마> 이외에는 뒤몽의 영화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점이 그리 후하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로로(길목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