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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히 감독의 영화를 몽땅 보겠다는 욕심

posted Mar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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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파르 파나히 <하얀 풍선>

- 순결한 동심에서도 배제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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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란의 가장 문제적 감독인 자파르 파나히의 장편 데뷔작 <하얀 풍선>은 순수한 동심과 거기서 배제되는 쓸쓸함이 교차된다.

 

파나히 감독인 '문제적' 감독인 이유는 그의 작품 세계가 보여주는 탁월함과 더불어 3번째 장편영화 <써클>이 이란에서 상영금지된 이후 한 번도 정상적인 환경에서 영화를 제작하지 못했으며 정치적 탄압으로 인한 몇 차례 구속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이란 내에서 영화를 만들어내는 경이적인 노력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그러한 환경으로 인해 그의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의 정교한 결합이라는 새로운 영화적 방법론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2022년 <노 베어스>까지 10편 정도의 장편 영화를 만들었지만 파나히 감독의 영화가 이란 내에서 정상적으로 상영된 경우는 첫 두 편에 불과하다. 첫 두 편은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동심을 담아내고 있지만 사실은 세 번째 영화 <써클>을 향한 전주곡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는 이란의 서민들 특히 여성들이 겪어야 하는 일상적인 상황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거기다가 새해 첫날에 금붕어가 필요한 그들의 문화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새로운 문화에 차분하게 젖어들게 된다.

 

새해에 아름다운 금붕어를 원하는 어린 소녀의 마음에 우리는 쉽게 편승한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면 호기심을 갖고 쉽게 한 눈을 팔게 되는 아이의 동심은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든다. 어렵사리 엄마의 동의를 얻어 금붕어를 사러 간 소녀는 돈을 잃어버리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소녀를 둘러싼 성인들은 특별히 나쁜 심성을 가진 사람이 없다. 아이를 도우려고 하지만 자신들의 관심사로 인해 끝까지 돕지는 못한다.

 

영화의 제목이 왜 <하얀 풍선>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야 한다. 이 장면은 어떤 의미에서 영화의 반전(反轉)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는 이란에서 소수민족이 처한 상황을 알지 못한다. 쿠르드족도 있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하층민일 것이고 이방인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야 제대로 그 의미를 부여받는 '하얀 풍선'은 우리를 멍하게, 쓸쓸하게, 가슴 아프게 만든다. 동심의 문제는 갑자기 그 순수한 동심의 세계에서도 배제되는 이방인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이 아픔은 이제 파나히 감독의 다른 작품을 통해 강렬하게 확대되어 나갈 것이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거울>

- 절규하는 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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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크 다큐멘터리(fake documentary) 또는 모큐멘터리(Mockumentary)로 불리는 영화의 역사는 제법 되지만 하나의 기법 정도로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블레어 윗치>(The Blair Witch Project, 1999)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것은 관객이 진짜로 다큐멘터리인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포물인 <블레어 윗치>는 너무나 정교하여 공포의 대상이 화면에 전혀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소름 끼치는 공포를 안겨 주었다. 그 후 <클로버필드>(Cloverfield, 2008)를 비롯해 많은 모큐멘터리 작품들이 선을 보였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거울>(1997)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정확히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파나히 감독의 첫 작품인 <하얀 풍선>과 유사하다. <거울>의 주인공인 어린 소녀는 <하얀 풍선> 주인공 소녀의 친동생이기에 외모까지 비슷하다. 학교가 끝난 후 소녀는 어머니를 기다리지만 어머니가 나타나지 않자 혼자서 어른들에게 길을 물어가며 어렵사리 집을 찾아간다. 그런데 영화 중간에 깜짝쇼가 등장한다.

 

어린 소녀는 갑자기 카메라를 향해, 감독을 향해 더 이상 영화 찍기 싫다면서 소품과 분장(팔에 두른 깁스)을 집어던지고 버스에서 내려버린다. 제작진들은 모두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모르는 가운데 감독인 파나히는 소녀를 막지 말고 그냥 계속 뒤를 쫓아가며 촬영하라고 지시한다. 여기서부터는 다큐멘터리가 된 것이다. 그런데 배우로서의 소녀와 마찬가지로 '진짜' 소녀도 자기 집을 찾아가야 한다. 카메라는 간혹 놓이기도 하면서 어렵사리 소녀를 뒤쫓아간다. 마침내 소녀가 자기 집을 찾아가면서 영화는 끝난다.

 

자. 이 영화의 후반부는 과연 다큐일까? 아니면 다큐를 흉내 낸 '모큐'일까? 제목인 <거울>은 '현실'과 그것의 모사인 '극'이 어떤 관계인지, 혹은 어떤 관계여야 하는지를 웅변하는 감독의 철학을 담고 있다. 이후 파나히 감독의 대부분의 영화는 다큐와 극영화의 교묘한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그것을 통해 파나히는 현실을 담아내는 충실한 리얼리즘 노선에 굳게 서 있다.

 

영화, 즉 Motion Picture 혹은 Film은 애초에 드라마성과 다큐성을 마치 시암쌍둥이처럼 하고 태어났다. 최초의 Motion Picture인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1986),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다큐로 자리 잡았다면,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1902)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고무시키는 극영화의 출발을 알렸다. 그 후 일반적으로 영화라고 하면 극영화를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정도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자신의 굳건한 리얼리즘 자리를 내어준 적은 한 번도 없다. 단지 흥행성이 떨어져서 극장에서 상영되기 힘들 뿐이다.

 

파나히 감독은 철저한 리얼리즘 작가이다. 이것이 다른 모큐멘터리 영화와 다른 점이다. 일반적으로 다큐를 흉내 내거나 속이는 모큐멘터리는 엄밀히 말해서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다큐 형식을 채용한다. 그런데 파나히의 경우는 그 반대이다. '다큐적' 효과 다시 말해 현실을 가장 정직하게 담기 위해 모큐멘터리를 채용한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파나히는 다큐를 흉내 내는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를 흉내 낸 다큐를 만드는 것이다. 이 공식은 그 후 파나히의 작품 대부분에 적용이 된다.

 

<거울>의 후반부는 '실제 상황'이 아니라 '극'이다. 물론 정말로 소녀 배우가 영화 찍기를 거부하여 애초에 기획한 영화에서 벗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후반부는 다큐를 가장한 극영화 연출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파나히 자신이 일반 관객이 눈치채기는 힘들지만 정직하게 고백해 준다.

 

여기서 잠시 한국 축구의 흑역사를 이야기해야 한다. <거울>이 촬영된 1996년 12월 16일에 한국 축구 대표팀은 아시안컵 8강전에서 이란과 맞붙었다. 영화 <거울>이 시작될 때 라디오에서는 이 축구 경기의 중계가 시작된다. 전반전에 한국은 2:0으로 앞서 나갔고 <거울>에 등장하는 이란인들은 실망을 한다. 그러나 후반전에 한국은 무려 6골을 이란에게 내주고 참패를 한다. 이 축구 참사는 여전히 논란이 되기도 한다. 당시 홍명보를 중심으로 한 대표팀 선수와 혹독하기로 유명한 박종환 감독의 불화로 선수들이 고의로진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남아 있는 것이다. 영화 <거울>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 축구 경기가 종료되는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온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95분이니까 대략 비슷한 시간이긴 하지만 정확히 따지자면 약간 틀린 러닝타임이다. <거울>의 이러한 설정은 영화의 후반부 역시 '극'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따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며 부질없는 짓이다. 중요한 것은 다큐와 극의 경계를 허물면서 추구하는 파나히 감독의 철저한 리얼리즘 정신이다. 이것은 파나히 감독의 이후 작품을 통해서 보다 절절하게 표현된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 <써클>

- 이란에서 천진한 소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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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첫 두 작품인 <하얀 풍선>과 <거울>은 일종의 오페라 서곡이며 실험적이라고 볼 수가 있다. 다큐적 요소를 결합하는 방법론적 실험임과 동시에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의 실험이기도 하다.

 

<하얀 풍선>과 <거울>의 어린 소녀는 이제 성인이 되어 이란의 사회 환경에 던져진다. 여자로 태어나는 것부터가 마치 죄가 되어버리는 세상. <써클>에서는 대략 20대, 30대, 40대, 50대 여성들이 마치 옴니버스 영화처럼 별 관계가 없는 주인공들로 등장한다. 여성은 철저히 보호의 대상이라는(다른 의미로는 소유의 대상이 되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여성들은 숨 막히는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유지하다가 절망한다.

 

영화 첫 부분에 20대 초반 여성 3명이 갓 감옥에서 탈출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들이 왜 감옥에 가야 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의지가지없는 여성은 자신의 몸을 팔아야 하지만 율법적으로 성매매가 남녀 모두를 처벌하게 되어 있지만요 차저차 빠져나가고 여성은 감옥에 가야 한다. 영화는 매우 비관적이고 절망적이다. 아침 무렵에 시작된 영화는 관계없는 여러 여성들이 마치 바통터치를 하듯 이야기의 꼬리를 물고 가면서 마침내 밤늦게 끝을 맺는다.

 

이들을 추적하는 감독의 연출은 매우 정교하다. 첫 번째 주인공인 감옥에서 탈출한주체적인 여성은 핸드헬드 카메라를 사용해서 촬영되어 매우 동적이다. 두 번째 여성의 경우 카메라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돌리에 장착되었다. 세 번째 자신의 딸을 버려야 하는 여자의 이야기는 어두운 밤에 외부에서 진행되며, 카메라는 팬과 타이트한 클로즈업으로 정적으로 움직인다. 마지막, 가장 낙관적이지 않은 매춘 여성의 경우 카메라와 여성 모두 완전히 움직이지 않고 소리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주체적인 그래서 이상주의적인 여성이 점차 사회에서 옥죄이면서 고착화되어 가는 모습을 암암리에 전달하는 매우 기민한 연출이다.

 

이 영화는 이란에서 상영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후 파나히 감독의 영화 작업은 고난의 행군이 되었고 가택연금과 감옥을 오가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고 자기의 목소리를 영화에 담아내고 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오프사이드>

- 축구는 파나히도 춤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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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사이드? 축구의 오프사이드?

 

그렇다. 축구다. 파나히 감독이 왜 갑자기 축구 영화를 만들었지?

 

아마도 파나히 감독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를 보고 많이 의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2006년 만들어진 파나히 감독의 다섯 번째 작품인 이 영화 역시 이란에서는 상영될 수가 없었다.

 

이란에서는 여성이 축구장에 가서 축구를 구경할 수가 없다. 이 법은 이란에서의 비교적 진보적인 정권이 들어섰을 때 폐기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알고 있다. 여성이 축구장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이유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이다. 여성이 경기장에서 울려 퍼지는 더러운 고함과 욕설을 들어서는 안 되고, 온갖 음어가 쓰인 경기장 내의 낙서를 보아서도 안 되며, 안면 없는 남자들과 뒤섞여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오프사이드>는 바로 이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정면으로 꼬집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독일 월드컵 본선 티켓을 놓고 이란에서 열린 바레인과의 마지막 예선전. 수많은 축구팬들이 축구장으로 몰려드는 가운데 젊은 10대 여성들이 남자처럼 꾸미고는 몰래 입장을 시도한다. 얼마나 많은 여성이 축구장 입구의 경찰(군인?)의 감시를 뚫고 축구 구경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5명의 10대 여성은 발각이 되어 축구장 한 구석에 격리된다.

 

<오프사이드>는 파나히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써클>처럼 이란에서의 여성이 처한 상황을 비판한 것이지만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서 유머가 있고, 쾌활하고, 낙관적이기까지 하다. 이 영화는 실제로 해당 축구 경기, 그러니까 독일 월드컵 티켓을 놓고 겨룬 바레인전이 열리는 경기장에서 일부 촬영되었다고 한다.

 

축구는 이란이 승리했고, 마치 2002년 서울처럼 축구팬들은 거리에서 환호하며 폭죽을 터뜨리고 춤을 춘다. 격리되어 있던 10대 여성들은 경찰 버스로 풍기단속반으로 호송이 되는데 거리를 꽉 메운 축구팬들로 인해 길이 막힌다. 결국 버스에 있던 경찰(군인?)과 끌려가던 소녀들까지 거리로 나와 춤을 추며 행진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파나히 감독이 마음만 먹으면 그리고 그러한 조건이 마련된다면 이런 낙관적이고 유쾌한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또.

 

파나히 감독은 확실히 축구 팬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탄압하는 정권이 끝날 기미도 없건만) 이란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택시>

- 몰래카메라? 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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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히 감독은 세 번째 장편영화 <써클>(2000) 이후 이란 정권의 탄압으로 정상적인 방법으로 영화를 만들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는 감시의 눈을 피해 택시 안에서만 영화를 만들었고, 집안에서만 촬영한 영화도 만들었고, 2022년 <노 베어스>는 튀르키예와 가까운 변두리 시골에 몰래 잠입하여 주민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영화 <택시>에서 파나히 감독은 테헤란의 택시운전사가 된다. 영화는 모두택시 안에서 촬영되었다. 파나히 감독의 다른 영화와 마찬가지로 다큐와 드라마가 교묘히 엮여 있는 작품이다. 택시의 승객이 진짜 승객인지 아니면 배우의 연기인지 모호하기도 하다. 영화의 느낌은 다큐처럼 전개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택시를 탄 승객은 모두 연기자들(전문 배우이든 아니면 아마추어 또는 길거리 캐스팅이든)이다. 승객이거나 길을 지나는 사람 중에는 파나 히 감독을 알아보고 인사하거나 말을 거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이 영화의 등장인물이 몰래카메라로 찍은 다큐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택시 안과 밖의 명암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려면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카메라를 사용해야 하고 조명까지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순수한 승객이 탑승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파나히 감독이 다큐적 느낌을 주면서 오로지 택시 안에서만 촬영을 하여 권력의 감시하는 눈을 피하는 기발한 방법으로 놀랄만한 완성도의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 의식 자체는 다른 영화들에 비해 강렬하지는 않다. 어쩌면 파나히 감독을 잘 알고 그의 영화를 봐온 관객만이 달콤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인지도 모른다. 대화 중에는 파나히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오며 그런 대사들은 미소를 짓게 만든다. 대화 중에는 볼 만한 예술 영화를 언급하기도 하는데 그중에 "한국의 김기..."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김기덕 감독을 말하는 것이다.

 

파나히 감독의 조카로 등장하는 소녀가 학교의 영화수업 이야기를 하는 중에 교사가 "더러운(추한) 리얼리즘"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란의 권력이 파나히의 영화를 지칭하며 그렇게 부르는 듯하다.

 

다양한 유형의 인물들이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승객으로 등장한다. 당연히 연속성 있는 스토리가 아니라 옴니버스 영화 스타일이 된다. 파나히 감독 작품 중에서는 비교적 가볍고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영화다. 단, 이 영화를 보기 전에 파나히 감독의 다른 작품들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파나히 감독의 <3개의 얼굴들>

- 과거, 현재, 미래의 여성 또는 친절-냉담-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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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늪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파나히 감독 작품을 한꺼번에 몰아서 보고 있는 지금, <3개의 얼굴들>을 틀자마자 첫 장면에서 이 영화는 이미 봤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다음 장면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아하~ 그렇지, 하고 기억이 났지만 그다음은 역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영화를 계속 봐 나갔다. 그런데 어쩔~ 영화의 중반이 지나자 전혀 모르던 내용이 나오고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중단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인데 아마도 무슨 사정으로 인해 영화를 중간까지만 봤던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후반부는 더욱 집중해서 볼 수가 있었다.

 

이 영화는 이란 정권이 파나히 감독의 영화 제작을 금지시킨 이후에 몰래몰래 만든 네 번째의 영화이다. 이번의 경우 가장 최신작인 <노 베어스>처럼 이란의 어느 시골 오지로 숨어 들어가서 영화를 찍었다. 그 시골 오지 마을은 완고한 보수주의가 여성들의 꿈을 가로막고 숨통을 조이고 있다.

 

왜 홍상수의 영화에는 항상 김민희가 나오냐고 묻는다면 왜 파나히 감독의 영화에는 파나히 감독이 파나히 자신의 역으로 나오는지를 따져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돈이 안 들기 때문이다. 영화 제작이 금지된 후에 만들어진 <노 베어스>, <택시>,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처럼 이 영화에도 파나히는 주인공이다. 2018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파나히가 몰고 다니는 SUV는 4년 후 <노 베어스>에 그대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파나히는 줄곧 등장하기는 하지만 관찰자에 머문다. <노 베어스>처럼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놀라운 점이 하나가 있는데 파나히 감독과 함께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여배우 베나즈 자파리는 이 영화 속에서 소개되는 대로 이란의 다양한 영화와 TV 드라마에서 엄청나게 활약하는 톱스타이다. 그런 톱스타가 금지된 파나히의 작품에 기꺼이 등장한다는 것은 웬만한 배짱이 아니면 힘들 것이다. 이 여배우는 <택시>에도 깜짝 등장하여 인상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마도 자파리의 위상이 너무 높아서 이란 권력도 쉽사리 어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 이 파나히 감독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를 풀어야 한다.

 

왜 3 Faces, 세 개의 얼굴들일까? 쉽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영화 속에 얼굴은 등장하지 않지만 시골 마을에서 왕따 당하는 왕년의 여배우, 그리고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자파리, 그리고 영화배우가 되려는 꿈을 꾸며 거짓 자살 소동을 일으켜 파나히 감독과 자파리를 그 마을로 끌어들인 소녀 마르지예. 이 세 명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이란의 여성상을 상징하는 세 개의 얼굴들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아주 작은 집에서 이 세 여성이 밤에 모여 춤추는 동작을 실루엣으로 잠깐 보여주는데, 이 장면은 셀린 시아마 감독의 기념비적인 여성 퀴어 작품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에서 모닥불 주위에서 춤을 추는 여인들의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너무 평면적이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생각을 좀 더 확장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파나히가 관찰하는 대상은 세 여성만이 아니라 완고한 보수주의 마을의 주민들이다. 그들의 삶과 생각과 행동은 이 영화에서 세 명의 여성보다도 더 주도적이고 강하게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세 개의 얼굴들은 이 마을 혹은 마을 주민들에 대한 규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예의 바르다. 그러나 돌아서면 냉담하거나 도시인에 비판적이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전통에 대해 완고한 태도를 가지며 아집의 똬리를 틀고 있다. 그러니 친절-냉담-불통이라는 세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게다가 주민들 중에는 종교적이라기보다는 미신에 가까운 집착을 가지고 오로지 '번식'과 그것을 가져다주는 남성의 '정력'을 숭상하는 원시성까지 보여준다.

 

파나히가 이제까지 주로 권력을 향해 비판적 태도를 보여왔다면 이 영화는 대중의 보수적 완고함에 대해 화살을 겨누고 있다.

 

* 파나히 감독의 영화에는 페르시아어뿐만 아니라, 때로는 터키어, 아제르바이잔어, 또는 지방 방언들이 섞여서 나오는데, 이를 이란인들은 쉽게 구분하고 그것으로 인한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전혀 언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똑같은 한글 자막으로 보게 되는 것이 좀 안타깝다. 마치 우리 영화에 중국어, 일본어, 제주 방언 등이 섞여서 나오는데 영어 자막으로는 똑같이 번역되어 나가는 것과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가장 최신 영화 <노 베어스>

- 진실을 향한 파나히 감독의 진행형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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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가장 최신 영화 <노 베어스>(2022)는 2000년에 만들어진 <써클>과 함께 그의 마스터피스라고 생각된다. 이란 권력의 탄압으로 정상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힘든 파나히 감독은 튀르키예와 국경이 맞닿는 시골 구석으로 몰래 스며들어 그곳의 주민들과 함께 영화를 찍었다. <택시>(2015)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파나히 감독은 영화감독인 자기 자신을 그대로 연기한다. 그러니 자연히 다큐적인 느낌을 풍기게 된다.

 

먼저 영화의 제목이 왜 No Bears일까? 뜻은 간단하다. "곰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곰은 공포의 대상이다. 마을 사람들은 어떤 장소에 곰이 있다고 하면서 그곳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공포를 조장하지만 실재로는 곰이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권력이 인위적으로 실제하지 않는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이 곰(Bear)인데 그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다.

 

<노 베어스>는 파나히 감독이 마을 사람들과 찍는 그들의 삶에 엮여 들어가는 스토리와, 파나히가 인터넷을 통해 원격으로 연출을 하는 영화 속의 영화(액자영화) 스토리가 나란히 전개된다. 두 스토리 모두 경계(국경)를 넘으려고 하는 남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결국에는 좌절하고 죽음과 자살로 끝을 맺는다. 먹먹한 스토리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는 매우 폭넓고 깊기에 간단히 이야기하기가 힘들다. 경계의 문제, 전통과 인습의 문제, 거짓과 진실의 문제 등 다양한 논의거리가 숨어 있다. 주인공인 파나히 감독이 주민들의 삶에 얽히게 되는 문제의 사진 즉, 남녀가 나무 밑에서 함께 있는 사진을 찍었는가의 문제는, 영화를 다시 살펴보면 "찰칵"하고 찍은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파나히는 그 진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한다. 여기에 파나히 감독의 고민이 숨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럼 진실이란 무엇이며 어떤 형태로 진실은 카메라에 담겨야 하는가 라는 고민.

 

이 문제는 '영화 속 영화'를 찍던 중 여배우가 파나히 감독에게 항변하는 모습에도 고스란히 노출된다. 그 여배우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인터넷으로 촬영 장면을 보는 파나히 감독에게, 왜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겠다고 약속했으면서 거짓말(구체적으로는 파나히 자신도 모르고 있던 위조 여권)을 했냐고 항의하며 더 이상 영화를 찍을 수 없다고 부르짖는다. 이 장면 또한 파나히 감독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가, 카메라가 사실을 담아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리얼리즘에 대한 파나히 감독의 끝없는 고민과 추구는 아직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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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파나히 감독의 모든 영화를 보겠다는 욕심은 아직 채워지지 못했다. <길 위의 가족>, <닫힌 커튼>,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붉은 황금>. 일단 이렇게 4편이 남았다. 문제는 <길 위의 가족> 이외의 세 작품은 한글 자막이 없고 인공지능 번역기 자막만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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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로(길목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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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로로, 뒤몽의 영화를 처음으로 봤네

    브루노 뒤몽 감독의 <예수의 삶> - 뒤틀린 자유만 충만할 때 구원은 어떻게 가능한가? 올해로 140년이 되는 영화의 역사를 시대 구분한다면,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로 나누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현대영화의 기점은 흔히 1959년으로 잡는데 그것은 프랑스...
    Date2025.02.09 By관리자 Views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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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고전과 신작 뒤섞어서 보기

    아무리 냉담한 사람이라도 눈물을 흘리고 싶으면 이 영화를 보면 된다. 세 번째 감상할 때는 그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여지없이 볼을 타고 소금물이 떨어졌다. 누구도 부정하기 못할 사랑의 힘, 그 뒤에 숨은 노숙자 채플린의 자존...
    Date2025.01.13 By관리자 Views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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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브로커> 외 5편을 봤네

    <매드 맥스> 시리즈 - 현실에서 아포칼립스로 점진적 진화 조지 밀러 김독, 1978~2024 Metacritic Score - 79(<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Rotten Tomatoes Score -89(<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매드 맥스> 시리즈처럼 유별난 시리즈는 없다. 첫째, 이 시리...
    Date2024.12.02 By관리자 Views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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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지구 최후의 밤> 외 5편을 봤네

    <지구 최후의 밤>- 꿈과 기억의 교향곡필감(비간) 감독, 2018 Metacritic Score - 88 Rotten Tomatoes Score -93 필감 감독의 <지구 최후의 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10편의 영화에 들게 될 것이 분명하다. 도대체 스토리를 따라가기도, 나중에 재구성하기도...
    Date2024.11.05 By관리자 Views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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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부산국제영화제에서 6편을 보다!

    <증인> - 춤은 여성의 해방을 상징하는 몸짓 나데르 사에이바르 감독, 2024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모흐센 마흐말바프 바흐만 고바디 아스가르 파르하디 자파르 파나히 등등등. 이란의 대표적인 감독을 꼽자면 어떤 의미에서 한국보다 많다는 느낌이다. 한국에...
    Date2024.10.05 By관리자 Views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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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보이후드> 외 5편을 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난해하고 상징 가득한, 그러나 매력적인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2023 Metacritic Score - 91 Rotten Tomatoes Score -97 은퇴를 두 번째로 번복하고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10년 전 첫 번째...
    Date2024.09.10 By관리자 Views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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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가장 순수한 형태의 즐거움 - <사랑은 비를 타고>

    사람들이 예술을 접하는 이유는 일상생활에서는 얻기 힘든 감성적인 고양이나, 이성적인 자극, 또는 어떤 영적인 숭고를 경험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술을 접하면서 슬픔을 느끼기도 하고, 놀라움을 경험하기도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황홀함에 ...
    Date2023.01.07 By관리자 Views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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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역대 100대 영화 랭킹(2022년 발표)

    Sight & Sound 역대 100대 영화 2022년 BFI(영국영화협회) 선정 샹탈 애커만 감독의 <잔느 딜망> 2022년은 영화계에서 특별한 해이다. 그 이유는 BFI(영국영화협회)가 매 10년마다 발표하는 역대 세계 100대 영화를 발표하는 해이기 때문이다. 이 랭킹이 ...
    Date2022.12.03 By관리자 Views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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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포스트모던 시네마 - <시네도키, 뉴욕>

    [위대한 영화 100편 엿보기]에 소개하게 될 영화들은 대부분 영화 평점으로 가장 폭넓고 권위 있는 메타크리틱(Metacritic)에서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인 작품들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 소개하는 <시네도키, 뉴욕>(Synecdoche, New York)이라는 제목부터 낯선...
    Date2022.11.02 By관리자 Views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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