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낙영 조합원이 9월부터 <저물녘 하늘을 보다>라는 제목으로 새로 글을 연재합니다.
내용은 일상사에 대한 수상, 자연과 인간, 시와 소설 등의 감상이 되겠습니다.
출근길, 어느 공장 담벼락에 기대어 몸을 세운 호박 덩굴에 피어있는 꽃과 넓은 잎새 뒤에 숨어 있는 열매를 봅니다. 비록 그 자리에 심겨진 것은 그 공장의 파견 노동자인 중국 동포 아주머니에 의해서지만, 제 스스로 싹을 틔우고 자라서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제 스스로라고 하지만 사실 제가 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자연이 주는 환경에 몸을 맡긴 것뿐이죠. 저 스스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그 자신의 궁극인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는 일을 한 것입니다. 문득 ‘무위無爲의 삶’에 대해 생각합니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작위(作爲) 없이 이루는 것이죠. 공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다스린 사람은 순舜이다. 그는 다만 남쪽을 향해 다소곳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라 말한 이후 무위는 제왕의 도가 되었지만, 노자는 그것을 보편적 인간 모두의 문제로 끌어내렸습니다. 무위는 자연이라는 어휘와 합을 이뤄 인간의 도道와 덕德을 함양하고 궁극적으로 ‘걸림이 없는 삶’에 이르게 하는 하는 것이죠.
무엇인가 끊임없이 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 더구나 무엇을 함으로써 부와 명예를 좇는 현대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무엇을 의미하고, 과연 가능하기는 한 걸까요?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유신 말기의 엄혹한 시기였죠. 승객이 무심코 뱉은 정부 비판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경찰서 정문을 지나 조사를 받게 했다는 택시기사의 이야기가 미담처럼 흑백 텔레비전의 지지직거리는 화면을 장식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에 느닷없이 ‘자연보호운동’이라는 게 시작됩니다. 훗날에 ‘낙원을 가꿔 어쩌고’ 하는 ‘자연보호헌장’이라는 것도 선포되었지만, 유신 말기의 허물어져 가는 통치 기반을 다잡기 위한 ‘전 국민 동원’의 빌미가 아니었나 의심스러웠던 게 사실이죠. 물론 자연보호라고 해보았자 기껏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는 캠페인에 불과했었는데, 당연하게도 모든 행정력이 동원되어 쓰레기 줍기 행사가 대대적으로 펼쳐졌죠. 학교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는 5~6Km는 족히 넘는 태조산 각원사라는 절까지 행진을 해 가야 했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절 주변의 쓰레기를 주워야 했습니다. 그 절은 창건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으로 7·4남북공동성명의 남측 대표였던 이후락이라는 인물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후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 절에는 15m 높이의 어마어마한 청동좌불이 산등성이에 조성되어 있었는데, 한창 호기심 많은 고등학생인 급우들 사이에 그 좌불을 두고 논쟁 아닌 논쟁이 벌어졌죠.
“저 부처의 속은 비어있는 게 분명해.”
“야, 어떻게 불상의 속이 비어 있을 수 있냐. 속 빈 불상이라는 게 말이 돼?”
“그럼 저 거대한 몸집이 청동으로 채워져 있다고? 그건 말이 되냐?”
“아니, 왜 꼭 청동으로 채워야 되는데? 시멘트로 채웠을 수도 있지. 어쨌든 깡통이라는 건 말도 안 돼.”
이렇게 옥신각신 갑론을박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디서 ‘텅~’하는 둔중하면서도 맑은 소리가 기다란 여운을 잡아끌며 들려왔습니다. 모두 놀라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순간 두려움 같은 것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성음 좋은 소리꾼의 벼락같은 목소리가 산중을 뒤흔든 것이죠.
“야, 이 마구니 새끼들아. 감히 부처님에게 돌팔매질을 해?”
우리들의 답도 안 나오는 논쟁을 지켜보던 친구 하나가 논쟁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의지로 불상에 돌을 던졌던 것이고, 불상의 다급한 비명 소리를 들은 땡추(우리는 후에 그 스님을 속 좁은 땡추라 낙인을 찍었다)가 벼락같은 고함을 질러 댔던 것이다. 우리는 지은 죄가 있는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을 내리깔고 무지막지하게 내리치는 뇌성을 감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요. 땡추가 씩씩거리며 사라지자 우리는 입을 삐쭉거리며 혹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실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죠. 불상의 속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니까요. ‘깡통이네, 깡통이여. 으흐흐흐.’ 아, 철없던 시절의 치기 어린 지적(?) 욕구여.
그런데 잠시 후, 훤칠한 키에 신성일을 닮은 스님이 시나브로 우리 곁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순간 당황했고 살짝 쫄아 있었는데 스님은 장난기 머금은 미소로 조곤조곤 얘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건 논객 몇몇만 있던 자리에 어느덧 2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둘러서서 스님의 말을 숨죽이고 듣고 있었던 거죠. 이런 정적은 교실에서도 보기 드문 풍경이었을 겁니다.
“착한 일을 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아울러 나쁜 짓은 더욱 하지도 말아라.”
고등학생들의 깜냥만큼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왠지 폼나는 말이었습니다. 윤리과목에서 얼핏 스쳐 지나간 노자를 떠올리며 ‘스톤터브’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어느 수업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에라이, 돌통아!’라는 핀잔을 들었는데, 그걸 제 딴에 영어로 바꾼 게 ‘스톤튜브’인데 그만 발음이 이상해져서 ‘스톤터브’라는 이상한 별명을 갖게 된 친구였죠.
“착한 일이라면 애써서 해야 하는 거 아닌 가요?”
신성일을 닮은 스님이 그 친구에게로 다가와 악수를 청했고, 친구는 얼떨결에 덥석 악수를 하고는 얼굴이 벌게졌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음… 어떤 학생이 토요일 오후에 친구들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일부러 아침도 조금만 먹고 점심은 아예 안 먹었죠. 그런데 그걸 모르는 다른 친구가 맛있는 떡이라며 그 친구에게 먹어 보라고 하는 거예요. 처음엔 ‘괜찮아, 지금 배고프지 않아.’라며 거절을 했는데 자꾸 권하니까 화를 내요. ‘안 먹는다고 했잖아.’ 그럼 호의를 베풀던 학생은 기분이 나빠지고 그 친구를 미워하게 되죠? 자, 뭐가 문제일까요?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좋은 뜻을 가지고 하는 행동이죠? 좋은 뜻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은 내 의지가 작용하는 겁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호의이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내가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거죠. 내가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진짜는 상대방이 내 뜻대로 움직여 주길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전혀 다른 상황 속에 있어요. 그러니 나는 호의로 한 일인데 상대방에게는 강요가 되고 원치 않는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럼 의도가 깔려있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건가요?”
“저의, 숨은 의도… 숨은 의도와 숨긴 의도 모두. 그게 꼭 나쁜 의도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죠. 아까도 말했지만, 호의라도 결과적으로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애써서 착한 일을 하려고 하지 말라는 거죠.”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데, 숨만 쉬고 살 수는 없잖아요?”
평소 ‘짜라투스트라’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엉뚱한 소리를 곧잘 하던, 그래서 친구들이 검지 손가락을 들어 귀때기 위를 빙빙 돌리게 하던 ‘이디 아민’이라는 친구가 슬며시 끼어듭니다.
“자연스러움…”
“아!”
스님의 단 한마디에 ‘아민’은 비명처럼 탄성을 내지릅니다. 스님은 ‘아민’의 어깨를 두 번 툭툭 치고는
“자네는 부처님 제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네.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시게.”
‘아민’도 그곳에 있던 우리들도 뜨악한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는데, 스님은 아주 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사라져 갔습니다.
“뭐냐? 저 스님이 뭐라는 거야?”
친구들은 이제 ‘이디 아민’의 주위에 둘러서서 그를 쏘아보기 시작했습니다.
“ 에이씨,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아!’하고 똥폼을 잡으니까 더 이상 설명을 안 한 거잖아? 넌 뭔가 알아들은 거 아냐?”
‘아민’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마침 개미한테 물려서 나온 소린데?’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를 둘러싼 친구들이 모두 김이 샌 표정으로 한마디 씩 내던지니 금세 와글와글 시장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네 대굴통이 비었는지 꽉 차있는지 내가 확인해 보랴?”
어느새, 불상에 돌을 던져 이 사단을 만든 친구가 손에 작은 돌 하나를 머리 위로 쳐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순간 놀란 ‘이디 아민’이 손사래를 치며 소리쳤죠.
“아, 잠깐. 자연스러움이라 잖아. 그래, 자연스러움!”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친구들의 닥달에 당황한 그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죠.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게 되더라도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이는 걸 따라가라는 얘기지. 억지스러운 행동을 하지 말라, 뭐 그런 말 아니야? 물 흐르듯이 해라.”
“그래? 그게 다야?”
“그게 다라니. 이게 얼마나 엄청난 얘긴데. 물은 스스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멋지잖아? 안 그래?”
이상한 일이죠. 어느새 이디 아민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목소리가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때 스톤 터브가 가슴을 쫘악 펴고 어깨를 으쓱이며,
“그건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잖아. 노자 선생의 말. 저 스님이 언제 우리 책을 봐 버렸지? 뭐 어쨌건 언제나 빈둥거리며 무리라고는 일체 하지 않는 내가 노자네. 킥킥.”
신성일에게서 강렬한 햇빛을 기대했다가 부드러운 달빛의 은은함을 보고 다소 허탈해하던 친구들이, 일제히 ‘스톤터브’에게 날카로운 눈빛 화살을 퍼부어 대더니 일제히 달려들어 등짝을 내리 칩니다.
“에라이, 스톤터브야.”
“잠깐 잠깐… 이건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니야? 진정들 하라고!”
“이거야 말로 자연스럽게 용솟음치는 감정의 표현이다, 새꺄!”
“야, 야, 야, 감정이 문제라니까. 너희들 감정이 자신도 모르는 의도라니까… 이봐! 그만, 그만해!”
지금도 일을 하다가 혹은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낄 때면, 그때 각원사의 일화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리하거나 욕심을 부린 것은 아닐까. 내가 선의건 아니건 상대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인간만 부자연스러운 의도 속에 자신을 가둬 스스로 고통을 불러옵니다. 산책길에 아무렇게나 피어난 개망초며 달개비는 자족함을 압니다. 정왕천변 갈대숲에 터를 잡은 고양이는 배고프지 않으면 사냥을 하지 않지요. 그들에겐 욕심이라는 부자연스러움이 없습니다. 그게 ‘무위의 삶’이 아닐까요. 무위이위(無爲而爲)가 제 좌우명이 되어버린 까닭입니다.
오낙영(글쓴이,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