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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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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4

posted Dec 0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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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오낙영
발행호수 75

수도원.jpg

 

 

5

 

아베스라는 수도원 뒤편의 절벽 끝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잠시 멈췄다. 길게 내쉬면서 눈을 들어 협곡 너머를 보았다.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풍광이 차라리 엄숙해 보였다. 그래서 이런 곳에 터를 잡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는 느릿하게 머리 위로 솟구쳐 오르고 대기는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래, 뭐가 보이시나?

-도무지 안개가 걷히질 않습니다. 세상도, 제가 찾는 하늘의 이치도, 안개 깊숙한 곳에 터를 잡고선 길목을 닫아걸고 있나 봅니다.

꼼짝없이 앉아 코끝에 걸쳐있는 풍경을 보며 아베스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노수사는 그런 그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찼다. 아베스라는 기겁을 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마터면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고 믿었다. 그런 아베스라의 모습을 보며 노수사는 크게 웃었다.

-캘캘캘! 저기 계곡 건너편이 아조 분명허게 보이는데, 안개는 무엇이며 그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흐르는 겐고? 보아허니 안개가 아니라 거울에 묻어있는 때가 분명할 시. 현자라 참칭허는 인간이라도 보았던 겐가? 조심허시게나, 시상엔 가짜들이 득시글거리지.

노수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베스라 옆에 무릎을 세우고 쭈그려 앉았다. 그는 건너편 벼랑 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얕은 신음소리를 냈다. 요즘 부쩍 기력이 쇠해 가는지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빛은 여간 형형한 게 아니었지만 말이다.

-참 오랜만에 올라와 보는구먼. 옛날엔 이곳에서 보는 세상이 그럴듯했었더구먼.

-그땐 저 건너 풍광이 달랐었나요?

-캬캬캬! 훨씬 거칠어 보였지. 부서져 내리는 돌뎅이들이 여기저기 입석마냥 서 있었으니깐두루.

노수사의 얼굴엔 젊은 날의 기억이 눈앞에 보이는 듯 엷은 미소가 그려졌다.

-풍경이라는 건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닐 터. 그때만 해두 일백여 명이 넘는 남자들의 뜨거운 열기가 그득했었으니 황야도 그냥 황야는 아니었던 게지. 좋았지, 외려. 암, 좋았구말구.

강원에서의 오전 일과를 끝낸 견습 수좌들이 마치 해안가 절벽에 모여든 괭이갈매기들처럼 곳곳에 가부좌를 틀고 기도에 들곤 했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그들의 장한 기운이 이 계곡을 영기가 서린 곳으로 만들었더라고 노수사는 아쉬운 회고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베스라의 질문에 노수사는 한참 동안 머리를 주억거릴 뿐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찬란했던 그 시절을 담았던 잃어버린 말을 찾는 듯 입술을 움쭉거리고 있었다.

-옛날에 어떤 왕이 온갖 고난을 겪은 끝에 비로소 창업에 성공했었다누먼. 그렇게 왕국을 세우고 차차 안정이 되었겄다. 왕은 걱정을 했지. 왕국을 경영하자니 다만 창업을 위해 모든 힘을 모아 달렸을 때와는 다른 다양한 문제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속발하였던 게지. 왕이 창업의 일등공신과 창업 후에 등용한 재상을 불러 물었다네. 창업과 수성 중 무엇이 어려운가 하고 말이지. 창업의 일등공신인 장군은 할거하는 군웅을 제압하고 복속시켜야 하는 창업이야말로 진정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고, 재상은 눈과 귀를 현혹하는 전쟁의 화려한 승리는 촌부의 작은 원망에도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으며 수성이야말로 진정 고루 힘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더욱 어렵다고 말했지. 싸우고 이기는 것은 생사가 분명하게 갈리게 되는 것이므로 모든 것을 걸게 되지만, 더불어 사는 일은 한 곳에 힘을 쏟으면 다른 곳이 비게 되어 균형을 잃고 무너지게 되는 법!

-허면 무엇이 이곳의 균형을 깨뜨렸습니까?

아베스라의 질문에 노수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숨을 골랐다.

-균형을 이루는 상태를 우리는 조화롭다 허지 않는가? 그 조화 중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 간의 조화라.

노수사의 말에 아베스라는 신음 같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곳의 규율이 매우 엄격하다는 소문을 들었던 터였으므로 노수사의 말은 뜻밖이었다.

 

오래전, 출발 부족의 일단이 챠크라를 앞세우고 초원으로 돌아오자 인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문물을 가지고 사람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초원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출발 부족의 강력한 힘에 의지하려는 사람들과 그들의 야만성에 놀라 저항하려는 사람들로 나뉘었는데, 결국은 모두 폭력에 의지하게 되었다. 초원은 이제 평화가 아니었다.

계곡의 수도원도 그렇게 망가졌다고 했다. 평화로운 수도공동체에 바깥세상의 전쟁 소식이 들려왔고, 일군의 수도자들이 참전을 위해 떠나갔다. 신의 도시가 위태로우니 말씀 두루마리를 방패 삼고 기도를 위해 모으던 두 손에 칼을 모아 쥐고 싸워야 한다며 떠났다. 신의 도시가 외적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계곡 수도원에서 참전한 수도사들 가운데에서도 꽤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핏발 서린 눈을 하고 살아 돌아온 수도자들은 명상하고 기도하는 대신 몽둥이로 토괴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시는 수도원의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선배 수도자들은 물론 지도 수도자들에게까지 함부로 대했으며, 과장된 말투와 몸짓으로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는 무용담을 떠벌리기 일쑤였다.

그날에도 여느 날과 같이 그들의 행패는 계속되었다. 오후 일과가 시작되고 견습 수좌들이 선배들과 짝을 지어 명상과 기도를 위해 수도원 뒤 절벽 위 여기저기에 산개해 있었다. 그렇게 한 식경쯤 지났을 때였다. 도무지 선정에 들지 못하던 몇몇 견습 수사들조차 명상 속으로 침잠해 들어갈 무렵, 참전 수도사들의 작전이 시작되었다. 팔뚝 굵기의 몽둥이를 휘둘러 토괴 무너뜨리기를 애쓰더니, 그들 중 한 명이 명상 중인 견습 수좌들 사이를 거칠게 오가며 몽둥이로 땅을 쿵쿵 찧었다. 견습 수좌들이 하나둘 명상을 풀며 눈살을 찌푸리자, 선배 알기를 우습게 여긴다며 길길이 날뛰다가 아직도 선정에 들어있는 한 수좌를 보고는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참전용사의 행패가 거칠어 가는 중에도 그 수좌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 모습에 더 약이 오른 그는 몽둥이를 들어 수좌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순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 벌어졌고 모두 경악했다. 분명 참전 수사의 몽둥이가 명상 중인 수좌의 머리를 향해 내리 꽂혔는데 짧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 것은 참전 수사였다. 날카로운 기창(旗槍)의 끝이 그의 턱 밑 목에서 머리통을 향해 꽂혀 있었다.

 

경건한 수도공동체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노수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야기를 할수록 기진해지는 것같이 보였다. 아베스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생을 절대자의 뜻을 찾아 수도해 온 노 수사의 회한 어린 탄식에 무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신은 어찌하여 하나를 나눠 둘이 되게 하였으며, 그를 통하여 무한분열을 반복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으되, 또다시 하나를 염원하게 하였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둘러 도망치듯 떠나갔던 아이들이 온갖 무기로 무장을 하고 다시 들이닥쳤을 때 이미 우리 공동체는 끝장을 맞은 것이었구마.

노수사는 차마 꺼내고 싶지 않았을 이야기를 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손은 떨고 있었고 말은 자주 끊겼다.

-그 아이들이 다른 패거리들을 데불고 장창과 투석기로 무장한 채 협곡에 들어섰다는 걸 알아차린 강원의 수좌들이 돌과 끓는 물로 대응을 했지. 아, 공성과 수성의 끔찍한 전쟁이었어. 여기 기도하는 집에서 말이지. 기도하는 집에서 말이야.

노수사의 팔이 허공을 휘젓더니 격하게 떨기 시작하였다.

-그만, 그만하십시오!

아베스라는 더 이상 노수사가 말을 계속하게 놓아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노수사를 뒤에서 가만히 안았다. 상하의 진폭은 크고 좌우의 폭은 좁디좁은 파동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점점 파동이 잦아들면서 생기조차 약해지는 것이었다. 체온이 꺼져가고 있었다.

 

아베스라는 성전제단 앞을 파내고 있었다. 무너진 창고 건물에서 겨우 찾아낸 곡괭이는 터무니없이 닳아있었다. 바닥을 덮고 있던 판석을 들어내고 곡괭이질을 했다. 표면의 사암 덩어리를 들어내자 땅은 잘 파였다. 한 사람이 누울 만큼의 공간이 나오자 아베스라는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제단을 바라보았다. 제물다운 제물이라곤 오래전에 끊겼을 제단 위엔 노수사가 새벽에 갈아 놓았을 정한수 한 그릇과 양옆으로 깨끗한 양피지에 싸인 경전 두루마리와 낡은 양피지에 싸인 두루마리가 하나씩 놓여 있을 뿐이었다. 아베스라의 망막엔 정한수를 받쳐 들고 제단 앞으로 나아가는 노수사의 환영이 맺혀 있었다.

-아, 신이시여! 어디 계십니까.

노수사가 가뿐 숨을 몰아쉬며 생의 끈을 놓아갈 때, 숨이 흐려지는 과정마다 한 마디씩을 풀어놓았다.

-사실 말이지, 나는··· 오랫동안··· 오늘을··· 준비해··· 왔다네. 이제··· 때가··· 되었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신에게로··· 갈 수 있게··· 되었네. 저기 제단 위에 있는··· 두루마리를··· 잘 간직해 주게. 그걸··· 전해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다··· 신의 뜻이지. 천지지간의··· 유일자이신···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공동체의 이야기를 전승해 줄 누군가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훗날 누군가에 의해 이 공동체가 언급될 때, 그곳을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불어 나누어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곳을 거쳐 간··· 많은 수도자들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아··· 주었으면··· 하고···

아베스라는 노수사의 법구를 제대 앞 구덩이에 뉘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전율 같은 냉기가 입술을 통해 심장으로 관통하는 것 같았다. 그는 파냈던 마사토와 판석을 덮었다. (계속)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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