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주는 산기를 느꼈다. 힘주어 눈을 감게 하는 통증이 주기적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쥐어짜고 있었다.
-어쩌자고 이 지경을 맹글었단 말이냐.
아레주가 회임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할머니 샤들린은 크게 낙담을 하였다.
-그 옘병헐 당골 예펜네···
샤들린은 꼭 스무네 해 전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레주가 막 걷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봄 햇살이 마당 가득 그야말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는 봄의 요정 같았다. 찬연하게 빛나는 햇살 속에서도 아이의 몸은 더 빛이 났다.
지나가던 여인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탄식하듯 말했다.
-아, 아레주1) 로고!
아이의 곁에 있던 젊은 시절의 샤들린은 깜짝 놀랐다. 생전 처음 보는 여인이 아이의 이름을 어찌 알았는지 의아했다.
-이보슈. 이 아이의 이름을 어찌 알았수?
샤들린의 물음에도 아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여인이 한참 만에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 이름이 아레주라 그기요? 허! 어이 아이 그랬겠소.
여인은 부족에게 내침을 당한 초원의 떠돌이 당골이었다. 그곳 부족 사람들이 처음엔 그녀의 신통력에 열광하다 나중엔 두려움이 커져서 아예 내쫓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험상한 예언을 자주 하였고 그것은 또 영락없이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쳐진 그녀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험한 삶을 견디고 있다고 했다.
-이 아는 츠녜(처녀) 과부가 될 거이지만 천행으로 바람의 씨를 받아서 사나(사내) 아를 낳을 팔자다이···
당골의 말을 들은 그 샤들린은 소금을 가져다 그녀의 얼굴에 뿌리며 길길이 날뛰었다.
-뭣이 어째고 어째야? 그걸 저 어린것 앞에서 헐 소리라고 지껄이네? 이 엠병헐 예펜네 겉으니··· 그 지랄이니께 마실(마을)에서도 쬦겨나구, 떠돌아 댕김서 험한 꼬라지를 당허는 겨, 알어!
-내는 가즛말을 아이(안) 한다이. 내 눈에 보이는 것만 말을 한다. 저 아는 좋은 열매를 맺을 끼다. 자르(잘) 키워라.
당골은 샤들린의 패악질에 몸을 돌려 달아나면서도 기어코 할 말은 했다.
-어쩌자고 이 지경을 맹글었단 말이냐.
스무네 해 전의 일이 눈에 밟혀 샤들린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샤들린은 아레주가 열일곱 살이 되어 아미리예흐의 족장 당질과 혼인을 하게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떠돌이 당골의 말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혼례과정에서 신랑의 뜻하지 않은 사고와 죽음은, 검은 악마의 기습과도 같이 모든 것을 앗아가고 애써 잊었던 당골의 저주를 떠올리게 하였다. 언뜻 거칠어 보이는 혼례과정은 약탈혼의 풍습이 조금 남아 있어 정신 사나운 면이 없지 않았으나, 장난기 많은 신랑의 친구들이 벌이는 유희는 잔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한바탕의 북새통이 지나가고 신랑과 신부를 태운 차크라를 앞세운 요란한 신행 행렬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신랑의 집이 있는 아미리예흐를 향해 출발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 멀리 신랑집에서 신행 행렬을 맞이하는 요란한 풍장소리가 들려오자, 신랑의 친구들이 말을 달려 차크라를 에워싸고 괴성을 질러댔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앞을 볼 수 없을 지경으로 이는 먼지 속에서 말이 고꾸라지고 차크라의 바퀴가 튕겨 나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차크라를 끄는 말과 신랑 친구 중 하나가 탄 말이 충돌하는 끔찍한 사고였다. 신랑은 전복된 차크라의 바퀴 아래에 목이 깔려 즉사하고, 아레주는 천행으로 찰과상과 타박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 샤들린은 당골의 예언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고는 졸도하고 말았다.
두 번의 보름달이 차고 기우는 동안에도 달거리가 없자 아레주는 회임을 직감했다. 아직 몸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먼저 말을 탈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격하게 달리지 않고 걷게 했다. 그건 그녀의 기마습관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 위의 여름 유목지 '일라의 언덕'에 있는 초막을 청소했다. 출가한 삼촌 베흐루즈가 출가 직전까지도 정성스레 건사하던 초막이었다. 오래되었지만 특별히 손 볼 데가 있는 건 아니었다. 몇 군데 구멍이 난 벽을 마른풀과 흙을 이겨 개어 발랐고 깨끗한 건초를 가려 넉넉하게 준비했다. 그녀는 그곳을 수시로 드나들며 그 집과 주변 풍광에 익숙해지려 애썼다.
-네게 무신 일이 있는 게지?
아레주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라의 언덕'을 드나드는 것을 지켜보던 할머니 샤들린은 떠돌이 당골의 말을 떠올리곤 불안했다.
-설마···
-저는 등불을 찾았어요. 그날 '처음'을 찾아간다던 그 시님에게서 불씨를 보았거든요. 상징이 아닌 실체로서의 불씨 말이예요. 그 불씨를 나눠 가졌을 뿐이고, 제가 할 일은 불씨를 키워내는 일이예요. 세상을 밝힐 등불이 되게요.
-아레주, 네가 하는 말을 할미는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할미는 그저 네가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무렵에 찾아든 당골의 예언이 무서웠고,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기를 평생 동안 하루 다섯 번의 기도 시간에 간절하게 빌고 빌었다. 그런데도 이런 지경에 이르고 말았구나. 할미는 배운 것이 없어서, 여자란 그저 좋은 남편 만나서 사랑받고 이쁜 아이 낳고 살아야 한다고 알고 있었고, 당연히 너도 그래야 한다고 믿었지.
-내가 열 살 때 처음 엄마를 느꼈어요? 할머니도 그때를 기억하죠?
아레주의 말에 샤들린은 기겁을 했다. 아레주를 낳고 석 달을 못 넘기고 죽은 아레주의 어미를 말하는 건 금기였다. 스물을 갓 넘기고 산후통을 심하게 앓던 아레주의 어미는 혼수상태에서 마지막 며칠을 지내다 분명하지 않은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얘기는 바로 곁에 있던 샤들린만 겨우 알아들었는데, 몇 마디는 나중에 그녀의 말을 종합하여 추론한 것이었다. 그렇게 묻어두었던 일이 불거진 것은 아레주가 열 살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발육이 좋아 열서너 살은 넘어 보이던 아레주였다. 열 살 아이답지 않은 언행은 보는 이마다 찬탄을 연발하게 하였으며, 삼촌 베흐루즈가 일러준 별자리를 마당에 하나하나 그려낼 정도로 총명했다. 그날도 아레주는 마당에 무언가를 열심히 그려 넣고 있었다. 별자리인 듯 보였지만 밤하늘의 것은 아니었다. 지나가던 마을의 염쟁이 마누라가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탄식하듯 말했다.
-워매, 저 어린것이 즈 운명을 그리고 있고마잉! 즈 에미가 죽음서 운은 바꿔 놨지만서두 명은 어쩌지 못했단 걸 아는 감만? 워매 폭폭해 분거···
염쟁이 마누라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는데, 아레주가 부르는 노래가 뒤통수에 꽂혔다.
아가, 밤하늘의 별이 낮엔 보이지 않아도
그렇다고 별이 사라진 건 아니란다
보이지 않는다면 마음으로 느끼면 돼
만질 수 없다면 네 몸을 열어 맞이하렴
염쟁이 마누라는 기겁을 했다. 열 살 아이의 노래라곤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늬는 이걸 누구헌티 배웠당가?
-우리 엄마!
-엄마? 늬 엄마가 갈켜줬어야?
염쟁이 마누라는 처음엔 어린 아레주가 엄마를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생각했다.
-근디 그거이 무신 노래라냐? 느그 엄니가 언제 갈켜줬다냐?
-울 엄마가 아레주의 노래랬어! 내가 잠을 자려고 눈을 감으면 창문으로 별빛처럼 내려와서 밤마다 불러주고 놀아주고 그래.
아레주는 엄마가 밤마다 별빛을 타고 찾아와서는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고 믿었다.
염쟁이 마누라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아레주의 이야기를 철없는 아이가 꾸며낸 이야기로 치부하고 말기에는 어떤 기운이 작용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초원의 떠돌이 당골이라면 알 수 있을 테지만 함부로 그녀를 언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십여 년 전 초원에서 쫓겨나 떠돌던 당골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아레주의 할머니 샤들린에게 치도곤을 당하고 도망치던 당골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한 게 염쟁이 마누라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멸시 아닌 멸시를 당하며 사는 처지가 비슷해서 그저 숨돌릴 여유를 주려고 했던 것뿐이었는데, 제 설움에 눈물을 펑펑 쏟아내던 당골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푸념처럼 쏟아내었던 것이었다.
-자네 여그서 뭣 허능가?
아레주를 보며 풀기 힘든 문제를 마주한 듯 상념에 잠겨 있던 염쟁이 마누라를 보고 샤들린이 의혹에 찬 눈초리를 하며 물었다.
-애기씨가 노래를 부르기에 뭔 노랜가 듣고 있었을 뿐이었소.
염쟁이 마누라는 아주 조심스러워했다.
-노래? 아레주가?
샤들린은 의아했다. 애들이 소꿉놀이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야 일상적인 일일진대 그녀가 보기에 염쟁이 마누라의 표정이 심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 들어 보셨소? 노래가 아주 기맥히오. 즈 어매가 갈켜줬다고 험서 부르는 디 아조 절창이요, 절창!
염쟁이 마누라는 과장되게 탄복하는 투로 말하고는 샤들렌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니 쏜살같이 사라졌다.
샤들렌은 처음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레주는 한 번도 제 엄마에 대해 물은 적도 없었는데, 염쟁이 마누라는 '즈 어매가 갈켜줬다고 험서'라며 힘주어 말했기 때문이었다. 샤들렌은 불안한 마음이 커져만 갔다. 아이가 자라면서 어떤 힘과 조응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레주의 어미가 숨을 거두면서 남긴 말이 샤들린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었다.
'나는 우리 아레주의 명을 바꾸기 위해 가오. 쉽지 않은 일이오마는···' 여기까지가 비교적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고, 뒤 구절은 힘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천기를 밝히는 것을 막는 힘이 작용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웅얼거림이었다. 시간을 두고 추론하기로는 아마 아레주의 미래에 대한 예언적 수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하였고, 아레주의 어미가 제 딸을 위해 자신의 명을 담보하였다고 믿게 되었다. 아레주라는 이름도 결국 아레주 어미의 마지막 말로 인해 그녀의 작명이 되었던 것이다.
샤들린은 아레주에게 차마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레주, 저 염쟁이 마누레가 너헌티 뭔 짓을 헌 겨?
아레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내가 놀고 있는데 와서는 쳐다보구만 있었어.
-뭐 하고 놀았는 디?
-그냥, 엄마가 가르쳐 준 노랠 부르면서 별을 그리고 있었지. 나하고 똑같은 아이가 살고 있는 별이야. 엄마가 나를 떠나서 그 애에게 간 것은 그 애가 내 명운을 틀어쥐고 있어서랬어.
어린 아레주의 말에 샤들린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아주 빠른 속도로 빙빙 돌아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이제 할머니도 맘 편안하게 저를 지켜보세요. 전 암시랑토 안 헝게!
아레주가 입에 붙지도 않는 사투리까지 써가며 샤들린을 위무했다.
-그려, 그려야제! 늬가 누군디!
샤들린은 더 이상 떠돌이 당골을 증오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미욱해서 별은 생각두 않허고, 땅의 일만 바라보고 있었던 겨.
그해 동짓날 새벽에 아레주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샤들린은 여름 목초지 일라의 언덕에 있는 여름 초막에서 어느 때보다도 분주하고 활기찬 겨울을 보냈다. 이제 밤은 그 억센 기운을 조금씩 잃어갈 것이었다. (계속)
오낙영(글쓴이,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