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대가 토마스 수사를 해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소. 물론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말이오.
야곱은 눈길을 멀리 협곡 너머로 얹으며 말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도의 복장을 한 낯선 사람이 아니오?
아베스라는 야곱과 시몬을 번갈아 보았다. 야곱은 다듬어지지 않은 수염이 거친듯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으나 서글서글한 눈매가 어느 정도 그걸 상쇄하면서 묘한 친화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반면 시몬은 야곱보다 체구도 작고 콧등과 눈 밑에 주근깨가 있어 장난꾸러기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떠날 당시보다 쇠락해 버린 이곳의 모습에 착잡해 하였고, 토마스의 부재에 충격을 받은 듯하였다.
-아니오. 이건 아베스라 당신이 가지고 계시오.
아베스라가 토마스 수사가 남긴 친필 두루마리를 건네자, 야곱은 손사래를 치며 말하였다.
-그대가 말한 대로 이 두루마리는 토마스 수사의 개인적인 소회를 적은 문건이고 그분이 당신에게 남긴 것이니 받을 수 없소.
-하지만 비록 개인적인 차원의 문건이나 이곳의 역사를 기술해 놓은 것이니 공동체의 유산으로 봐도 좋지 않겠습니까.
아베스라의 말에 야곱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히 그래야 할 것 같지만, 지금 우리의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애초에 절벽공동체, 우리를 탐탁지 않아 하던 소위 예루살렘파들이 부르던 비아냥 섞인 호칭이죠, 절벽공동체가 와해된 후 페르세폴리스와 수사의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난상토론이 있었죠. 한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던 형제들의 공격으로 무너진 초유의 사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비슷한 유형의 사태에 대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의 설명에 따르면 절벽공동체의 와해가 페르시아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성전 지도자들에게까지 큰 충격을 준 듯하였다. 비록 그들은 절벽공동체를 고까워하지 않았지만, 기도공동체가 그런 식으로 무너지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진상을 정확히 규명하고 기록으로 남길 것을 결의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대사제의 결정문을 들고 내려온 사제와 수사와 페르세폴리스의 사제가 조사를 시작했지만, 애초에 절벽공동체에 대한 시각이 달랐기 때문에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예루살렘에서는 대성전 밖의 사제공동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했어요. 더구나 절벽공동체가 사제도 아닌 일반인들을 수도자로 받아들였던 것에 분개했지요. 키루스 대왕의 칙령으로 예루살렘에 귀환하게 된 그들은 순혈주의자들이죠. 심지어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동족들조차 더럽혀진 피를 가졌다고 핍박하지 않았겠소? 그러니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절벽공동체의 와해과정에 대해 사실은 다행이라 여긴 사제들도 있었던 겁니다.
관점의 차이는 건조한 결과물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첨예한 시각은 제외되었고 많은 증언이 다만 유대적 시각, 정확히 말하자면 예루살렘 귀환파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작성된 공식 문건 외의 어떠한 사적견해를 기록한 문건을 인정하지도 보유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페르시아 교단의 사제들은 분개했고 예루살렘에 대한 반감만 커져갔다.
-이제 우리가 토마스 님의 기록을 받아 갈 수 없는 이유를 아시겠수?
시몬이 어깨를 움쭉거리며 말했다.
-두 분의 입장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겠습니다만, 예루살렘과 페르시아의 갈등에 대해서는 도무지 감이 오질 않는군요.
아베스라의 말에 야곱과 시몬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멀리 동쪽에서 온 이방 사람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얘기할 수 있을지 난감했던 모양이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야곱이 입을 열었다.
-아베스라 당신은 우리 선조들이 바빌론에 끌려왔던 이야기를 아시오?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그럼 키루스 대왕이 바빌로니아를 평정하고 새 왕국을 세웠을 때, 우리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한 얘기는 알고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돌아가지 않고 남았다는 것도요.
아베스라의 말에 야곱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시몬이 끼어들었다.
-그들과 함께 남아 있기로 결정한 게 지금의 수사와 페르세폴리스의 사제들이우. 돌아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곳에 남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신앙생활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 거유.
-그게 문제가 되었다는 건가요?
-귀환파의 생각은 이곳은 결국 남의 땅이라는 거유. 예루살렘이야말로 주님이 주신 성스러운 곳이고, 그곳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야말로 모든 유다인들의 소망이요 책무라고 여겼던 게유. 그러니 이곳에 남아야겠다는 사람들을 곱게 볼 리 없었던 게지,
귀환파들은 이곳에 남겠다는 백성들을 두고 갈 수 없다며 많은 사제와 서기관들이 잔류를 선택하자, 격한 감정을 드러내며 비난했다고 한다. 예루살렘 복귀를 둘러싼 갈등은 이미 다른 양상으로 잠복해온 두 갈래의 신학적 지향점이 충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제로 끌려 온 사람들은 처음엔 낯선 환경과 지배국의 강압에 적응하느라 자신들의 처지를 헤아려 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 아닌가.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기자 일군의 사제와 서기관들에게서 그들이 처한 현실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서 문제를 찾기도 하였고, 페르시아를 비롯한 초승달 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를 창조적으로 수용하려 하였다. 또 페르시아의 종교인 마즈다야스나(Mazdayasna)1)의 사제인 마구쉬(Magush)들로부터 그들의 경전인 아베스타와 교리를 전해 들었다. 이들은 그 모든 것을 참고하여 언젠가 돌아가 다시 하나님의 집을 짓게 되는 날에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새로운 책을 편집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유대순혈주의를 표방하며 백성들을 다잡기 시작했다. 오랜 유배 생활에서의 삶의 조건은 유다의 전통적 생활양식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들과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진 부류는 외부에서 주어진 상황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기도와 영적 체험을 통해 새로운 삶의 조건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제와 서기관 중심의 성전중심체제의 가치는 효용성이 다했다고 여겼으며, 기도공동체 운동으로 시작하여 유배공동체에 새로운 신앙의 기운을 불어넣고자 했다. 그래서 페르세폴리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린(Zarrin)의 황량한 협곡절벽 위에 수도원을 마련하고 수련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혹독한 3년의 수련기를 거쳐 입회청원을 하게 되며, 엄격한 심사를 통해 입회가 결정되면 비로소 관상수사가 된다. 10년 후 관상수사는 지도수사가 되는데 일부는 예전을 주관하는 사제의 길을 겸할 수 있다. 물론 초기에는 이미 사제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지도수사 겸 사제로 견습수사들을 지도하였다. 후일 귀환파의 주류를 형성한 유대순혈주의자들이 이들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은, 사제가 아닌 자들까지 수련생으로 받아들인 것을 심각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양측 간의 긴장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고, 격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예언자 전통을 가진 종교로선 뜻밖이군요. 아, 사제가 아닌 사람을 수련생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에 분노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베스라의 말에 야곱이 엷은 미소를 띠었다.
-예언자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사제는 아니지만, 신으로부터 직접 선택된 사람이니 어떤 면에서는 사제 이상의 카리스마를 갖지요.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 전통을 가진 공동체가 어째서 사제 아닌 사람의 수도직(修道職)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야곱은 이방인 아베스라의 말에 대꾸하는 것이 신기루조차 보이지 않는 사막을 걷는 것같이 지리하게 느껴졌다. 쐐기가 필요했다.
-권력의 속성이지요. 성전체제는 사제계급의 공고한 권력을 통해 유지되었고, 또한 사제들은 성전체제에 충실하게 복무함으로써 그들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들이 볼 때 예언자는 일회적 존재에 불과한 겁니다. 특정 시기에 등장하여 활동하다 사라지는 존재니까요. 그런데 사제가 아닌 수도자를 제도적으로 혹은 공식적으로 양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겁니다. 권력은 크기에 상관없이 나눠 가질 수 없는 겁니다. 나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도그마와 조직이지요.
야곱은 말을 마치자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시몬도 당황한 표정으로 급하게 일어섰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소. 그래 아베스라 당신은 여기 더 머물 작정이신 게요?
야곱은 폐허가 되어버린 수도원 경내를 한 번 둘러보더니 이내 발걸음을 옮기며 시몬을 향해 말했다.
-시몬, 나는 전에 말한 것처럼 아스판다나(이스파한)로 가네. 거기 들렀다가 수사로 갈 것이니 거기서 보세.
-알겠수. 함께 가면 좋겄수만, 개인적인 일이라 허시니 수사에서 뵙두룩 헙지요.
시몬은 야곱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야곱은 시몬을 껴안고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는 곧장 문기둥처럼 서 있는 토괴를 지나 협곡 아래로 내려갔다.
-야곱은 참 좋은 사람이우. 예루살렘에서 과격한 개혁파 인물루 견제를 허고 있어서 많이 힘들기두 했지.
시몬은 야곱이 사라져간 자리를 섭섭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내가 바로 사제가 아닌 사람으로 수도원에 입회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우. 많이 힘들었지. 그때 힘이 되어 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은 사람이 야곱이라우. 사실 그는 바빌론에 끌려 온 좋은 사제가문의 후손으로 말하자면 유력한 재바빌론 유대인2세인 게죠. 그의 부모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면 그는 폼나는 사제가 될 수 있었을 거요.
아베스라는 시몬의 얘기를 들으면서 문득 사형 아흐마나가 생각났다. 그는 진리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유연하게 변화하지 못한다면, 결국 화석이 되거나 다른 교의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며 스승을 압박하곤 했다. 고원 너머엔 마즈다야스나가 광풍처럼 세상을 뒤덮고 있고, 동쪽에서는 베다의 가르침과 샤카의 또 다른 교의가 큰물이 되어 초원의 식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는 아그레의 외연이 더 커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아까 야곱은 나뉘는 것은 도그마와 조직이라 했는데, 예루살렘과 페르시아의 교단은 아직 하나인 게죠? 그러니 여전히 이곳 수도공동체의 와해에 공동조사를 한 것이고요? 이견이 없지 않은 듯합니다만.
아베스라는 서늘한 바람이 협곡 아래로부터 불어오는 것을 느끼며 딱히 시몬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시몬 역시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여긴 듯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심호흡 끝에 신음처럼 말을 쏟아 냈다.
-계륵이거나···, 두려움 혹은···, 애증?
시몬의 얘기에 의하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귀환파들은 그곳에 남겨져 살아가던 유다인들을 종교적으로 혹은 혈통 면에서도 혼혈인으로 여겨 혹독하게 탄압했는데, 이면에는 강제이주 이전의 기득권을 되찾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시간을 가진 후에야 바빌론에 남아있던 동족들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예루살렘 대사제의 권위가 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아울러 같은 교의가 통용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키루스의 포용정책이 가져온 영향으로 현지화와 더불어 상당히 유연한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던 페르세폴리스의 유대 사회와 종교는 순혈주의와 폐쇄적인 모습으로 빠져들어 가기만 하던 예루살렘의 그것과는 이미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페르세폴리스에서도 굳이 예루살렘과 각을 세워 대립할 필요는 없었기에 그럭저럭 교류는 있었다우. 헌데 자린(Zarrin)의 수도공동체, 흔히 절벽공동체라 불리는 그곳의 일이 벌어지자, 어쩌면 자신들의 영향력을 시험할 기회라 여겼던 것 같수.
시몬의 말을 들으니 대강의 사정은 이해되었으나, 아베스라에겐 의아한 게 있었다. 페르세폴리스의 유대교단이 굳이 예루살렘 대사제의 결정을 그대로 받아들인 적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물으시우? 페르세폴리스라고 해서 하나의 의견만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허신 게유? 우리가 예루살렘과는 좀 다른 모습으루 변화하긴 했어두 여기에두 친예루살렘파는 있으며, 그들이 여전히 공동체의 주류라면 이해가 되시겄수? 그들은 자린의 실험을 묵인하고 있었던 거지 공식적으루 승인하지는 않았던 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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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인들이 자신들을 일컫던 말로 '마즈다예배교'라는 뜻이다.
오낙영(글쓴이,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