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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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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0

posted Jun 0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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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오낙영
발행호수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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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름지기 인간이라 허는 존재는 그 성품에 걸맞은 신을 머리에 이고 사는 게라. 허믄 신은 또 어떠한 갑? 그도 자신과 이어진 인간의 성깔머리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이 말입지. 따라서 자신을 갈고닦어야 허는 이유는 충분허지 않은 갑? 내 수양의 정도가 내 신의 모습을 맹그는 게니까!'

제자들이 정진하는 모습에 조금의 틈이라도 보일라치면 스승은 여지없이 날카로운 질책을 독을 바른 화살처럼 쏘았다. 그 화살에 가슴을 과녁으로 내어준 제자는 온몸에 퍼져가는 스승의 독에 제 몸속의 나태와 안일을 불태워버리고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아베스라는 그런 스승의 모습이 경외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낌새를 눈치챈 스승은 까마득한 고공에서 날개를 접어 사냥감에 내리 꽂히는 독수리 마냥 가차 없는 일격을 날렸다.

'여게, 아베스라여! 스승이란 게는 강을 건너는 배일 뿐 입지. 강을 건넜다면 배를 버리고 제 길을 가야 허는 벱. 지아무리 그 배가 마음에 들지라도 거그 기냥 머무르는 것은 저 자신과 스승을 동시에 죽이는 행위다 그 말입지.'

스승의 말에 아베스라는 자신의 소갈머리가 터무니없이 좁아터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절망했다. 도무지 강 위의 배를 떠날 오지랖이 못 되는 초라한 모습의 왜소한 서생이 보였던 것이다.

-시생, 서쪽으로 두어 해 여행을 할까 합니다.

얼마 후, 아베스라가 스승에게 여행계획을 이야기하자, 스승은 비 온 뒤 갑자기 피어나는 사막의 꽃처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흘헐헐, 겔국에는 세상 귀경을 떠나겄단 말입지? 좋은 겡험이 될 것이고만. 해 줄 말이 무에 있겄는가만서두, 여정 내내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 것이며, 보이지 않는 바에 주눅 들지 말기를 당부합지.

스승은 소풍 가는 자식 보내듯 즐거워했다. 아베스라는 그렇게 초원을 나왔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베스타의 눈에는 여전히 황량하기 그지없는 광야가 껄끄러웠다. 생기라곤 전혀 없는 건조한 길을 걷다 보면 초원의 싱그러운 풀 냄새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인가도 없는 광야를 며칠씩 걷다 보면 육신은 어느덧 사라지고, 가물거리며 흐려지는 영혼만 겨우 감지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문득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혼의 심지를 눌러 끄고 싶어지기도 한다.

'풍경은 눈 감으면 사라지겠지만, 그대 가슴속에 담긴 원(願)일랑 부디 꺼뜨리지 마옵소서!'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아레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베스라는 정신을 차리고 사라진 육신을 되돌려 놓는다. 허리춤에서 물주머니를 끌러 입을 적신다.

'아베스라의 걸음걸이로 보자먼, 여기서 한나절 조금 지나서 신기루처럼 원뿔 모양으루 생긴 집들이 보일거유. 거길 찾어가먼 될 터인디, 그게 보이고 나서도 반나절은 더 걸어야 할 거니 발걸음을 너무 조급허게 허진 마슈. 그럼 쉬 지쳐버려!'

파타베흐라는 곳을 지나 헤어지면서, 시몬은 아베스라가 찾아가야 할 곳의 풍광을 설명하며 절대 발걸음을 조급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지평선 위로 떠 오르는 풍경은 거리를 가늠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베스라는 시몬의 우정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런 형태의 집은 원래 하란 지방의 것인디, 아오슈나르가 니루샤라 불리는 사람들을 위해 지었다우. 니루샤가 뭔고 하면 이곳에서 최하층 계급으루 여성들을 일컫는 말인데, 아오슈나르가 행복과 기쁨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란 의미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헙디다. 그 냥반이 하는 일이 그거유. 니루샤에게 행복과 기쁨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돕는 거. 그가 일허는 모냥을 보먼 기이허기도 헐것이니 놀라진 마슈. 그를 보거든 부디 내 안부도 전해 주슈.'

시몬은 헤어지면서 아베스라의 두 손을 잡고 기도를 해 주었다. 아베스라는 토마스 수사에게 배웠던 대로 '아멘!'하고 화답을 하였다.

 

메마른 대지에 내리꽂히는 햇살의 폭력은 황야의 나그네를 지치게 할 뿐만 아니라, 풍경조차도 헐떡거리게 한다. 뜨겁게 달궈진 대지가 내뿜는 가쁜 숨이 오히려 대기의 열기를 희롱하며 허상을 허공 중에 매어 단다. 신기루다. 현혹되지 말지어다, 아베스라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떴다. 시몬의 말대로 반나절 걸음을 나눠 계산하여 걷기로 했다. 그러나 얼핏 얼핏 눈에 들어오는 헛그림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눈에 들어와 상이 맺힌 그림은 잔상으로 존재하기도 하고, 짧은 기억의 저편에서 슬그머니 흐릿한 모습으로 숨어 있다가 불현듯 또렷하게 드러내곤 하면서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세상에 어디 헛것이 신기루뿐일 것인가. 실체를 가진 것들도 헛삶을 사는 바에야 허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베스라는 뜨거운 열기에 지쳐가는 정신이 망상에 깃들지 않도록 애를 써야만 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서 심호흡을 한다. 그러면 뜨거운 공기가 폐부를 한껏 부풀게 한다. 서둘러 숨을 내쉬어 터질 것 같이 부푼 가슴을 진정시키고 헛웃음을 짓는다. 밤하늘을 수놓던 별자리가 느닷없이 정수리를 타고 내려와 눈을 어지럽힌다. 흐릿해져 가는 정신 너머로 꿈결에선 듯 방울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끼며, 아베스라는 가까스로 몸을 세워본다. 아베스라가 지나온 길을 따라 몇 마리의 낙타가 한 줄로 늘어서서 오고 있었다. 두 개의 봉우리가 우람한 낙타는 열풍을 가르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같았다.

-어디를 가겨신디 혼자 길을 나섰능게라?

낙타가 만든 그림자를 타고 오던 중늙은이가 먼저 아는 체를 했다. 그을린 얼굴에 그려진 굵고 짙은 주름이 청동 방패에 새겨진 전투의 흔적처럼 완연했다. 고단한 삶으로 단련된 단단함이 깡마른 체구에 배어 있었다.

-세피다르 근방으로 가는 길입니다.

아베스라는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입성을 보아허니 우덜 같이 험한 일을 허는 사램은 아닌 것 같소잉, 하마 시님이신게라?

자신의 눈썰미에 확신을 가진 그는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렇습니다. 만행 중인 수행자라오.

아베스라의 대답에 아주 만족한 그는 낙타 옆구리에 걸린 자루를 뒤적거리더니 말린 대추야자를 한 움큼 꺼내 아베스라의 두 손에 쥐여 주었다. 그는 눈빛으로 어서 맛 좀 보라는 재촉을 했다. 아베스라가 미소를 지으며 대추야자를 한 개 입에 넣자, 그는 아베스라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해 죽겠다는 듯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슬그머니 장난기가 일어난 아베스라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자 이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곧 진저리를 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주자 붉은 잇몸까지 드러내며 큰 소리로 웃었다.

-워매! 시님은 참으로 장난꾸러기요잉. 그라제요, 이건 맛이 없을 수가 없당께요. 정성이 월매나 든 것들인디······.

아베스라는 참으로 오랜만에 사람으로부터 번져 나오는 졸박한 온기를 느꼈다. 신이 인간을 처음 빚어내었을 때의 모습이 그랬을 것이다. 그 처음의 모습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아베스라는 낙타 몰이꾼의 얼굴에서 처음 사람의 원형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배우지 않았으되 천성을 간직한 사람이 있고, 배웠으되 천성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이 있다. 또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성품이 왜곡되어 있는 사람이 있으며, 배웠지만 스스로의 욕심에 영혼을 내어준 사람이 있다.

'그러니 백척간두에 서 있듯이 절박허게 수행을 해야 허는 겝지? 그리허여 각행(覺行)을 손바닥 안에 잡아야 허는 게라. 먼저 깨닫고, 바른 말을 허고, 바른 생각을 허며, 바른 행동으로 이어가야 허는 겝지. 허나, 수행이라는 게는 말입지, 겔국은 처음에 하늘로부터 거저 받은 그 성품을 되찾는 게라. 흐려지고 더럽혀진 거울을 닦는 게란 말입지.'

깨닫고 실천하라(覺行)는 스승의 가르침은 수행의 제일의가 되었으나 깨달음부터 벽에 부딪히고 경계에서 방황할 뿐이었다. 본래면목을 찾아가는 길은 초원의 야생마를 잡아 길들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 이 낙타 몰이꾼은 처음의 성정을 간직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하늘 사람이 아닌가.

-존장께선 엘람 사람이신가요?

아베스라의 질문에 낙타 몰이꾼은 눈이 커지더니 피식하고 웃었다.

-존장은 무신, 걍 무지랭인디. 그라고 엘람 사람, 아르얀 사람 따지는 건 높은 냥반들 허는 짓거리지, 우리 겉은 무지랭이들 헌티는 아모 의미도 없지라! 바람에 날린 씨앗이 바람이 멈춘 곳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원래 그곳에 있던 것의 꽃가루를, 벌 나비의 도움으로 받아 열매를 키우먼, 그거이 무신 종이겄소. 사램도 마찬가지 아니겄소잉. 시님이 지를 엘람 사람으로 보았듯이 조상은 분명 그랬던 모냥이지만서두, 이런저런 부족과 종족과 섞여 시방의 지가 있지라. 그란데두 엘람 사람으루 부른다먼 으짤 수 없는 일이지만서두 말이여잉.

아베스라가 무심코 물은 말에 낙타 몰이꾼은 정색을 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베스라는 민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 낙타 몰이꾼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걸어온 쪽을 돌아보더니 엎드려 귀를 땅에 가까이 대었다. 그러더니 서둘러 낙타들을 언덕 아래쪽으로 몰아 내려갔다.

-시님두 이짝으로 내려오시오잉.

낙타 몰이꾼은 낙타들을 앉히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저렇게 급한 말발굽 소리는 아모래도 불길허고만이라. 우릴 못 보고 지나치길 지둘러야 헐 것 같소.

-무슨 일이죠? 전 아무 낌새도 못 느끼겠는데요.

아베스라가 의아스러워하며 묻자, 낙타 몰이꾼은 오른손의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 여러 마리가 이짝으로 달려오고 있소. 저렇게 급허게 달리는 걸 보먼, 먼 일이 있는 게 분명하고만이라. 마주쳐봐야 공연히 성가신 일만 있을 거이니, 몸을 숨기는 게 좋을 것 같소잉. 금방 지나갈 것이요.

낙타몰이꾼이 말을 마치자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시 후, 급하게 달려오던 일행이 말을 세우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저희끼리 몇 마디 주고받곤 다시 달려갔다. 그 순간 낙타 몰이꾼의 목울대가 울컥하더니 꼴깍하고 침 넘기는 소리가 났다. 그게 민망했던지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워매! 참말로 간이 오그라들다 터져 부는 중 알었소.

그는 낙타들을 일으켜 세우며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었다.

-아모래도 안 되겄소잉. 시방 저쪽에 먼 일이 있는 것 같응께, 시님허구 지허구 같이 있다 저것들 헌티 걸려뿔먼, 시님은 저 땜시 곤혹을 당헐 수 있고, 지는 시님 땜시 난처헐 수 있응께 인자 여그서 갈라져야 되겄소.

낙타 몰이꾼이 못내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아베스라는 도무지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었으나, 자신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불편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그러기로 했다.

-존장 덕분에 먼 길을 심심치 않게 올 수 있었소. 고맙소이다.

-죄송허고만요. 하도 칼 찬 사램들 헌티 시달리먼서 살다 봉께 이 지경이 되았고만요. 부디 챚으신다는 그걸 챚어 갖고 어서 돌아가시길 빌겄어라!

그렇게 낙타 몰이꾼은 언덕 아랫길로 향했고, 아베스라는 언덕 위 좁은 길을 혼자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저 멀리 흙으로 지어 올린 원뿔형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형태의 집들이 신기했다.

'아, 저곳이 아오슈나르의 마을인가 보네.

아베스라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스승은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라고 하셨으나, 마을이 눈에 보이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계속)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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