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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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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4

posted Oct 0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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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오낙영
발행호수 85

낙타 .jpg

 

 

4

 

-오빠야!

삼 년 전, 노루즈 축일을 지내고 얼마 후에 굴바하르가 아오슈나르의 방으로 찾아왔다. 무언가 작심을 한 듯한 얼굴이었고, 차 한 잔 마실 새도 없이 선언하듯 말을 쏟아냈다.

-그동안 오빠야가 참말로 고생이 많았니더. 그래서 얘긴데, 인자는 오빠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도 괘않을 듯 하니더. 우리만 좋자고 오라버니 앞날을 생각하지 몬 했지요?

굴바하르의 얘기는 전혀 뜻밖이었다. 그녀가 부른 오빠라는 호칭도 낯설었고,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는 말도 생경했다. 니루샤를 꾸려오면서 다소 껄끄러운 장면이 잦아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이런 식의 언사가 튀어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굴바하르, 무슨 얘긴지 맥락을 ······

-비유와 상징이시더.

-비유와 상징?

아오슈나르는 다소 짜증이 났다. 굴바하르의 이해할 수 없는 어휘 구사의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열등의식이 드러날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지만, 그날은 참을 수가 없었다.

-거두절미하고 하는 말이, 나의 자리를 찾아가란 말인데 그게 비유인지 원관념인지 말해 봐.

아오슈나르의 말에 굴바하르가 당황했다. 그녀가 그린 그림과 다른 장면이 연출되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 식이었다. 그녀는 머리가 좋아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유심히 들어 두었다가 적절하다 싶을 때 쓰곤 했는데, 간혹 그게 절묘해서 뭇사람들의 찬사를 들었고 그러면 한껏 기고만장하곤 했다. 그러나 맥락을 이해하고 쓰는 말이 아니어서 종종 엉뚱한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했는데, 영민한 그녀는 농담으로 얼버무리는 기지를 발휘하곤 했다. 그러나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기어코 그녀의 항복을 받아내었고, 그럴 때마다 굴바하르의 스트레스와 신경질증은 낙타가 입술을 부르르 떨어가며 뱉어내는 침처럼 여기저기 튀었다.

-지하고 여그 동무들은요, 오라버니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니더.

굴바하르가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힘든 말속엔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어지럽게 부서지고 있었다. 아오슈나르는 더 묻거나 따지지 않았다. 그녀가 그린 어설프기 짝이 없는 그림이 또렷하게 보이는데, 굳이 그녀의 좁고 얕은 인식의 물줄기를 흩뜨릴 필요가 있을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당분간 수사의 도서관에서 지내면서, 애초에 하란을 떠나올 때 품었던 우르크 지방의 옛이야기를 공부할 요량이었다.

-굴바하르여! 우리가 기뻐해야 할 것은 태양 아래 온전히 드러나는 세계의 찬란함이로다. 그것은 분명한 모습으로 어두운 세상에 가라앉지 않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밤과 낮의 틈새에 도사린 애매한 밝음이려니, 그것은 미망의 언어로 삿된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루 다섯 번 그 경계에서 기도하는 것은, 완전한 세계를 보여주시는 분에게 우리의 삶이 온전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로다! 이 경지를 알지니 굴바하르여! 이 경지를 알지니!

아오슈나르는 찻잔을 들어 천천히 허공중에 세 번 들었다 내리고 마셨다. 입속의 찻물이 혀끝에서 멈칫하더니 혓바닥을 가볍게 타고 내려가 목젖을 휘감으며 미끄러졌다.

그날 밤 자정을 지나며 아오슈나르는 간단한 제의와 기도를 드린 후 길을 나섰다. 그믐을 향해 이지러져 가는 달은 짙은 구름 사이에서 가끔 파리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아오슈나르는 길을 떠나기 딱 좋은 밤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가벼운 바랑을 들쳐메고 동구로 돌아설 무렵 집 그림자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우샤로구나!

아오슈나르는 우샤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오라버니, 시방 이렇게 떠나시면 어쩐다요.

우샤의 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오슈나르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별일 없을 거다. 그리고 아주 떠나는 것도 아니니 섭섭해할 것도 없다. 원래 수사에 한 번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공교롭게 되었을 뿐이야.

-참말로 징허요. 꺽정도 안되시오.

우샤는 어렴풋한 두려움에 미열이 났다.

-우샤!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고 열심은 내되 열중하지는 말거라. 기도하고 기도하면 신의 가호가 있을 것이야.

아오슈나르는 우샤를 가볍게 안아 작별인사를 하고 총총 니루샤를 떠났다.

 

-굴바하르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녀는 아오슈나르 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었나요?

아베스라가 물었다. 그는 이야기가 좀 답답하다고 느꼈다.

아오슈나르가 눈을 감았다. 그가 숨조차 멈추고 양손의 손가락을 맞대었다. 우주의 시간이 멈추었다.

-그녀는 누구에게 의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에게조차 의지하지를 않아요. 기도는 하지만 자신을 내맡기지는 않습니다.

아오슈나르가 천천히 숨을 내쉬고 말했다. 세상의 온갖 시끄러운 소리가 살아났다.

-그녀가 남편의 죽음에도 흔들리지 않은 것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온갖 험한 일을 당하고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남다른 자기애를 가졌기 때문이죠.

 

하란을 떠난 아오슈나르가 굴바하르를 만난 것은 그녀가 '신들의 꽃밭'에서 내쳐진 직후였다. 그녀는 성의 남문으로부터 한 마장쯤 떨어진 곳에서, 작은 보퉁이를 손에 들고 절뚝거리며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었고, 아오슈나르는 유프라테스강을 따라가기 위해 그 지류인 발리흐 강을 향해 낙타를 몰아가고 있었다. 굴바하르는 멀리서 보아도 유별나게 보일 만큼 옷이 화려했다. 그녀는 아오슈나르의 낙타를 발견하곤 보퉁이를 내던지고 두 손을 흔들어 자신을 주목하도록 했다.

 

-얼굴 여기저기에 멍이 들어있고, 절뚝거리는 데다, 옷차림도 걷기에는 불편해 보여서 그녀를 낙타에 태우고, 나는 고삐를 쥐고 걸었소. 얼마쯤 가니 그녀가 미안했는지 같이 타고 가는 게 어떻겠냐고 그럽디다. 그래 나는 앞에서 고삐를 쥐었고 그녀는 내 등 뒤에 앉고 그렇게······. 그렇게 가다 그녀는 곧 내 등에 머리를 대고 잠에 빠져듭디다. 얼마나 오래 자던지 걱정이 될 정도였소.

아오슈나르는 어색한 듯 그 답지 않게 말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여기 우르까지 온 것이오?

-그래서 대상들이 한 달이면 될 길을 보름 가웃이나 더 걸리지 않았겠소!

-애초에 니루샤 같은 시설을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어쩌다 그리되었답니까?

아베스라가 정작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하란의 사원 도서관에서 우르크에 대한 양피지를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낙타 위에서 굴바하르에게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마리를 지나 아카드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소. 그곳은 옛 바빌로니아 토호가 일으킨 반란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고, 그래서 가장을 잃고 떠도는 여인들이 많았소. 거기서 만나 동행을 하게 된 게 우샤와 야스민이었소. 졸지에 세 명의 여성과 동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상한 상황이 만들어지고 나니, 생각이 복잡해지더이다. 언제까지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며, 이후에 저들은 또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지 등등······.

아오슈나르의 말을 들으며 아베스라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결혼한 여성에게 남편이란 존재가 세계 그 자체가 되는 현실 앞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살아갈 길은 다른 남성의 굴레를 받아 거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상황에서 세 여인과 동행해야만 하는 아오슈나르의 현실 또한 각박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처음엔 규모가 있는 사원에 부탁해 일하도록 해볼까 생각도 해보았는데, 대부분 사원 노예를 거느리고 있어서 쉽지 않겠습디다. 여러 궁리 끝에 고육책으로 생각해 낸 게 처지가 비슷한 여인들끼리 모여 살도록 하자는 거였소. 바로 그 생각이 결국, 내 발목을 잡은 거였잖겠소?

 

아오슈나르가 우르크에서 수메르로부터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공부해 보겠다는 계획을 유보하게 되자 갑자기 목적지를 잃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무슨 일을 도모하려면 먼저 그림이 그려져야 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 그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신의 뜻을 묻고 그 대답을 듣기 위해 걷고 걸어온 그였기에 전인미답의 풍경 앞에서 구도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았다. 바토(낙타의 이름)의 고삐를 잡고 걸으면서도 세 여인이 조잘거리는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밤이 되면 난과 물로 요기를 하고 세 여인은 으슬으슬한 밤공기를 이기기 위해 한 덩어리가 되어 껴안고 잠을 청했다. 아오슈나르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하루 다섯 번의 기도시간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고, 특히 저녁과 자정에 드리는 기도는 끝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길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우샤가 아오슈나르의 표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미묘한 변화를 읽어냈다.

-즈그들 땀시 그런다요?

그녀가 아오슈나르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며 아오슈나르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 속에는 확신을 움켜잡지 못하고 주저하며 어정쩡한 모습으로 있는 남자가 있었다. 아오슈나르는 그걸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신은 뜻밖의 상황을 통해 새로운 길을 보여주신다는 걸 잊고 있었다. '오! 영원과 지혜의 불을 통해 계시하시는 거룩한 이여, 찬미 받으소서! 잠들어 있던 의식을 깨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아오슈나르는 태양을 향해 눈을 감고 기도했다. 눈을 감았으되 빛은 눈꺼풀을 통과해 부드럽게 각막을 어루만졌다.

-우샤, 하늘의 해는 누구에게든 빛을 나눠준다네. 간혹 구름이 어지럽힐 때도 있어 빛을 가리기도 하지만, 구름은 잠시일 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아오슈나르는 우샤의 말 속에 깃들어 있는 가시를 보았다. 불쑥불쑥 살갗을 파고들며 고통스럽게 하는 그것 위에 천 하나를 덧대어 주고 싶었다. 우샤는 아오슈나르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문제의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숙제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아오슈나르가 굳이 우르크를 고집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러나 일단 그곳을 목적지로 하는 여정을 바꾸지는 않았다. 큰 도시였으므로 사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굴바하르는 하란보다 큰 도회지라는 말에 살짝 들떠 있었다. 하란의 번다함이 그리워지는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여행 내내 화려하고 치렁치렁한 옷을 바꿔 입으려 하지 않았다. 불편함이 주는 심리적 만족감을 떨쳐버릴 생각이 없었다.

우르크는 상상 이상의 도시였다. 오래전에 번성했던 수메르의 왕도라서 지금은 쇠락한 옛 도시려니 하고 머릿속에 그리고 왔으나, 여전히 화려하고 활기찬 도시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성의 웅장한 모습만으로도 여행자를 압도하였고 잘 조성된 대칭의 건축물이 가슴 뛰게 하였다. 성밖에 가지런하게 줄지어 있는 상가와 민가들의 모습만으로도 하란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성벽을 끼고 이어진 길은 마차 두 대는 넉넉히 지나다닐 만큼 넓었고, 해자를 건너 성문으로 이어진 중앙로는 마차 네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만한 넓이였다. 규모는 수사보다 훨씬 작았지만, 짜임새가 단단한 도시라는 인상을 주었다.

아오슈나르는 우선 사원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사원은 내성 안 중앙의 지구라트 오른쪽 지구에 있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았다. 제국은 마즈나야스나를 국교로 삼아 그것을 장려하고 그를 통해 신민을 규합하고 있었으나, 지방의 토속신앙을 규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르크의 지구라트 높은 곳에 여전히 수메르 시대의 여신 이난나(Inanna)의 신전이 있었고 그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원의 책임 사제는 출타하고 없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부제는 아오슈나르를 맞아 차와 다과를 내오는 등 극진하게 대우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책임 사제는 태수의 수석 서기관을 겸하고 있어서 정기적으로 관청에 나가 업무를 보아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권력의 핵심에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도시의 규모에 비해 사원은 작을지라도 그가 가진 힘의 크기는 작지 않을 것이다. 글을 아는 것과 종횡으로 연결된 사원을 통해 얻는 정보는 권력자들이 사제를 가까이 두는 이유이기도 하고, 사제는 그것을 이용해 권력을 나눠 갖기도 한다.

저녁이 되어 아오슈나르는 사원의 부제와 함께 신전에 나가 예전을 행했다. 그리고는 융숭한 식사를 대접받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먹는 기름진 음식이었다. 부제 바흐만(Bahman)이 아오슈나르와 같이 온 여인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오갈 데가 없는 여인들입니다. 그들끼리 모여 살 방법을 모색 중이지요.

아오슈나르의 말에 그는 몹시 놀라워하였다.

-어허! 어쩌다 그런 지경에 빠지셨습니까? 순회 사제의 임무에 그런 것도 있나요?

바흐만의 말에 오히려 아오슈나르가 빙긋이 웃었다. 그가 사제수칙을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닐 것이었다.

-딱한 처지에 놓인 그들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을 뿐이오. 사제가 곤경에 빠진 이들을 거둬야 하는 건 신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소?

아오슈나르의 말에 바흐만은 가벼운 신음을 냈다. 그리곤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오슈나르가 느끼기에 그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갇혀버린 듯했다.

-음······, 여인들만 모여 살면서 무슨 일로 생계를 도모하시겠습니까?

바흐만이 아주 느리게 말을 했다. 아오슈나르로서도 줄곧 고민해 온 뼈아픈 지점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말이었다.

-그래서······

아오슈나르가 이야기를 이어가기도 전에 밖에서 전갈이 왔다. 책임 사제가 관청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부제 바흐만이 서둘러 일어섰고, 아오슈나르도 엉거주춤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책임 사제는 풍채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부제 바흐만의 소개를 받자 아오슈나르를 포옹했다.

-어제 파발을 통해 그대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하필 오늘이 정청(政廳)에서 업무를 보는 날이라 직접 맞질 못했구려. 바스파르(Vaspar)라고 하오.

바스파르는 안정적인 조건 속에 있는 사람답게 그에 걸맞은 기품과 여유가 있어 보였다. 아오슈나르로서는 그에게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으므로 원만한 관계를 맺어둘 필요가 있었다.

-아오슈나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바흐만 부제에게 얼핏 들었소만, 하필 여인들이랍니까?

바스파르 사제는 가볍게 말하고 있었으나, 아오슈나르에겐 절박했다.

-남자들이야 어떻게든 살아가겠지만, 이런 여인네들은 도움이 없으면 죽어야 합니다.

아오슈나르가 서둘러 상황을 말하려 했으나, 바스파르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자세한 건 우리 바흐만 부제와 상의하시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건 돕겠으나 지난한 일이오.

 

사제 바스파르는 바쁜 사람이었다. 태수의 수석 서기관 겸 자문관으로 사트라프(Satrap: 제국의 지방 총독)로부터 내려온 공문서를 정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지휘했으며, 지역의 토호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주 어울려야 했다. 또 여전한 영향력을 가진 이난나 신전을 간접적인 방법으로 관리해야 했다. 그래서 사원 안의 일은 거의 부제 바흐만이 처리했는데, 다행히 까다롭지 않아서 아오슈나르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바흐만은 여인들이 당장 머물 수 있는 곳을 알선해 줄 수는 있겠지만, 우르크 성내에 항구적인 시설을 마련하는 일은 어렵다고 했다. 보수적인 데다 토착 신앙의 영향력이 여전한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비록 마구쉬가 전면에 나서더라도 외지에서 들어온 여인들의 주거 시설이 들어서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사흘거리에 우르라는 곳이 있습니다. 에레츠라 불리는 유다인들의 성소가 있는 곳이지요. 거기라면 외지인들에 대한 경계심이 덜한 곳이니 그리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듯합니다만······, 다만 우리 사원에서 좀 먼 게 흠이지요.

부제 바흐만의 얘기를 들은 아오슈나르는 심란했다.

 

-아하! 그렇게 해서 이곳 우르에 니루샤가 터를 잡은 것이군요.

-그렇다오. 바흐만의 얘기대로 좀 멀긴 하지만, 그거야 무슨 큰 문제가 되겠나 싶어 이리로 왔소.

-그럼 첨엔 굴바하르, 우샤 그리고 야스민 세 여인과 시작한 거로군요.

-우르크에서 두 명이 더 합류했어요

 

우르크의 사원에 머문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아침 기도를 마치고 나온 아오슈나르에게 우샤와 야스민이 급하게 달려왔다.

-큰일 났고만요. 굴바하르가 안 보인당께요?

우샤는 새벽에 일어나 보니 굴바하르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간밤에 방에서 나가길래 화장실 가는 줄 알었는 디······, 아침에 봉께 안 보인다요.

야스민은 어렴풋이 방을 나가는 굴바하르의 기척을 알아챘지만, 곧바로 잠이 들었었노라 말했다.

-좀 기다려 보고 찾아봅시다. 낯선 도회지에서 어디 멀리 가진 않았을 테니······.

굴바하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오슈나르는 바흐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곳의 사원은 특이하게도 민심을 사찰하는 부서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로 이난나 여신 추종자들인 이교도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도시 곳곳에는 사원의 정보원이 있어 낯선 사람의 행적은 그들이 먼저 알고 있었다. 황제가 '왕의 눈과 귀'를 통해 제국을 꿰뚫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샴하트(이난나 신전의 여사제)의 숙소 쪽에서 짐작할 수 없는 낌새가 좀 있어서 확인해 보려던 참이었는데, 혹시 모르니 알아보겠습니다.

사찰팀의 정보관이 출근하는데 신전 여사제들의 숙소에서 약간 부산한 움직임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사원의 노비 한 사람을 데리고 서둘러 나갔다. 아오슈나르도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수 없어서 따라나섰다.

신전 여사제의 숙소는 지구라트 왼편 뒤쪽 지구에 있었다. 큰길에서 지구라트를 등지고 이어진 세 채의 신전 부속 건물 오른쪽 건물이었다. 사원의 정보관이 노비를 데리고 들어갔다. 잠시 후 노비가 나와 아오슈나르를 데리고 들어갔다. 정보관이 노기를 띤 샴하트를 달래고 있었다. 정보관이 아오슈나르를 보고 그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그녀는 아오슈나르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신전의 노비들을 시켜 여인 셋을 끌어냈다.

굴바하르가 거기 있었다.

-마구쉬 님요! 사, 살리주소! (계속)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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