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바하르는 충격이 좀 컸는지 며칠을 자신의 숙소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종일 우두 멍하니 누워 뚫린 천정의 빛우물을 쳐다보다, 우샤가 보리를 불려 끊여낸 죽을 들고 들어가면 겨우 일어나 바싹 구워진 난을 뜯어 그것을 떠먹었다. 다행히 그녀의 식욕은 여전했다.
-맛있다!
멍과 붓기가 아직 남아있는 얼굴을 찡그리며 미소를 지어 보이는 굴바하르의 모습을 바라보며, 저 천진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우샤는 혼란스러웠다.
-인자, 움직일 수 있겄지라이?
-다 괘안은 데, 허리가 안즉 욱신거리는 기 걷기는 좀 에렵다.
마지막 난 조각으로 죽을 싹싹 긁어 설거지하듯 목기를 비워버린 굴바하르는 왼손을 허리께에 얹으며 미간을 구겨 찌푸리고 있었다.
-안에 있는가?
문밖에서 아오슈나르의 목소리가 들리자 굴바하르는 쓰러지듯 누워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우샤가 '핏'하고 웃으며 문을 열었다.
-굴바하르가 금방 식사하고 누워 있고만이라. 허리가 엔간히 쑤시는 갑소.
-굴바하르! 많이 아프니?
아오슈나르가 다가서며 말하자 굴바하르가 갑자기 서러움이 솟구쳐 올랐는지 가늘고 날카로운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지는 인자 여서는 몬 살 거 같니더.
-여기서 살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도 살 수 없다. 그런 생각 말고 어서 몸이나 추슬러라.
아오슈나르는 그녀에게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마음의 행로를 바꾸어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말은 자꾸 겉돌았다. 아오슈나르도 굴바하르도 혀가 자꾸 미끄러졌다.
굴바하르는 다 좋아할 줄 알았다고 했다. 몸을 통해 전해지는 감각, 세포를 깨우는 느낌을 모두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냐는 아오슈나르의 물음에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니까 당연히 남들도 다 좋아할 거라 말했다.
네 가슴을 열어 보였다고
다른 이도 마음을 열고 기다리지 않는다네
네가 그의 눈을 가려버리면
네 가슴에서 번지는 빛을 볼 수 없으며
네가 그의 귀를 막아버리면
그는 네 가슴에서 울리는 고동을 듣지 못한다네
그러니
네가 가슴을 열었다고
그의 공감을 기대하지 말고
네 짙은 그림자가 그를 어둠에 가두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네
네가 좋아하는 것을 드러내기보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네
아오슈나르는 굴바하르의 눈동자에 흐르는 강고한 어둠을 보았다. 작은 빛에도 빠르게 반응하지만 결단코 그것을 품거나 하지는 않을, 그러나 흘러 적셔 그 어둠을 확산시키려는 조용하지만 집요한 흐름이 보였다.
'나쁜 것은 누구에게나 나쁘듯이 좋은 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것이니더. 내 손길을 싫어한 사람은 없었니더. 남편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 모두, 늙은이고 젊은이고 내 손을 천사의 손이라 했지예. 그게 남편을 죽게 했지만.'
굴바하르는 자신의 손을 과신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지체가 아니라 정신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녀의 몸은 완강한 배타적 자기애가 빚어낸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렇기에 두려움은 그녀에게서 싹을 틔우지 못하고 제풀에 사그라졌으며 발랄한 현재성만 남아 가늠하기 어려운 심성을 조성하게 되었다. 그녀가 요 며칠 동안 천창에 흐르는 구름과 별빛을 보며 두문불출하고 누워있었던 것도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하는 과정이었지 관계를 되짚어 성찰하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니루샤 곳곳에 천진한 웃음소리를 흩뿌리며 사람들의 마음을 살 것이다.
아오슈나르는 아무래도 분위기를 바꿔 그녀의 강퍅한 성채에 균열을 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귀슈탐 행수가 사람을 보내왔다. 그의 상단이 수사로부터 돌아왔으므로 아오슈나르가 와서 축복을 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는 전갈이었다. 니루샤가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사제에게 강복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귀슈탐이야말로 니루샤의 최대 후원자가 아닌가.
귀슈탐은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아오슈나르를 맞았다. 귀슈탐과 읍장이 문에서 바라보이는 맞은편 중앙에 앉아 있었고 좌우로 눈에 익은 얼굴들이 쿠미스(kumis)1)를 마시고 있었는데, 중앙에는 물방울이 긴 꼬리를 만들며 떨어지는 듯 생긴 현악기 세타르(setar)를 안고 있는 사람과 작은 절구통같이 생긴 원추형 통에 무두질이 잘 된 쇠가죽을 씌운 타악기 톤박(tonbak)을 무릎 사이에 끼우고 앉아 있는 사람이 '낙타는 달리네'를 연주하고 있었다. 유랑 악사들인 모양이었다. 경쾌한 톤박의 리듬 위에서 세타르의 가냘픈 듯 떨리다 튀어 오르는 강렬한 음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아오슈나르가 들어서자 읍장이 가장 먼저 일어서며 반겼다. 그는 짐짓 호방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지난번 진상 물목 건에 대해 과장된 사의를 표시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덩달아 사례의 말을 늘어놓았으므로 오히려 아오슈나르를 불편하게 했다.
악사들의 연주하던 '낙타는 달리네'가 끝나자 연회의 주인인 귀슈탐은 아오슈나르에게 강복을 요청했다. 아오슈나르는 손바닥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두 손을 모아들고 신에게 귀슈탐의 상단이 언제나 안전하길 기원했다. 아울러 고도 우르와 시민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축원하며 덧붙이기를 아울러 이난나의 복이 가득하기를 빌어주었다. 아오슈나르가 그들의 신 이난나를 언급하자 참석한 우르의 유력자들은 뜻밖의 칭찬에도 마음 놓고 웃지 못하고 애써 참는 개구쟁이들마냥 얼굴에 희색이 번져갔다.
-기맇티 않어두 내레 마구쉬님께 부탁드릴 게 있습네다.
읍장은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무 조심스러운 나머지 말은 사라지고 오물거리는 입 모양과 과장 섞인 몸짓만 남아 나풀거리는 유랑광대의 연기 같았다.
-거저, 어드런거냐 하먼 말이디요······.
이 지역의 풍습으로 노루즈의 첫날과 티셔리(Tishri) 달의 추분에 이난나 축제가 시작되는데, 곧 있을 추분 축제에 제국의 종교인 마즈다야스나의 사제인 마구쉬가 참석하여 축복해 준다면 제국의 종교와 지역의 토착 신앙의 심리적 거리를 좁혀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아오슈나르는 읍장의 말이 다분히 제국의 종교와 토착 신앙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만 하는 행정가다운 발상이라고 생각했지만, 꽤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그가 지역을 관할하는 사제는 아니었지만, 이곳의 귀퉁이에 터를 잡은 이상 그들과의 연대를 등한히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애초에 하란에서 우르크로 올 때 품었던 계획이 이곳의 오랜 구전신화와 신앙을 공부하기로 했었지 않았던가.
아오슈나르가 흔쾌히 '그러마' 하고 대답하자, 읍장은 비로소 어깨를 펴고 아오슈나르를 향해 감사하며 크게 웃었다.
-고맙습네다. 덩말 고맙습네다. 내레 마구쉬 님이 기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시오. 이번 축제는 그 의미가 자못 남다를 겁네다. 거럼, 기렇구 말구요. 귀슈탐 행수, 안 기렇습네까?
얼마 후, 읍청의 행정관 카마란(Kamran)이 니루샤를 방문했다. 그는 아오슈나르가 몇 차례 본 적이 있는 유지와 함께 왔다. 과묵한 사람이었다. 분명 통성명을 했을 것이고 읍장이나 귀슈탐의 소개도 있었을 것이지만 이름조차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른 유력자들과 다르게 나서서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애써 의식하지 않으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키는 크지 않았으나 다부진 체격에 피부색도 좀 어두워 강인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검은 수염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구면입네다만, 제 이름을 기억하갔는지요? 내레 바흐아도르(BahAdor)입네다.
그는 지난번 읍장이 귀슈탐 행수의 집에서 아오슈나르에게 추분 축제에 참석해 달라고 한 말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바흐아도르는 마구쉬 님이 추분 축제 참가하시는 거이에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네다.
행정관 카마란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이난나 여신 축제에 낯선 아오슈나르에게 축제의 개요를 설명하라는 읍장의 지시를 받고 왔는데, 그걸 안 친구 바흐아도르가 동행을 자처하고 나섰다고 했다.
아오슈나르의 눈에는 그가 뭔가 작심을 하고 따라나선 것 같았다.
-내게서 뭘 알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건가요?
아오슈나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바흐아도르가 이 지역의 오랜 유력자 가문 출신이라면 그들의 신앙과 축제에 제국의 종교가 관여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행정책임자인 읍장과는 다른 입장을 가질 수 있으며 어쩌면 그는 축제를 지역의 정신으로 여기고 있어 외부의 무엇으로부터도 오염되지 않기를 바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결이 좀 달랐다.
-내레 마구쉬 님이 이번 추분 축제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지는 않으셨으면 합네다. 기거이 읍장이 획책하는 음모에 빠디디 않기를 바라는 겁네다.
바흐아도르의 말을 듣자 아오슈나르는 카마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말이죠? 읍장님이 이번 행사에서 내게 특별한 걸 원하시나요?
카마란은 잠시 머뭇거렸다.
-내레 읍당님으로부터 받은 지시는 행사의 개략적인 내용을 설명해 드리라는 것이고 특별히 순서를 넣으라는 지시는 없었습네다만. 바흐아도르의 말은 읍장님과 오래도록 교유하면서 형성된 우려라고 생각됩네다.
카마란의 설명에 바흐아도르는 알 듯 모를 듯한 엷은 미소를 오른쪽 입꼬리에 살짝 얹으며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오! 우리 틴구 카마란! 신의 영광이 네게 내리기를! 마구쉬 님! 카마란은 저의 아주 오랜 틴구입네다. 틴구의 말은 전적으로 옳습네다. 기러나 내레 확신하고 있습네다. 읍장은 ······.
바흐아도르는 읍장이 아주 독실한 이난나 여신의 종으로 훌륭한 행정가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그의 야심이 그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장황한 말로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 야심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적절하지 않다고 하면서도, 아오슈나르가 그의 계획에 동참해서는 안 된다고 간곡하게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읍장이 이난나 축제의 성혼예식을 더럽힐지 모른다며 탄식했다.
아오슈나르는 자신이 시험에 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니루샤가 주는 문제와 바흐아도르가 가져온 뜻밖의 문제는 돌아서 갈 수 있는 우회로가 차단된 시험처럼 느껴졌다. 읍장과 바흐아도르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는 귀슈탐 행수를 떠올렸으나 섣부른 접근은 오히려 그를 곤경에 빠지게 할 수 있을 것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우리 마즈다야스나(Mazdayasna)가 제국의 종교이긴 하지만, 황제는 각 지역의 전통신앙을 존중하여 금지하거나 간섭하지 않은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오. 나 또한 마즈다야스나의 사제로 이 지역의 오랜 전통인 민속과 신앙의 축제를 축하할 뿐, 그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으며 그럴 생각이 전혀 없소. 그대들이 말하는 이교의 사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소. 내가 읍장의 청을 수락한 것은, 우르크에 오기로 했던 애초의 계획인 우르크 왕조 시대부터 전승되어 온 이야기를 공부하기로 한 것의 일환이었소. 바흐아도르 대인이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애써 말하지 않으니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짐작되는 바가 있으니 그리 아시오.
아오슈나르는 혼자 있고 싶었다. 카마란과 바흐아도르가 떠나자, 그는 니루샤를 나와 홀로 사막으로 가 기도와 명상에 들었다.
아후라 마즈다시여, 당신께 간구합니다.
당신의 진리와 선함으로 저희를 인도하소서.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스스로 어둠에 갇혀있는 이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하소서.
몸을 버려야 한다. 몸은 영혼의 거처이나 그것을 묶는 감옥이기도 하다.
눈을 닫고 보이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보는 것은 보이는 것에 매어 그 너머를 보지 못한다. 귀를 닫아야 한다. 듣는다는 행위는 망상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소리가 만들어내는 헛된 그림자에 현혹되어 우주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는 까닭이다. 생각을 끊어야 한다. 생각은 저절로 자라는 만초(蔓草)와 같아서 분별과 차별을 불러일으키며 더욱 무성하게 한다. 그러므로 몸을 버리고 태초의 빛을 받아 안은 꿈 한 덩이면 족하리라.
돌아가라, 돌아가라. 겁의 세월로 지어진 몸을 되돌려, 처음 그 처음의 빛으로 돌아갈 지라. 그리하여 만상이 응결된 그 빛을 응축하고 응축하여 결국 보이지도 않는 한 점에 이르렀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일어나는 거대한 폭발을 경험하라.
너는 자유로우리라!
눈 열어도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며, 귀의 빗장을 끌러 내리면 우주의 소리 쏟아지리. 생각은 다소곳이 머무르며 태초의 뜻을 받아 새날을 지어나가리라.
겁의 시간이 그의 혈관을 타고 흘렀고, 이윽고 한 시점에 이르러 세포가 열리면서 시공을 뛰어넘어 온 미광 한 점이 사그라지는 듯 흐려지길 두어 차례 깜빡거리더니 맹렬한 기세로 폭발하며 쏟아지듯 빛을 뿜어냈다.
아오슈나르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눈은 떴으되 보이는 것은 눈앞의 풍광이 아니라 천궁을 가득 메운 별들의 어지러운 운행이었으며, 들리는 것은 천체의 질서 있는 운행에서 우러나는 율려(律呂)의 조화였다. 한동안 그의 몸은 키 큰 대추야자의 잎이 크게 흔들리듯 떨다가 잦아드는 바람을 따라 진정되는 듯했다. 그러자 오한이 그의 정수리로부터 척추를 따라 번개가 내리꽂듯 지나며 온몸으로 퍼졌다. 숨이 멎자 시간도 멈춘 듯했다. 따스한 손바닥이 얼굴을 쓰다듬고 흐르는 것을 느끼자 숨이 터졌다.
비로소 그의 망막에 사막의 지평선을 막 떠오르는 태양이 맺혔고, 낮은 사구들은 더 어두운 그림자를 머금고 빛이 그려내는 가는 실선의 굵기를 천천히 키워가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모래가 흐르며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두 번의 밤이 지나갔다.
니루샤로 돌아오는 한낮의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어둠을 잔뜩 머금은 구름이 하늘을 온통 뒤덮고 대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이게 현실이지!
아오슈나르는 하늘을 보며 저도 모르게 신음을 냈다. 그러나 사흘 전 사막으로 향하던 때의 혼란은 없었다. 그는 투명해진 정신으로 구름 너머의 빛을 볼 수 있었다. 방패와 창을 든 병사의 생사를 뛰어넘는 용맹이 코를 지름길 삼아 폐부에 내달려 닿는 느낌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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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앙아시아에서 튀르크의 이주와 함께 전래하였다고 상정한 마유주(馬乳酒)의 일종
오낙영(글쓴이,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