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d2d0d9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9

posted Mar 14, 2025

이난다.jpg

 

 

*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을 등불로 삼아 스스로에 의지하며 살아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 진리에 의지하라.

 

 

 

아베스라는 동방의 성자 고타마로부터 전해져 온다는 경구를 읊조렸다.

-아오슈나르여! 거기서 도를 보았소이다 그려!

-보았다고 하기보담 잊었던 것을 되찾았다고 해야 할 것이오. 세상에 나올 때부터 이미 창조주로부터 전해받은 것을, 잊고, 잃어버리고 살다 겨우 정신 차려 생각해내고는 깨달았다고 말하지만, 아둔한 인간은 다시 그걸 잊고 허우적거리듯 살다가 불현듯 사막을 찾아갈 것이오. 아! 어리석은 인간이 하는 일이라니!

아오슈나르가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이 수행자의 길 아니겠습니까. 문득 잡힐 듯해서 손을 내밀면 헛손질이요, 손가락 사이엔 허공을 흐르는 무심한 바람만 살결을 간질이며 헛공부를 희롱하지요. 그러다 다시 발심하고 애를 쓰다가 한 발자국 더 내디뎠나 돌아보면 다시 그 자리라! 작은 주발에 쏟아지는 물을 한껏 받아 봐야 겨우 주발 크기를 넘지 못하나니, 오호라! 글렀구나, 이생에서 이룰 것이 무엇이더냐 절망할 새 '이놈! 발걸음은 종다리인데 그 걸음의 크기를 붕새의 깃털로 재려는 게냐!' 하는 호통과 껄껄껄 웃는 소리가 뒤통수를 때리더이다. 깨닫는 것도 버릇이 되어야 쌓이지, 어쩌다가 한 번씩 깨닫는 것은 내 것이 되질 않습디다. 한 번 깨달으면 그뿐이지 그 위에 더 보탤 게 뭐 있느냐며 호통을 치는 명상가들이 있기는 있는 모양입디다만······

아베스라는 눈을 감고 몸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그는 여전히 사막의 은수자를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깨닫는 것도 버릇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참으로 놀랍소. 그렇구려······ 매일매일 매 순간이 도전이고 응답일 터인데 그걸 잊고 시류에 휩쓸리고 있구려. 깊이 생각하는 것에서 좋은 생각이 나오고, 좋은 말이 나오고, 좋은 행위가 이루어진다고 대 스승 짜라투쉬트라께서 가르침을 주셨는데, 생각을 접어놓았으니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막았던 게 아니겠소?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어디 하나일 것인가. 어떤 이는 시원하게 열린 길 위로 챠크라를 타고 직행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험한 산길을 발이 깨지고 무릎이 망가지도록 가도 요원하여 절망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샛길로 빠져 이루 말할 수 없는 유혹에 빠져 허망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겨우겨우 길을 찾아 걷기도 하는 게 아닌가. 그렇기도 하지만 챠크라를 타고 달려간 사람의 깨달음이 반드시 발을 깨트리고 무릎이 퉁퉁 부어가며 더디게 간 사람의 깨달음보다 크지도 알차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깨달음의 길이란 수행자 자신의 품을 넓히고 그릇을 키우는 일인 바에야, 결국엔 자신과의 쟁투일 뿐 누구와 견줄 수 있는 것도 아닌 까닭에 외롭고 고단한 길인 것이다.

-그날 사막에서 하나의 빛을 만나고 돌아왔음에도 니루샤가 직면한 문제는 여전하더이다. 세상엔 신에 속했다고 믿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궤도가 하나 더 있는 듯했소.

아오슈나르가 무심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단전 위에 두 손을 모아 얹은 상태였다. 그 무심한 얼굴 위 눈꺼풀에 미세한 떨림이 지나가고 있었다. 천지가 굉음을 내며 흔들렸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그것을 잡아 창조주께서 주관하는 운행의 장에 일치시켜야 하는 일이지요. 그건 그렇고 이난나의 추분 축제는 어땠습니까?

아베스라가 짐짓 궁금하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끔찍했어요. 재앙의 불씨가 강풍을 만난 격이었지요.

 

이난나 여신의 축제는 여성의 축제였다. 지역의 여성들이 퍼레이드를 벌이며 사랑과 질투의 전사 이난나 여신을 찬송했다. 여성들은 이난나 여신이 그녀의 속성인 사랑과 질투를 자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축제 기간에는 사회적 속박과 가정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과감해졌으며,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폭력사태가 벌어져 두무지(Dumuzi)1) 역할을 하던 귀족 출신의 남성이 피살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애초에 고대 왕국의 수도였던 우르크에서는 두무지의 역할이 왕과 그 대리자의 것이었으나, 왕국의 멸망 이후에는 지역의 행정책임자가 하였고,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성혼례가 상징적인 의식으로 변화하여 샴하트와 지역 행정책임자가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진행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축제의 진정한 향유자는 여성들이어서 그녀들의 내부에서 응축되어 온 에너지가 어떤 방향으로 폭발할지 몰라 남성들은 전전긍긍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니루샤의 여성들도 당연히 축제에 가야 했다.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니루샤에 온 여성들에게도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해방의 시간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들떠 있었던 것은 굴바하르였다.

-오 오 오라버니!

우샤가 말을 더듬고 있었다. 사막에 다녀온 이후, 아오슈나르는 니루샤의 여인들에게 자신을 오라버니라 부르도록 했다. 가족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기관의 책임자나 사제라는 신분을 가지고 여인들과 형식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유대감의 밀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 낯설고 입에 붙지를 않아서인지 여인들은 주저주저하는 모양새였다.

-지허고 바하락허고는 남아 있을 거이요.

-왜? 그동안 일만 하느라 고생했으니, 모처럼 바람이라도 쐬지!

-아녀라! 지는 사램덜 많이 뫼는 복잡헌 디가 싫소.

-바하락은?

-갸는 옛날에 거그 갔다가 험한 꼴을 당했던 기억 때미 안 간다 허요.

아오슈나르는 더 말하지 않았다.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던지는 섣부른 질문은 그곳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한때의 영화를 뒤로하고 이제는 소읍으로 쇠락한 우르는 모처럼 사람의 바다를 이루었다. 사람의 무리가 뿜어내는 열기는 들은 바대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휘몰아칠지 모르는 거대한 사막의 모래폭풍 같았다. 사람들의 부풀어 오른 폐에서 솟구쳐 나오는 밭은 숨은 이상한 환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어가고 있어 보였다.

-좋아, 너무 좋아!

굴바하르는 이미 삼풀 태우는 연기에 취한 것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곁에 있는 로자(Roza)의 몸에 자신의 몸을 의지하듯 밀착시키고 머리는 그녀의 어깨 위에 얹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오슈나르는 언젠가 제국의 서쪽 땅에서 만났던 헬라에서 왔다는 유랑 필로소포스로부터 들은 디오뉘소스 축제 이야기가 생각났다. 코 밑과 구레나룻으로부터 이어진 턱수염이 지저분하게 엉켜있던 그는 디오뉘소스 축제가 우르크의 이난나 축제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며 겸연쩍게 웃었었다. 그는 이난나의 여사제인 샴하트들이야말로 메나데스(Μαινάδες)의 원형일 것이라며 흥미를 드러냈었다. 아오슈나르가 우르크에 관심을 두게 된 첫 번째 작은 경험이었다.

 

읍장은 지구라트의 신전 2층 기단의 참(站)에 마련된 식전행사장에서 약간 흥분해 있었다. 화려한 제의를 입은 그는 어딘지 어색한 모습이었다. 그의 뒤로는 귀슈탐을 비롯한 지역의 주요 인사들이 앉아 있었고 그들 역시 상기된 표정이었다. 귀슈탐은 아오슈나르를 보자 큰소리로 인사하며 웃었고, 읍장은 허둥거렸다. 그런 그를 지난번 카마란과 함께 니루샤로 찾아왔던 바흐아도르가 초조한 얼굴로 주시하고 있었다.

-이거이, 이거이, 참말로 고맙시다레! 마구쉬 님이 요번 티셔리 축제에 와 두시니 덩말 영광입네다.

읍장은 들떠있는 모습이 완연했고, 마치 난간 없는 저수조 옆의 어린아이처럼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그런 모습을 보일수록 바흐아도르 역시 일그러진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멋진 갑옷과 투구를 갖춘 나팔수들이 앞줄에 도열하여 있었고, 뒤쪽으로 악사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아오슈나르를 향해 고개를 숙여 아는 시늉을 했다. 아오슈나르는 당황하여 서둘러 답례를 하고 그를 기억해 내려 애썼다. 지난번 귀슈탐의 집에서 세타르를 연주하던 악사였다. 자세히 보니 그 뒤로는 톤박을 연주하던 사람도 있었다. 남루한 유랑악사의 옷을 벗어버리고 화려한 의전에 걸맞은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고 있었다. 옷차림이 달라져 있어 금방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팔수들이 경쾌하고 힘찬 소리를 내자 지구라트를 에워싼 군중들의 왁자한 소란이 잦아들었고, 읍장은 헛기침을 여러 번 하면서 상기된 목소리로 먼저 이난나 여신에 대한 찬양과 감사의 말과 우르의 시민들을 향해 상투적인 인사를 했다. 그리고 축제를 준비한 과정과 의의를 장황하게 설명한 끝에 사트라프에 대한 진상품 문제로 곤란에 빠졌을 때 도와준 분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니루샤의 마구쉬 님이였다며 '우리 시민들이 꼭 기억해야 되갔습네다'라며 아오슈나르를 소개했다.

아오슈나르가 축하의 말을 하기 위해 나서자, 귀슈탐이 슬그머니 곁에 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를 높이시고 크게 내셔야 됩네다!

아오슈나르는 이런 식의 대중연설이 처음이어서 어색하기 짝이 없었고, 그런 그를 바흐아도르는 입술을 침을 바르고 움찔거리며 주시하였다.

-우선 여러분들의 이난나 여신이 우르의 신민 모두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길 기원합니다.

아오슈나르가 이난나 여신의 강복을 축원하자 읍장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았고, 바흐아도르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침을 삼키고 있었지만 굳은 표정을 풀지는 않았다.

아오슈나르는 전통을 지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조상들과 대화하는 것이며 또 그것을 통해 후대와도 연결되는 것이라며, 그것을 위해 애쓰는 읍장과 관리들 그리고 지역의 유력자들을 치하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전통을 지키는 주체로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우르의 시민들을 축복하고, 니루샤에 대한 지원과 애정 어린 기도를 부탁한다는 말로 인사를 마쳤다.

아오슈나르의 인사말이 끝나자 큰북이 둥둥둥 울렸고 곧이어 장엄하고 화려한 운율의 나팔소리가 북소리를 타고 퍼져나갔다. 그러자 지구라트를 에워싼 엄청난 군중들의 환호가 지축을 흔들었다. 지구라트 꼭대기의 신전에서 샴하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좌우로 세 명씩 여섯 명의 시녀를 거느린 샴하트는 이난나의 대리자요 그녀의 현현이었다. 커다란 키에 선홍색 빛이 감도는 흰 피부, 무엇이든 튕겨낼 듯한 탄력성이 풍만한 육감에 깃들어 누구든 그의 몸에 서린 기운을 거부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의 걸음은 가볍고 탄탄했고 아주 느린 움직임이었으나,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지구라트 아래의 군중은 황홀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의 시녀들이 머리에서 망사로 된 너울 카피에를 벗겨내고, 어깨에 걸친 망토를 걷어내고, 가슴으로부터 허벅지께에 이르기까지 갖가지의 화려한 청금석과 은장식이 정교한 팔라2)를 벗겨내자 우르의 시민들은 극도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알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반투명의 린넨 안쪽에서 눈부신, 성과 사랑과 풍요의 여신, 금성의 여신, 일곱 메를 쟁취한 욕심 많은 여신의 풍만한 가슴과 도드라진 엉덩이가 온 세상을 환각 속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군중들 사이 여기저기에서 흥분한 여성들이 자신들의 옷을 찢어 내던졌고, 심지어 알몸을 드러낸 여성들이 남성을 공격해 옷을 찢어 버리고 있었다.

이난나가 된 샴하트의 시녀들이 읍장을 난폭하게 잡아끌어 올렸다. 시녀들은 무릎이 꿇려진 그의 옷을 찢어발겼고 알몸이 된 그의 몸에 포도주를 흩뿌렸다. 그리고 그의 머리채와 턱수염을 잡아 입을 벌리게 하였고, 샴하트는 은잔의 사우마를 쏟아부었는데 미쳐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한 액체가 수염을 타고 흘렀다. 잠시 후, 읍장은 눈의 초점을 잃은 채 샴하트의 시녀들에 의해 일으켜 세워졌다. 그리고는 앞장선 샴하트(그녀는 이난나 여신의 현현이다)의 뒤를 따라 시녀들의 부축을 받은 읍장과 갖가지 예물을 두 손에 든 벌거벗은 남성들이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 군중들은 다만 신전 안에서 성혼예식이라 불리는 행위가 벌어질 것이라고 상상할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축제 참가자들은 집단환각에 빠져 버린 듯하였다. 귀족의 부인들과 요조숙녀들을 비롯한 모든 여인이 이날만은 신분의 굴레와 남성들에의 예속에서 벗어나, 이난나 여신과의 접신에서 비롯된 히스테리로 거룩한 성혼예식에 참가하는 이난나의 재속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남성들은 그들의 손아귀에 자진하여 귀순하기도, 때로는 피탈되기도 하면서 그녀들의 의식에 몸을 던졌고 과격한 여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사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니루샤에서 온 여인들 가운데 가장 먼저 이난나의 뜨거운 숨결을 받아 마신 것은 군중이 내뿜는 열기에 이미 숨쉬기 어려울 만큼 몸이 달아올라 있던 굴바하르였다. 그녀는 지구라트 위에서 이난나가 시녀들에 의해 옷이 벗겨지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하였는데, 색기 충만한 그녀의 나신에 홀린 남성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살진 양을 사이에 두고 핏발 선 눈으로 침을 흘리며 으르렁거리는 늑대들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굴바하르의 나신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으나, 서로 눈치를 보며 빙글빙글 돌 뿐 섣부르게 행동하지는 못했다. 성질 급한 젊은이 하나가 격렬한 손놀림으로 수음을 하며 제 기운을 소진하고 있을 때, 스스로 절정감 속으로 빠져가던 굴바하르가 한 남성의 품으로 뛰어들었고 곧바로 격렬한 흘레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나락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주변의 늑대들은 서둘러 그들을 떼어 놓았고 다른 남성이 굴바하르의 요니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으며, 그는 또 곧 떼어 팽개쳐졌고 이어 다른 남성이 그 뒤를 이었다. 그렇게 한 떼의 남성들이 굴바하르의 요니 위에 짙은 밤꽃 향을 쏟아 놓고 또 다른 먹이를 찾아 떠나거나 흥분한 여성들에 의해 린치를 당하거나 하였는데도, 굴바하르는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몸을 떨며 암술머리를 고양하고 있었다.

의식의 막바지에 온통 검은 벨벳으로 치장한 샴하트가 이난나의 상징인 팔각 별이 장식된 지팡이를 들고 신전 앞으로 나왔다. 화려한 복식을 한 두무지는 여전히 향락을 온몸에 덧바르고 있었으나, 이제 지하세계를 향해 떠나는 이난나는 그곳마저 정복하려는 야심과 어둠조차 제빛을 잃게 하고야 말 요염을 한껏 드러내며 신전 회랑을 한 바퀴 돌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드렇습네까? 좀 난잡하긴 하디요?

귀슈탐이 아오슈나르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글쎄요. 이방인의 눈으로 뭐라 한마디로 말하긴 어려울 것 같군요. 좀 더 공부를 해 봐야 할 것 같네요.

-기까딧 거이 공부는 무슨 공붑네까? 보신 그대로 입네다. 오래된 니야기디요. 물론 녀뎐히 이난나 여신의 권능을 믿고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덜이레 많습네다만, 것 보담두 축제를 통해 개디구 눌려있던 심사레 풀어두는 기능이 더 큽네다. 기래서 겔국에는 에미나이들을 위한 축제가 된 거이디요.

귀슈탐의 이야기로는 제의의 형식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억눌린 여성들을 위한 축제로서의 성격은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난나가 유별나게 대담하고 도전적인 성격의 여신인 데다가 성과 사랑, 질투의 여신일 뿐 아니라 일곱 마리의 사자가 끄는 전차를 탄 전쟁의 여신이기도 하여서, 축제에 나온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이난나의 분신으로서 행동하였다. 며칠에 걸쳐 계속되는 기간의 행위에 대해서는 면책이 되었으므로 그네들의 몸짓은 더욱 거칠어진다. 보통은 피임을 위한 조치들을 하지만 결혼한 여성들이 이 기간을 통해 임신한 아이는 남편의 아이로 인정되는 게 통례였다. 그러나 이난나의 아이들이라는 비하와 차별의 뒤끝에서 가정 혹은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오슈나르는 니루샤로 돌아온 후에야 축제현장에서 있었던 굴바하르에 관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다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럼에도 왠지 모를 허랑한 감정이 오물을 다 씻어내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 때처럼 찝찝하게 남아 있었다.

아오슈나르는 얼굴에 멍이 든 채 다른 이들보다 먼저 니루샤로 돌아온 로자의 말을 듣다가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이미 축제현장에서 보았던 난잡한 집단환각의 장면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기도 하였지만, 거기에서 잘 아는 누군가가 어떠했다는 얘기를 구체적으로 들었을 때 갖게 될지도 모르는 편견이 두렵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미 우르의 남성들이 굴바하르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면서 더욱 추잡하게 각색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아오슈나르는 스멀스멀 다가오는 어둠의 힘을 느꼈다.

며칠 후, 굴바하르가 축제의 마지막까지 잘근잘근 씹어 먹었는지 몹시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왔다. 그녀는 비록 땟국물이 얼룩진 얼굴에 영혼이 빠져나가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비교적 깨끗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마구쉬 님요, 아니 오 오라버니······ 지 왔니더. 좀 늦었지예!

그녀는 겨우 인사를 하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계속)

 

 

------------------

1) 이난나 여신의 남편. 이난나가 지하세계에서 죽임을 당했을 때, 애도하지도 않고 화려한 복장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하는 것을 알게 된 이난나의 분노를 샀다. 이로 인해 이난나를 대신해 지하세계에 갇히게 된다.

2) 세상의 여주인임을 상징하는 옷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1.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9

    *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을 등불로 삼아 스스로에 의지하며 살아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 진리에 의지하라. 아베스라는 동방의 성자 고타마로부터 전해져 온다는 경구를 읊조렸다. -아오슈나르여! 거기서 도를 보았소이다 그...
    Date2025.03.14 By관리자 Views26
    Read More
  2.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8

    굴바하르는 충격이 좀 컸는지 며칠을 자신의 숙소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종일 우두 멍하니 누워 뚫린 천정의 빛우물을 쳐다보다, 우샤가 보리를 불려 끊여낸 죽을 들고 들어가면 겨우 일어나 바싹 구워진 난을 뜯어 그것을 떠먹었다. 다행히 그녀의 식욕은 여...
    Date2025.02.08 By관리자 Views42
    Read More
  3.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7

    얼마 후, 하란에서부터 함께 길을 걸었던 낙타 바토가 입술을 심하게 떨고 연거푸 침을 뱉어내더니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반 식경이 지나자 땅이 심하게 흔들리고 비히브(beehive, 원추형 흙집)의 벽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누군가는 땅이 울더라고 ...
    Date2025.01.13 By관리자 Views43
    Read More
  4.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6

    5 밤새 잠들지 못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던 아베스라는 이른 새벽녘에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아직 어둠은 곤한 몸을 일으켜 서쪽으로 물러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동구의 나무 아래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는 두 손을 마주 쥐어 단전에 얹고 호흡을 골...
    Date2024.12.08 By관리자 Views53
    Read More
  5.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5

    -하란에서 초주검이 되었다가 겨우 몸을 추스른 굴바하르가 또다시 매를 맞고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제게 손을 내밀었죠. 아오슈나르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엇 때문이었나요? 왜 이난나 신전에서 또 그렇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
    Date2024.11.05 By관리자 Views56
    Read More
  6.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4

    4 -오빠야! 삼 년 전, 노루즈 축일을 지내고 얼마 후에 굴바하르가 아오슈나르의 방으로 찾아왔다. 무언가 작심을 한 듯한 얼굴이었고, 차 한 잔 마실 새도 없이 선언하듯 말을 쏟아냈다. -그동안 오빠야가 참말로 고생이 많았니더. 그래서 얘긴데, 인자는 오...
    Date2024.10.06 By관리자 Views67
    Read More
  7.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3

    굴바하르는 물주머니를 손에 들고, 몇 장 남지 않은 난이 담긴 자루를 둘둘 말아 허리춤에 묶고, 희붐한 빛이 황야의 대지를 물들이기 시작하는 새벽녘에 병자의 초막을 나섰다. 누렇게 변해버린 관목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거친 땅을 지날 땐 발을 잘 못 디...
    Date2024.09.10 By관리자 Views83
    Read More
  8.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2

    Ⅱ 3 -굴바하르를 만나고 내 언어는 길을 잃고 말았소. 아, 나는 이제 혹독한 밤을 맞을 것이오. 아오슈나르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아오슈나르가 예쁜 꽃이라고 지칭했던 굴바하르를 처음 만난 것은 하란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였다. 그가 순회 전도사제1)로...
    Date2024.08.04 By관리자 Views75
    Read More
  9.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1

    2 아베스라가 니루샤에 도착했을 때, 마을은 무거운 공기가 뜨거운 지열과 대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작은 마을 입구 공터엔 네 마리의 말이 머리를 아래위로 거세게 흔들며 푸억푸억 허연 김을 내뿜기도 하고, 앞발 굽으로 땅을 긁어 흩뿌리고 있었다. 아베스...
    Date2024.07.08 By관리자 Views92
    Read More
  10.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0

    Ⅱ 1 '모름지기 인간이라 허는 존재는 그 성품에 걸맞은 신을 머리에 이고 사는 게라. 허믄 신은 또 어떠한 갑? 그도 자신과 이어진 인간의 성깔머리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이 말입지. 따라서 자신을 갈고닦어야 허는 이유는 충분허지 않은 갑? 내 수...
    Date2024.06.04 By관리자 Views101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