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적공간
- 왜 노인들은 그곳에 갇혔는가
탑골공원은 3.1 운동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상징성보다 근래에는 노숙자들이나 노인들의 휴식 공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어쩌다 그 근처를 지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 같은 노인이건만 별에서 떨어진 것처럼 그들과 구별 짓고 싶은 오만이리라. 잿빛 기운이 감도는 어두운 분위기는 주위 금은보석상과 대조를 이룬다. 다양한 노인 문화를 만들어 내던 파고다 공원이 재정비하여 탑골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오히려 종묘 시민공원 광장까지 노인들의 공간은 확장되었다.
"퇴적 공간"의 저자 오근재는 대학에서 퇴임한 후 노인으로 분류된 자신의 처지에 충격을 받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노인이라는 존재에 호기심을 갖는다. 강의 상류로부터 떠밀려 내려 하류에 쌓인 모래섬과 같은 '퇴적 공간'에 모이는 노인들의 삶을 조명한다. 저자는 한동안 탑골공원과 종묘시민공원 일대를 탐사하며 노인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했다.
100세 시대 운운하는 요즈음 노인을 규정짓는 나이를 좀 더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이 책에서는 65세 이상을 잠정적 노인으로 규정한다. 한때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소위 '어르신'으로 불리는 노인들이 갖가지 사연을 안고 탑골공원과 종묘 시민공원으로 몰려든다. 바둑과 장기로, 잡담으로, 시국 강연으로, 서서 마시는 한 잔의 소주로, 아줌마들과 어울려 마시는 커피로 시간을 죽이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건강한 신체와 지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노동 시장에서 퇴출당하면 사회적인 쓸모를 인정받기 어렵고 상품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저자는 노화란 상품화되고 물화된 인간이 그 쓸모를 잃고 시장의 변두리로 밀려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젊은이들은 정보도 지혜도 나이 많은 어르신 대신 호주머니 안에 있는 스마트폰에서 순식간에 구한다. 빛의 속도처럼 빠르게 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노인들은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무능력자로 밀려난다. 충분한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 집에서도 밥만 축내는 "삼식이"로 전략하기 십상이다.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이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간다. 널리 알려진 종로 3가 주변, 탑골공원, 종묘공원, 허리우드 클래식, 서울노인복지센터, 인천 자유공원 등에서 연대하고 상실감을 달래며 또래의 문화를 형성해 간다. 무료급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단돈 몇천 원으로 이발도 하고 영화도 보고 커피도 마시며 격리된 장소에서 일상을 반복하며 늙어가는 연습을 한다.
나 또한 지하철 개찰구에서 울리는 차별된 소리로 날마다 노인이라고 사방에 알리는 실버 세대다. 젊은이와 늙은이를 구별하는 교통카드 색깔로도 부족해 소리로 한 번 더 노인임을 각인시킨다. 노인을 노인이라고 알려주는 정부의 친절한 배려에 마음이 편하지 않다. 저자의 말대로 젊은이들과 분리되고 사회로부터 격리당하는 소외감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무능력자로 탈바꿈되어 간다는 징표 같아 움츠러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탑골공원에서 만난 박카스 할머니에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노인들이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은 퇴적 공간에 머무르는 노인들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저자는 노인들을 공원이나 각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복지센터로 끌어내지 말고 가정과 작은 단위 공동체의 일원으로 복귀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은 노동의 기회를 제공해서 존엄성을 지키고 주체권을 회복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라고 한다. 무료로 제공하는 지하철 요금, 병원비, 약 값, 독거노인 생활보조금, 치매 환자를 위한 데이케어 등 정부가 노인 개개인을 대상으로 지원하는 제도가 활성화될수록 역설적으로 노인들은 가정을 떠나 더욱 고독한 개별자가 된다고 한다. 국가가 모든 개별자를 상대로 책임지려는 무모함에서 벗어나 가정과 공동체와 더불어 그 부담을 나눠지려는 정책으로 복지 문제를 바꾸기를 저자는 당부한다.
늙는다는 것은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 가까이 다가옴을 의미한다. 잘 죽기 위해서 남은 나날을 가치 있게 살아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저자가 제안한 노동의 기회도 국가가 제공하는 보다 나은 복지정책도 노인들에게 소중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노인들 스스로 잉여 인간임을 자처하며 삶을 낭비하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삶은 그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느리고 힘들더라도 과거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대신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며 속도에 발맞추도록 애써야 한다.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공동체가 팔을 벌릴 수 있도록 말이다. 헤르만 헤세의 글이 떠오른다. "지나간 노래를 부르고 지난날의 지팡이를 다시 휘두르고 옛날에 좋아하던 먼지투성이의 길을 가면서 다시 젊어져 모든 게 전과 같다고 상상하는 일은 가치가 없다."
"퇴적 공간"은 이 땅의 노인들이 머무르는 공간이 더욱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삶의 공간이 되도록 함께 모색하며 사유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