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 죽음과 억지로 춘 춤
"뭐 그런 거지." 세어 보진 않았지만, 소설에 106번 나온다고 한다. 냉소적인 뉘앙스에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주는 경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에서 죽음 뒤에 후렴처럼 어김없이 따라붙는 말이다. 행성 트랄파마도어인(人)이 죽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의 방식이다. 그들은 죽은 사람이 그 특정한 순간에 나쁜 상태에 처했으며, 그 사람이 다른 많은 순간에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공상 소설 같기도 한 이야기와 낯선 플롯에 책장을 앞뒤로 두서없이 넘기게 된다. 비상한 상상력과 블랙 유머로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한다.
커트 보니것은 미국 최고의 풍자가이며,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다. 독일계 이민자 출신 대가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독특한 유머 감각을 키웠다. 블랙 유머의 대가 마크 트웨인의 계승자로 평가받으며 많은 작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보니것은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징집되었다. 전선에서 낙오해 드레스덴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는 동안, 드레스덴에 히로시마 원폭에 버금가는 인류 최대의 학살극이 벌어졌다. 십삼만 명의 시민들이 몰살당했던 이 체험을 통해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반전 작가로 거듭났다. 특히 20년 동안 무명의 SF 소설가를 세상 밖으로 불러낸 책이 바로 자전적 소설인 <제5도살장>이다. 도살당할 돼지들을 가두어두려고 지은 건물을 미군 전쟁포로 수용소로 사용한 곳이다.
빌리 필그림은 눈을 깜빡여 시간과 공간을 종횡무진 누빈다. 열두 살의 어린 시절로 갔다가 마흔네 살로 돌아와 트랄파마도어 행성에 있는가 하면 언제 스물한 살이 되어 드레스덴 전쟁포로로 돌아온다. 바꿀 수 없는 과거, 현재, 미래를 들락거리며 모든 사건과 무작위로 만난다. 그는 딸의 결혼식 날 밤에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온 비행접시에 납치된다. 그곳에서 몇 년을 있었지만, 지구를 떠나 있었던 시간은 고작 백만분의 1초에 지나지 않는다. 트랄파마도어인은 손바닥에 있는 녹색 눈으로 4차원을 본다. 모든 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지구의 수많은 영혼이 길을 잃고 비참하게 헤매는 것은 트랄파마도어인처럼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빌리는 믿는다. 그들은 "왜"라는 토씨를 달지 않는다. 그냥 이 순간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른 뒤 트랄파마도어인들은 빌리에게 인생의 행복한 순간에 집중하라고, 불행한 순간은 무시하라고-예쁜 것만 바라보고 있으라고, 그러면 영원한 시간이 그냥 흐르지 않고 그곳에서 멈출 것이라고 조언했다."
대부분 어린 청소년들인 전쟁포로들 사이에서 빌리는 삶의 의지가 없는 무기력한 인물이다. 그중 나이 많은 부랑자는 수용소 생활이 나쁘지 않다고 계속 노래하다가 죽어간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고분고분 살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얼굴들과 포개진다. 에드거 더비는 고등학교 교사였고 포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마흔네 살이다. 나치가 된 미국인 하워드 W, 캠벨 2세 앞에서 나치즘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용기 있고 정의로운 사람이다. 수용자 중 가장 훌륭한 그는 지하묘지에서 하찮은 찻주전자를 가져왔다가 들킨 약탈죄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총살당한다. 어처구니없는 그의 죽음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전쟁의 잔혹함을 이보다 더 시니컬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싶다. 저자가 에드거 더비의 황당한 죽음이 소설의 클라이맥스가 될 거라고 예고한 이유가 아닐까. 가장 존재감 없는 빌리는 전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지만 결국 정신병원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
<죽음과 억지로 춘 춤>이란 소설의 부제처럼 유머와 풍자 속에 전쟁의 트라우마로 소설을 쓰면서 감내했을 저자의 고통이 전해진다. 해학적인 표현에 키득거리다가 비열한 인간들에 치를 떨게 되고 또 금세 허망해진다. "뭐 그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