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길목연재] 책이 가슴에 남긴 것들

d2d0d9

작별하지 않는다 - 꿈처럼 스며오는 지극한 사랑의 기억

posted Apr 07, 2024
Extra Form
발행호수 서옥경
글쓴이 79

작별하지 않는다

- 꿈처럼 스며오는 지극한 사랑의 기억

 

서옥경_20240403_121354.jpg

 

 

바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바다가 주는 자유와 평화의 느낌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짙푸른 바다가 포말을 이고 밀려든다. 썰물이 스쳐간 모래사장 바닥이 시커먼 발자국으로 뒤엉켜있다. 게다가 끝없는 수평선이 아닌 끝이 보이는 수평선이라니. 무명천으로 바다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표지 그림이 제주 4·3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봉쇄된 바다 안쪽은 분명 금단의 공간이 되었으리라. 제주도는 한때 같은 하늘 아래 소통이 단절되고 침묵이 강요된 섬이었다. 누구도 감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던 야만의 서사가 묻힌 곳이다. 아직도 70여 년 전 한 맺힌 슬픈 넋들은 위로받지 못하고 있다.

 

소설은 경하가 꾼 꿈 이야기로 시작된다. 작가인 경하가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낸 후 힘든 시간을 보낼 때 꾸었던 꿈이다. 경하는 그 꿈을 형상화하는 과정을 친구 인선이와 기록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하지만 서로 일정을 조율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사진과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을 했던 인선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간다. 어느 날 인선은 목공 작업 도중 손가락 마디 두 개가 잘린 사고를 당한다. 급히 서울로 와서 봉합수술을 받는다. 그녀는 퇴원할 때까지 제주 집에 홀로 남은 앵무새 '아마'를 돌봐달라고 경하에게 부탁한다. 경하는 대설주의보와 강풍경보를 무릅쓰고 제주 중산간 마을을 사투를 벌이며 찾아가지만 새는 이미 죽었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외딴 인선의 집에서 경하는 완전히 고립된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 앞에 죽은 새와 서울 병실에 있어야 할 인선이 나타난다. 인선과 경하, 누가 혼으로 나타났는지 두 사람의 존재가 안개처럼 흐릿한 가운데. 인선은 제주 4·3에 얽힌 참상과 아픈 가족사를 경하에게 들려준다.

 

온 가족을 잃고 십오 년을 감옥에서 보낸 인선의 아버지와 날카로운 쇠붙이를 깔고 자야 악몽을 안 꾼다는 엄마, 강정심, 인선의 부모는 제주 4·3의 희생자다. 눈만 오면 강정심은 아무도 꺼내지 않는 그때의 기억을 소환한다.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1948년 11월 중순부터 석 달 동안 중산간이 불타고 민간인 삼만 명이 살해되었다. 예리하게 벼린 칼 같은 기억들이 습격하면 그녀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얼굴에 하얗게 쌓인 눈을 한 사람씩 닦아가며 부모의 시신을 찾았던 강정심은 동생을 살리기 위해 자기 손가락을 깨문다. 피를 내어 동생이 빨게 했던 고통의 순간이 오히려 그녀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언니와 단둘이 남은 강정심은 오빠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육지를 헤매고 자료를 모았지만 허사였다. 피투성이로 모래밭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 군인들이 바다에 던질 때 젖먹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절멸·광기가 허락된 제주 4·3은 인선의 엄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악몽을 꾸며 이를 갈고 눈물을 흘리게 한 트라우마였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인선은 희생자 유가족을 인터뷰하고 사건을 복기하면서 알면 알수록 인간의 잔인함에 말을 잃는다. 어두운 삶을 살았던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그녀는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엄마의 사랑에 스며든다.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눈이 내리면 직접 본 적도 없는 엄마가 겪었던 그때의 일들을 인선도 끄집어낸다.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작가 한강은 이 책이 지극한 사랑의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속섬허라(숨을 죽이라는 뜻)는 제주 4.3의 아픔을 드러내는 고유한 언어가 되었다.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만으로 숨죽이며 버틸 때 부모가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공포와 폭력으로 비록 몸은 앗아 갔지만 죄 없는 영혼마저 지울 수는 없을 터이다. 작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골짜기와 활주로 아래 슬픔의 심연에 묻힌 그들의 영혼이 온전히 위로받기까지는.

서옥경_프로필.png


  1. 아버지의 해방일지 - 다시 찾은 아버지의 얼굴

    빨치산. 어릴 적 입에도 담지 못할 공포의 언어였다.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입 벙끗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어느 누구도 빨갱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쩌면 아직까지 아픈 시대가 남긴 빨치산의 심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
    Date2024.11.05 By관리자 Views11
    Read More
  2. 하틀랜드 - 세계의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뼈 빠지게...

    하틀랜드 (heartland) - 세계의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쫄딱 망하는 삶에 관하여 가계도가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보편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족의 이미지가 아니다. 스물여섯 살에 다섯 번째 결혼한 할머니를 포함한 복잡한 가족관계는 결...
    Date2024.10.06 By관리자 Views18
    Read More
  3. 올리브 키터리지 - 좀 남다른 어머니, 또는 어른을 위한 성장소설

    올리브 키터리지 (Olive Kitteridge) - 좀 남다른 어머니, 또는 어른을 위한 성장소설 누가 말했던가. 말에 영혼이 깃든다고. 나는 이 말을 철석같이 믿는다. 행여 내 말 한마디에 남이 상처를 받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편이다. 조심한다고 해도 뒤돌아보면 ...
    Date2024.09.10 By관리자 Views19
    Read More
  4. 길, 저쪽 - 밤의 강물에 스며든 사랑 이야기

    길, 저쪽 정찬 | 창비 | 2015 - 밤의 강물에 스며든 사랑 이야기 아픈 과거 역사의 소환은 때론 피로감으로 외면하고 싶어진다. 최근 상영한 영화 '서울의 봄'처럼 되새기고 싶지 않은 뻔한 서사로 치부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
    Date2024.08.04 By관리자 Views21
    Read More
  5. 스토너 - 조용하고 절망적인 생애에 관한 이야기

    스토너 - 조용하고 절망적인 생애에 관한 소박한 이야기 흔히 우리는 남들과 비교하며 지금 주어진 삶 그대로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기대하며 더 높이 더 멀리 가기를 갈망한다.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실패라는 두 글자를 떠...
    Date2024.07.08 By관리자 Views34
    Read More
  6. 대성당 - 눈은 멀었지만 잘 볼 수 있는...

    대성당 - 눈은 멀었지만 잘 볼 수 있는... "어쩐지 전에 이미 본 사람 같구먼." 맹인이 주인공 화자에게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첫마디가 뒤통수를 내리친다. 화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마찬가지입니다."라고 응수한다. 만약에 내가 같은 상황에 ...
    Date2024.06.04 By관리자 Views42
    Read More
  7. 일곱 해의 마지막 - 그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

    일곱 해의 마지막 그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언어의 세계를 떠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옥심의 말이 차디찬 북녘땅에서 무채색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독백처럼 들린다. 왜 같은 하늘 아래 그들은 시대의 권력 앞에서 좌절하며 희망과 꿈 ...
    Date2024.05.07 By관리자 Views47
    Read More
  8. 작별하지 않는다 - 꿈처럼 스며오는 지극한 사랑의 기억

    작별하지 않는다 - 꿈처럼 스며오는 지극한 사랑의 기억 바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바다가 주는 자유와 평화의 느낌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짙푸른 바다가 포말을 이고 밀려든다. 썰물이 스쳐간 모래사장 바닥이 시커먼 발자국으로 뒤엉켜있다. 게다...
    Date2024.04.07 By관리자 Views59
    Read More
  9. 제5도살장 - 죽음과 억지로 춘 춤

    제5도살장 - 죽음과 억지로 춘 춤 "뭐 그런 거지." 세어 보진 않았지만, 소설에 106번 나온다고 한다. 냉소적인 뉘앙스에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주는 경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에서 죽음 뒤에 후렴처럼 어김없이 따라붙는 말이다...
    Date2024.03.12 By관리자 Views30
    Read More
  10. 나는 고발한다 -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의 양심

    나는 고발한다 -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의 양심 "진실은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나는 고발한다!>를 쓴 저자 에밀 졸라의 메달에 새겨진 글이다. 1897년 12월부터 1900년 12월까지 3년 동안...
    Date2024.02.06 By관리자 Views43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