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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책이 가슴에 남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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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 다시 찾은 아버지의 얼굴

posted Nov 0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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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호수 서옥경
글쓴이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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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어릴 적 입에도 담지 못할 공포의 언어였다.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입 벙끗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어느 누구도 빨갱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쩌면 아직까지 아픈 시대가 남긴 빨치산의 심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자들도 있으리라. 정지아의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펼치며 빨치산의 의미를 다시 한번 살펴본다. 빨치산은 파르티잔(partisan)에서 온 말이다. 파르티잔은 무장한 전사로서 정규부대의 정식 부대원이 아닌 비정규군 요원을 가리킨다. 1940년대와 1950년대 한반도 이남에 있었던 조선 인민유격대가 흔히 '빨치산'으로 불린다. 당시 국군은 이들을 무장공비라 불렀다.

 

소설은 "아버지가 죽었다."로 시작된다. 그런데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었단다. 희화화된 죽음의 묘사가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준다. 화자인 딸의 아버지, 고상욱은 전직 빨치산으로 조직 재건을 위해 위장 자수한 사람이다. 그는 이십여 년 감옥살이 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고향인 구례에 터를 잡았다. 고상욱은 실패한 사회주의자였고 가난한 농부였다. 어머니도 같은 사회주의자로 아버지의 동지였지만 훨씬 현실적이다. 달라진 세상에서도 화자의 부모는 여전히 혁명가의 신념으로 살아간다. 딸의 이름도 아버지가 활동했던 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의 리,를 딴 고아리다. 소설은 다소 무거운 주제를 시종일관 코믹하게 다루지만 이웃과 더불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서사는 이분법적 사고로 갈라치기하는 이 시대를 돌아보게 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장례식을 치르는 3일 동안 만난 조문객들을 통해 딸이 아버지를 재발견하고 깊이 이해해 나가는 과정을 담았다. 아버지의 여러 지인들이 들려준 이야기와 생시의 부친 모습을 소환하며 빨치산으로 가려졌던 아버지의 진짜 얼굴을 찾는다. 화자는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비로소 빨치산의 딸로 가슴 짓눌렸던 지난 시간들과 화해하고 자신을 옥죄었던 굴레의 갑옷을 벗는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며 해학이 넘치는 장례식장 분위기는 시트콤 보듯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항꾼에 또····올라네"라며 수십 차례 조문하는 사람들의 사투리에 우리의 옛 정서가 올올이 녹아있다. 빨치산의 장례식장에 조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고상욱이 세상과 어우러지며 만든 인연은 실로 다양하다. 평생을 함께한 소학교 친구와 청춘을 함께했던 빨치산 동지들부터 어린 소녀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장례식장 황사장은 여순사건으로 아버지를 잃고 고상욱을 친아버지처럼 모셨다. 박 선생은 동기동창으로 아버지와 서로 생각은 달랐지만 "그래도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라며 막역지우로 지냈다. 아버지의 꼬임에 빠져 빨치산이 되었던 형을 잃은 베트남전쟁 상이용사 노인이 빨갱이가 잘 죽었다고 소란을 피운다. 고상욱이 평생 동안 견디어 낸 간난신고의 삶을 짐작케 한다. 특히 눈에 띄는 조문객은 노랑머리 소녀다. 샛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소녀는 담배를 피우고 고등학교도 중퇴했다. 베트남 엄마를 둔 이주민 소녀는 아버지와 담배 친구가 된 후 달라졌다. 검정고시와 마용사 자격증을 준비하며 열심히 산다. 겉모습을 보지 않고 가슴 밑바닥까지 사람을 신뢰한 고상욱이기에 가능한 인연이다. 아버지의 살아있는 유일한 혈육인 작은아버지는 허구한 날 술에 취해 집안 다 말아먹고 남의 인생 망친 놈으로 아버지를 철천지원수로 취급했다. 하지만 뒤늦게 형의 유골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작은아버지 모습은 이념이 갈라놓은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흔인 것이다.

 

동네 머슴을 자청한 고상욱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동네일에 발 벗고 나섰던 사람이다. 그는 남 일이 우선이고 사람을 믿는 순진한 호구였다. 어머니와 딸이 그런 아버지를 못마땅해했다. 하룻밤을 재워준 방물장수에게 뒤통수를 맞아도, 보증 서준 먼 친척이 야반도주를 해도, 분노하기보다 "오죽흐먼"을 되뇌며 오히려 안타까워한다. 평생 사회주의자로 살면서 평등세상을 꿈꾸었던 아버지는 세상이 바뀌어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상욱은 인간의 도리를 다함으로써 이념과 종교의 경계를 허물어트린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한 감방에 있었는디 갸들은 지 혼차 묵들 않애야, 사식 넣어주는 사램 한나 읎는 가난뱅이 들헌티 다 노놔주드라, 단 한멩도 빠짐없이 글드랑게, 종교가 사상보담 한질 윈갑서야"

 

조문객들이 즐겨 말하는 함께라는 뜻을 지닌 "항꾼에"는 이념으로 갈라진 세상을 무색하게 만든다. 암디나 뿌레삐리랬다는 유언에 따라 딸이 유골을 뿌릴 때도 항꾼에 뿌린다. 친자식 이상으로 고상욱을 아버지처럼 모셨던 학수와 노랑머리 소녀가 함께한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아버지에 대한 애도는 오랫동안 축적된 원망의 감정을 지우고 자신의 뿌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민중의 한걸음, 한걸음이 쌓여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는 진지한 마음"으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빨치산의 죽음은 세상이 거부했던 삶을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살아냈던 아버지의 해방을 넘어서 딸의 해방까지 이루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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