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첫날 밤 그리고...
다시 처음
60대 중반을 지나며 나에게 처음은 이제 없을 줄 알았다. 그저 그만한 삶의 영역과 경험들에 안주하며 그마저도 감사했다고, 이제는 자식들에게나 신경 쓰이지 않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찾아온 이 섬으로의 초대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다시, 처음이었고 그것은 마치 내 삶이 건네주는 마지막 연애편지 같기도 했다.
나는 40대 후반에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객지생활을 했는데 그때 알았다. 내가 얼마나 혼자살이에 최적화 되어 있는지를. 친화력 꽝에 낯가림이 심하고 누가 말을 붙이기 전에는 먼저 다가가 말을 꺼내는 법이 없는 내숭 9단에 재수없는 科인줄만 알았는데, 그 시절의 나는 겉으로야 그동안의 습에 눌려 자제하고 있었을 뿐 누구나 보면 웃으며 다가가 재잘거리고 싶게 신이 나고 들떠 있었다.
그 낯선 곳, 처음 보는 사람들이 주는 적당한 긴장감과 생소함이 좋았고 처음 마주치는 매 순간이 다 좋았다. 특히나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나를 맞아주는 그 빈 공간의 느낌이 정말 환장하게 좋았다. 집 안의 모든 것이 내가 놓아둔 곳에 그대로 있으면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 절대적 수용과 존중과 환대의 느낌. 그곳은 응축된 침묵이 고여있는 나만의 세상이었다.
나는 내내 참고 있었다는 듯 숨을 크게 내쉬고 “나 왔어.” 하며 아무도 없는 빈 집으로 들어섰다. 나는 드디어 미쳐가고 있었던 걸까? 아니, 나는 비로소 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혼자는 결핍이 아닌 나를 만나고 나로 채워지는 충만 그 자체였다,
군산의 60-70년대의 삶의 애환이 묻어나는 분위기와 정서가 좋았고 아직 개발되기 전의 수수한 거리들과 풍경에 매료되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나를 이곳으로 불러내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곤 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 같다. 내 신앙이 관념의 틀을 깨고 삶의 현장으로 들어온 것은.
그리고 나는 지금, 딱 그때의 가난한 동네, 골목들, 사람들 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름만 다를 뿐, 내가 나를 만나 나로 살았던 그리운 그 처음의 시절로.
그러나 현실은
처음 섬에 들어올 때 가지고 왔던 짐 보따리다.
밥그릇1, 국그릇1, 밥할 용도와 국거리용 냄비2, 접시2 프라이팬1, 수저 세트, 머그컵 하나와 성경책과 아끼는 책 서너 권, 그래도 파도소리만 들으며 살 수는 없으니 시디플레이어를 챙겼다.
나머지 짐으로는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배낭에 넣었고 이불은 누가 선물을 해준다기에 미리 그곳으로 부쳐달라고 부탁을 했다.
늘 결심을 하고는 무너지거나 흐지부지 되는 의지박약의 나로서는 환경의 변화가 그나마 도움이 되기에 이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 비우고, 간소하게, 성경적으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그야말로 엄중(?)하게 했던 것이다.
그냥 있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살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사택에 뭐가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아마 그때 나는 언감생심, 가난하고 청렴한 주의 종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일테면 언젠가 영화로 보았던 서서평 선교사 같은 이미지 말이다.
냉장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 보지. 다행히 내 곁에는 냉장고 없이 사는 친구도 있다.
세탁기? 혼자 살림인데 손빨래 하지 뭐.
티브이는 볼 일도 없을 텐데 없으면 더 좋지. 나는 그때 분명 이런 맘이었는데....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신심 깊으신 집사님께서 전기밥솥에 티브이에 세탁기까지 다 새로 장만해 놓으셨고 집안에는 냉장고는 물론이고 침대에, 책상에, 식탁에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었다. 뿐이랴, 김치냉장고에는 김장김치가 두 통이나 들어있었고.
부디
나의 떨떠름한 표정을 들키지 않았기를.
첫날 밤
화장지를 들고 오신 두 분 교인과의 상견례도 마치고 드디어 맞이하는 혼자만의 첫날밤. 현관문을 잠그는데 한 생각이 들어왔다.
"이 문을 잠그면 혹 이 밤에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겠구나."
도대체 맨날 잘 때마다 문을 착실하게 잠그고 자던 내가 새삼스럽게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잠시 그대로 서서 ‘그러네~ 근데 외부의 침입은 막을 수 있잖아’ 중얼거리며 문을 잠그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 후로도 그 생각은 종종 내 등을 두드렸다.
뭐지? 하고 하루는 가만히 그 생각을 붙들고 작업을 했는데 그건 도움과 보호로 압축이 되었고 다름아닌 내 삶의 패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도움을 받는 쪽보다 언제나 나를 보호하는 쪽을 택하며 살았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울 때도 나는 주변에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어려움을 감수하는 편이었다. 혹시라도 누군가의 도움이 내 삶의 경계를 건들며 그들에게 간섭할 빌미를 주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자본은 어려움을 무슨 해충이라도 되는 듯 서둘러 박멸하라고 겁을 주지만
섣부른 도움은 오히려 본질을 훼손하고 본연의 모습을 망가뜨릴 수 있기에 나는 지금도 눈치껏 경계하는 편이다.
어느 날 집사님과 이야기 중에 알게 된 사실은, 같이 있던 교인 한 분이 치매로 섬을 나가시고 나니 주변에서 다들 그러더란다.
"인자 여그는 목회자는 안 와라, 누가 여까정 두 사람 보고 올라 그러겄소."
그럴 때마다 서러워 울면서 기도했다고 하셨다.
"제발 하나님 마음에 드는 선한 목자를 보내달라고."
그러니까 나는 결국 이 분들의 기도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여기까지 온 셈인데 물론 내가 누군가의 기도의 응답이 된다는 건 황송한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이 부분이 양심상 걸렸다. 내가 과연 하나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을까?
나는 전도사를 하면서 전도사 같지 않다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는데 그럴 때마다 유감 1도 없이 곧바로 인정했다.
"예, 사람 잘 보시네요. 저 날라리여요"
이 자타 공인 날라리가 혹시 하나님 마음에 한 가지라도 들었던 부분이 있다면 그건 뭘까?
아마도 그 첫날 밤에 그분의 메시지는 그런 것 같았다.
"내 집을 잘 보호해 주렴.
내 식구들의 신앙을 잘 지켜주렴.
혹 어려움이 닥쳐도 서둘러 도움으로 달려가지는 말고 나를 기다려 주렴."
브니엘의 아침
첫날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성공한 것 같애"
"어?"
"내 영혼이 원하는 자리에 온 것 같아.
자기가 있어야할 자리에 있는 것, 그게 성공이잖아."
"그렇지. 축하해"
내 인생과는 무관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무관할 것 같았던 성공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내 입을 통해 훅~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화려하고 거창하기 보다는 오히려 소박하고 나와 결속력이 느껴지는 다정함과 친밀함을 담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 인생에 마지막 퍼즐조각이 맞춰지는 것 같았고, 지금껏 걸어오며 만났던 모든 사람들과 사건들이 그냥 다 이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