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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하죽도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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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불청객이 찾아오지만...

posted Nov 0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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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호수 관지
글쓴이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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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섬에는 멧돼지가 극성이다. 밤마다 밭을 헤집고 다니며 파내고 파먹어서 마을이 성한 데가 없다. 우리는 매일 아침 그 댁 밭은 안녕하신지 안부를 나누고 저녁에는 모처럼 모였다가도 어둠이 내리기 전에 서둘러 흩어진다. 멧돼지가 수영을 잘한다는 것은, 그것도 아주 잘해서 바다를 헤엄쳐 섬에 들어온다는 것은 여기 와서야 알았다.  

 

며칠 전에는 야생 갓을 따러 바닷가에 내려갔다가 그 뿌리까지 다 도려내듯 파먹은 흔적을 보고 놀랐다. 설마 이런 것도 먹으랴 하는 것들까지 그야말로 남김없이 먹어치우며 돼지 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평소 느긋하고 서두르는 법이 없는 어르신들께서는 멧돼지 피해가 늘어나자 서둘러 농작물들을 거두기 시작하셨는데 그 모습은 마치 먹이를 사이에 둔 인간과 멧돼지와의 쟁탈전 같아 웃음도 나고 씁쓸하기도 했다. 

 

조금만 더 여물기를 기다리다가 하룻밤 새 고구마를 약탈당하고, 힘들게 낫질해서 콩을 수확했는데 막상 안 익은 것들만 몇 개 달려있어서 허탈해지기도 하는 풍경. 그러니까 수확하면서도 조금만 더 두면 좋을 것을 아쉬워하고 또 두었다가 멧돼지에게 털리고 아쉬워하느라 우리 섬의 가을은 아쉬움 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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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농사짓기 어려운, 비탈지고 외진 땅에 물을 길어대며 한 땀 한 땀 곡괭이질을 하고 호미질해서 심고 가꾼 농작물들은 사실 자식처럼 소중한데 어찌나 야물딱지게 여물만하면 먼저 와서 입을 대는지 너덜너덜해진 작물들을 보면 한숨이 나면서도 "어찔 것이여 지들도 먹고 살라고 허는 짓인디" 하며 어이없이 웃고 만다. 

 

그래 야속하면서도 한편 딱하다. 그래도 딱하다고 나눠 먹으며 오순도순 사이좋게 살 수는 없는 일. 지금은 서너 마리인 것 같은데 만약 새끼라도 낳으면 어찌 될까, 정작 우리가 못 살고 쫓겨나는 건 아닐지 지레 걱정이 되기도 해서 군청에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해봐도 시원한 해결책이 없다. 덩달아 자식들은 빨리 섬에서 나오시라 전화를 해대는 이 공포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그래도 평생을 바다에서 사신 분들이 이 난관을 어찌 넘기시려나 내심 궁금하고 기대도 되었는데....(물론 새벽마다 기도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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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슬슬 반격의 준비를 개시하시더니 멧돼지가 한 마리 잡혔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의 팔십 어르신께서 놓은 올무에 걸린 것이다. 나는 올무라는 말을 성경에서 보기는 했어도 이렇게 위력이 있는지는 몰랐다. 우리는 적군을 물리친 것처럼 환성을 지르며 즐거워했는데 혹시라도 이게 즐거워할 일인가? 라고 물으시면 곤란하다. 우리는 안전하게 살고 싶고 애쓰게 가꾼 농작물을 잘 지키고 싶으니까. 

 

오늘은 회관에 모여 함께 점심을 먹고 이번엔 올무가 아닌 덫에 걸린 멧돼지를 구경하러 나갔다. 물론 이 볕 좋은 가을날, 소풍이라도 가는 것이면 더 좋았겠지만... 

 

삶에는 뜻하지 않는 불청객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까짓것, 우리의 노장들은 주눅 들지 않으신다. 수세에 몰리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반격하고 기선을 제압하는 이 무명의 인생 용사들이 자꾸만 좋아진다.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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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정어리를 잡으려고 내린 그물에 갈치가 잡혔다.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셨다. 

 

이처럼 전에 없던 멧돼지가 섬에 들어오고 어장의 생태가 변해도 우리의 삶은 왠지 변함없이 이어질 것 같다. 미리 걱정하기보다는 부딪히고 그 과정 속에서 방법을 찾고 헤쳐 나갈 힘을 얻는 우리네 삶의 체질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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