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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하죽도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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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사람들

posted Feb 08, 2025

이름없는 사람들1.jpg

 

내 고향은 고아원입니다.

조금 더 자라서 내 집은 갱생원이 되었고요.

사람들은 나를 보면 피하고

아이들은 돌을 던지기도 했지요.

 

아무 데서나 먹고

아무 데서나 자고

그렇지만 거지는 아니었습니다.

 

쓰레기를 뒤지고

고물을 주워 모으는 넝마주이라는 직업이 있었으니까요.

 

쓰레기를 보면

그게 내 모습이라는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저 팔자려니 했습니다.

 

부모도

친구도

꿈도 없는 외톨이.

 

그러나 그날은

내게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찾아왔습니다.

 

"형씨 함께 싸웁시다"

이 말과 함께 내가 시민군이 되었던 것입니다.

 

장갑차 위에서

택시 앞에서

그리고 도청에서

나쁜 놈들을 무찌르는 용감한 군인이 된 것도

 

김밥을, 물을, 수건을 건네주는 아주머니들의

따뜻한 마음을 받는 것도

너무 좋았습니다.

 

나는 모처럼 사람이 되어

사람 속에서 그날을 뛰었습니다.

 

함께 아파하고

염려하고 땀을 뒤섞는 사람 냄새

눈이 마주치면 나를 받아주던 웃음에 뜨거운 전율이 일었습니다.

 

이미 밖에서는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그곳에서 나는 보았습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나누는 뜨거운 사랑을.

자기의 이익과 상관없이도 주고받는 기쁨을.

 

끝까지 함께 하기 위해

손을 놓지 않던 그 결연하고도 당당한 모습.

 

도청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죽음의 모습으로 나를 찾아와 준 생명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름없는 사람들2.jpg

 

 

내 이름은 윤희.

꽃다운 열아홉이었습니다.

철없던 초등학교 시절을 끝으로 내게 웃음은 떠났습니다.

 

교복을 입은 친구들이 부러워 떼를 쓰다가 죽게 얻어맞고

나는 광주의 방직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반반한 얼굴이 화근이었을까요

아니면 한 푼 쓰지 못하고 시골로 내려보내야 했던

돈이 원수였을까요.

 

결국 목욕탕 가는 것까지도 감시를 받아야 하는

그런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내게도 순결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술 취한 단골 아저씨의 탐욕이 스쳐간 이후였습니다.

 

박쥐처럼

박쥐처럼 살았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해도 사람들의 모멸의 눈빛을 막을 수 없었고

아무리 화장품을 처발라도

나는 고깃덩이라는 사실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날,

겁에 질린 학생이 내 방에 뛰어 들어올 때만 해도

나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거리가 시끄러우면

배부른 놈들

배부른 지랄들 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뒤쫓아 와 총에 칼까지 꽂아 내리패며

잡아가는 군인아저씨의 핏발 선 눈

그는 더 이상 공산당을 막아주는 고마운 사람만은 아니었습니다.

 

언니들의 손에 이끌려

시장 바닥에 앉아 주먹밥을 만들었습니다.

눈물과 욕설과 웃음이 버무려진 기묘한 광경.

 

외상값을 갚지 않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쌀집 아줌마가 그리도 흔쾌히 내어놓던 쌀가마니.

백 원을 바들거리던 생선 아주머니의 쌈짓돈.

 

이미 거기엔 네 것, 내 것이 없이

더 주지 못해

더 나누지 못해 안달하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분노에

두려움에 치를 떨면서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시골 잔칫집 같은 인정이 있어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목이 쉬고

온몸이 땀에 번들거리면서도 주먹밥을 내밀면

누이를 보듯 고마워하던 시민군 아저씨.

수고한다고 내 등을 두들기던 일수 아줌마의 손길.

 

나는 지금도 눈물로 주고받던

그 주먹밥을 잊을 수 없습니다.

 

- <오월의 사람들> 전문

 

 

 

이름없는 사람들3.jpg

 

 

80년 5. 18을 겪으며 썼던 오래된 시다. 우리 살던 시절에는 넝마주이를 종종 길에서 마주치곤 했는데 그들도 시민군으로 합류했고, 이후에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아마 죽거나 삼청교육대로 끌려갔을 거라고 한다.

 

윤희는 내가 아는 아이였다. 예쁘지만 애교는 없는. 툭툭 내뱉듯 무심하게 들려주던 그녀의 이야기들을 옮겨 보았는데 역시 그날들을 지난, 얼마 후 소식이 끊겼다.

 

12.3 내란 사건 이후 역시, 이름 없는 사람들이 눈으로 들어와 가슴을 채워주고 있다. 선결제도 그렇고 은박지를 둘러쓰고 밤을 새우는 사람들도 그리하고. 그들을 보면서 왠지 이름 없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만들어내는 세상이 진짜라는 생각이 든다. 드러나는 현실은 춥고 어두운데 가슴은 따뜻해지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몽글몽글 희망이 올라오니 말이다.

요나의 내키지 않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니느웨의 이름 없는 백성들을 사용하여 니느웨 성읍의 재앙을 막아주신 것처럼 분명 우리에게도 좋은 조짐이리라 믿는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 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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