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순환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생태적인 경제를 찾아서
1. 쓰레기 제로운동과 순환경제
2. 경제사상사에서의 순환경제 관념
3. 자본주의 경제는 어떻게 순환과 균형에서 벗어나는가?
4. 인구문제와 경제 그리고 생태환경
▶5. 대안경제의 추구 1): 공동경제와 경제 민주주의
6. 대안경제의 추구 2): 협동조합과 대안화폐
7. 대안경제의 추구 3): 생태경제학과 탈성장
8. 제국문화에서 벗어나려는 아나키스트의 경제관
9. 생태사회주의의 흐름
10. 한반도에서의 순환적이고 생태적인 경제 발전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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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안경제의 추구 1): 공동경제와 경제 민주주의
공동경제(Gemeinwirtschaft)라는 것은 20세기 초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독일어권에서 기업의 조직과 결정에서 노동자만이 아니라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발언권을 가지는 경영 형태를 가리키는 말로 만들어졌다. 오토 바우어, 엘렌보겐 같은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공동경제의 이론과 실천을 "사회주의의 길"(1919), "오스트리아의 사회화" 같은 소책자에서 소개하고 있다. 오토 바우어는 "사회주의의 길"에서 다음과 같이 공동경제의 이념을 제시하고 있다.
"누가 지금 사회화된 산업을 관리해야 하는가? 정부인가? 결코 아니다! 정부가 모든 가능한 기업을 통괄해야 한다면 인민과 인민대표에 대해 완전히 권력을 가질 것이다. 정부 세력의 그러한 상승은 민주주의에 위험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정부는 사회화된 산업을 잘못 관리할 것이다. 아무도 국가보다 산업 기업을 더 잘못 관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결코 산업의 국유화를 요구하지 않으며, 단지 언제나 사회화만 요구한다. 그러나 그러면 정부가 해서는 안 된다면 누가 사회화된 산업을 경영해야 하는가?
오늘날 산업의 대기업은 주주들에 의해 선출되는 이사회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미래에도 각각의 사회화된 산업 분야는 이사회에 의해 경영될 것이지만, 이 이사회는 더 이상 자본가들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같은 회사 집단들의 대표자들에 의해 선출되며, 이 집단들의 필요를 사회화된 산업분야가 앞으로 만족시켜야 한다. 이제 누가 사회화된 산업분야의 경영에 관심을 가지는가? 첫째로는 노동자들, 직원들 그리고 이 산업분야에서 일하는 관리들이다. 둘째로는 이 산업분야의 생산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들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인민 전체의 대표로서 국가다. 그래서 사회화된 산업분야 각각의 이사회는 대력 다음의 방식으로 결성될 것이다. 이사회 구성원의 3분의 1은 노동조합에서 그리고 그 산업분야에 종사하는 직원 조직에서 정해진다. 이사회 구성원의 또 3분의 1은 소비자들의 대표들이 구성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석탄광산의 이사회에는 일부는 가정용 연탄 사용자들의 조직으로서의 소비자 연합으로부터, 일부는 산업용 석탄의 사용자들의 조직으로서의 산업 조직들에서 선출될 것이다. 끝으로 이사회 구성원의 또 3분의 1은 국가의 대표자들이 구성한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재무담당 국가서기에 의해 임명되어 국고의 이익이 대표되게 하지만, 다른 일부는 국회에서 선출되어 일반적 인민 이익도 대표되도록 한다. 한편에서는 노동자들과 직원들의 대표들, 다른 한편에서는 소비자들의 대표들은 상반되는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 왜냐하면 노동자 대표는 높은 임금을, 소비자 대표는 낮은 가격을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대표들은 양 당파 간의 중재자요, 중재 판정관으로서 입장을 취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지금의 자본주의적인 주식회사 제도도 아니고 국영기업이나 공기업도 아닌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에 의한 기업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부터 100년 전에도 자본과 국가가 지배하는 기업과 경제에 대해 큰 문제점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고, 당시의 주요한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동경제의 관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당시에 등장한 경제 민주주의라는 관념이다. 프란츠 나프탈리는 "경제민주주의: 그 본질, 방법 그리고 목표"(1928)에서 경제민주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경제민주주의의 본질은 그래서 생산수단에 대한 처분권이 더 이상 개인들에게 사적 목적을 위한 사유재산으로 속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일반의지를 구체화하는 경제의 공동생활체, 그 안에서 개인들의 사적 이익이 아니라 공동이익이 결정적인 공동생활체에 속할 경우에 비로소 충족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결국 공동결정(Mitbestimmung)을 전제로 한다. 경제의 공동생활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경제적 일반의지의 형성이 일방적으로 성사되지 않고 모든 경제 동반자들에 의한 공동결정에 연결될 경우에 비로소 존재한다. 우리가 사회주의적 최종목표와 합치되는 그러한 경제민주주의를 아직 가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사회주의 일반처럼 우리 앞에 현실로서가 아니라 목표와 지향점으로서 있다는 것은 상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 그리고 자원고갈의 시대에 소비자들과 지역 주민들이 실천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실제로 거대한 생산설비를 설치하고 많은 원재료를 투입하여 제품을 생산해서 소비자에게 공급해 주는 생산 부문, 기업 부문이 경제의 운영방식을 주도하고 있으며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이 크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많은 대기업들이 ESG와 RE100 같은 행동에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생산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노동자들과 중간관리자들이 자원과 에너지의 사용 양태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고, 어떻게 그 사용을 줄일 여지가 있는 것인지, 왜 줄이는 것이 쉽지 않은지를 잘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기업의 주인들에 의해 고용되어 큰 성과를 내어야 자신의 일자리를 지킬 수 있고, 승진도 하고 안정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자들이어서 더 성능이 좋은 생산 설비, 더 많은 에너지 공급, 더 많은 질 좋은 원재료를 제공받아서 우수한 다량의 제품을 제조하여 높은 성과를 내는 것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기업 소유자들의 대외적인 친환경적 기업경영 방침의 천명에도 불구하고 고용된 자들의 입장에서는 친환경적인 노력을 기울일 생각보다는 기업 내에서 더 큰 권한을 얻고 자기 입지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더 많은 물자를 공급받고 더 많은 생산성과를 내는 것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일반적인 기업의 고용관계에서는 이는 달라지기가 어렵다. 더구나 현대 국가는 산업의 발달을 그 힘의 근거로 삼고 있고, 산업계 자본가들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중앙집권적 국가의 에너지, 자원조달, 산업정책 그 모두가 사람들의 행복, 생태계의 온전성을 증진하고 유지해 주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추구된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사회주의 정치세력들과 이론가들은 주로 다수 노동자 대중의 삶의 필요들, 신체적, 정신적인 건강과 복지의 관점에서 도시 문명의 부작용, 자연 파괴의 문제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유화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세운 사회화는 국유화가 아니라 노동자들과 소비자들이 기업경영에 발언권을 가지는 공동경제였고 경제민주주의였다. 이런 실험들은 보수 정치세력들의 비협조와 방해로 좌절되었고, 결국 파시스트 세력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지금의 기본적인 기업과 경제 운영 방식에 대한 문제의식과 대안을 모색하는 여러 가지 실험들이 백 년 전에 이미 집권당인 사회주의 정당에 의해 상당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추진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공동결정권과 같은 형태로 바이마르 헌법에 반영되어 있다.
기후변화 문제에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적인 기업 운영으로 적절히 대처할 수 없음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대안을 찾고 있고, 대안기업으로서 협동조합에 눈을 돌리고 있다. 경제 민주주의는 동반성장과 같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소기업 간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내의 위계질서, 고용관계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이며, 일터 민주주의가 기본이다. 인간과 인간의 권력관계, 착취관계가 인간과 자연 간의 폭력적 관계에 그대로 이어지는 것을 인식한다면, 이러한 의미의 경제민주주의는 생태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경제활동에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