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의 돌봄으로 살아왔다. 출생 이후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었기에 누군가 즉, 부모이든 양육도우미든, 할머니든, 아니면 보육원 교사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안아주고 업어주고 자장가 불러주고 아프면 약 먹여주고 놀이터에서 놀아주고 하는 일련의 돌봄 노동의 도움으로 생존하고 성장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대가가 없는 사랑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럼, 이제 노인이 되어 스스로 독자적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시기가 다시 도래했을 때 역시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다. 방문 진료를 하면서 환자만이 아니라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돌봄제공자 가족들을 직접 만나게 된다.
뇌졸중으로 오른쪽 팔다리 마비로 8년째 침대 와상 상태에 있는 90대 여성분의 집을 찾아갔을 때, 딸이 시간을 맞춰 일자리에서 잠깐 빠져나와서 방문 의료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양보호사가 낮에 돌보고 자신은 일터에서 저녁에 돌아오면 요양보호사가 없는 아침까지 돌본다고 한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딸의 표정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어머니는 정신 상태는 온전하셔서 이래라저래라 까다롭게 요구하시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돌봐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다.
또 다른 80대 여성분은 60대 딸이 돌보고 있었는데 고관절과 발목 골절로 수술을 하고 침대에서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분이 욕조에 들어가서 시원하게 목욕을 하고 싶다고 하시는데, “어머니, 목욕하다가 또 골절이 되면 안 돼요. 친구 어머니가 그렇게 되어서 더 고생하셨어요”라고 하면서 딸이 극구 반대를 한다. 방문목욕 서비스 신청하면 된다고 내가 조언에도 딸이 안된다고 하여서, 보는 내가 안타까웠다. 이럴 때는 환자분의 소원을 들어줘도 좋겠는데, 돌보는 딸이 두려워하는 걱정을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또 다른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80대 여성분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침대가 아파트 거실에 놓여있고 80대 남편이 돌보고 있었다. 남편은 아직 정정하여서 아내가 음식을 잘 삼키지 못하는 연하곤란 증상이 있어서 죽 같은 유동식을 직접 숟가락으로 떠서 먹이면서 정성을 다한다. 영양이 부족할까 봐 영양제 수액주사를 원하는데 수액이 다 들어가면 주사 바늘을 제거하는 것은 해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남편이 아직은 아내 수발을 잘할 수 있지만 앞으로 언제까지 이렇게 적극적으로 돌봐드릴 수 있을지 그분의 고령이 걱정되었다.
알츠하이머 치매로 진단받은 80대 여성이 장기요양등급을 받기 위해 의사소견서가 필요하다고 가본 집은, 50대 비혼 딸이 주된 돌봄 제공자였다. 딸과 먼저 30분 정도 상담을 하였는데, 어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고는 자신이 우울증에 걸려서 정신과 약을 먹기도 한다고 하였다. “나는 골드미스가 아니라 썩은 미스예요.”라고 하면서 결혼을 하지 않은 자신을 비하하는 표현을 쓰기도 해서, “제가 보기엔 다이아몬드 미스인 것 같은데요.”라고 조금이나마 힘을 주려고 응답해보았다. 어머니는 치매의 여러 특징 중 하나인 폭언이나 난폭한 행동을 하여서, 요양보호사나 상담자들이 도망가서(?) 돌봄이 되지 않아, 자신이 주로 돌본다고 하였다. 직접 만나 환자분에게 의사라고 소개해도, “이 나쁜 년아, 뭐 훔치려 왔어?”하면서 욕부터 하신다. 그래도 등급을 위한 운동 평가를 해야 하기에 일어나서 같이 춤추자고 하면서 박수도 같이 치게 하고 움직이게 하니까 즐겁게 따라 하시길래 칭찬을 해드렸더니 또 욕을 하신다. 이러한 욕설과 폭언, 의심이 치매의 주 증상 중의 하나임을 이해하는 가족들도 때로는 매우 괴롭게 느껴질 만하다. 그 따님에게는 자신의 건강도 돌보고, 자신에게 쉼을 주기 위한 휴가를 주기적으로 가지라고 권하였다. 그래야만 오래 버티면서 돌볼 수 있다고.
이렇게 가족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제공되는 돌봄 노동이, 소위 가족의 독박이라는 형태로 대가 없는 희생으로만 치러야 하는가 하는 의문에 다다르게 된다.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돌봄을 이야기하다”라는 주제로 강의한 생애문화연구소 전희경 대표는 “페미니즘은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약자의 입장에서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하여 구조를 바꿔나가기 위한 실천이다”라고 하였다. ‘돌봄의 젠더화’에 대해 얘기하면서 돌봄 제공자의 80% 이상이 딸이나 며느리나 가족 중 여성이라고 하였다. 돌보는 사람의 다른 이름은 ‘숨겨진 환자’이며, 돌봄의 문제는 여성이나 가족만이 독박을 쓰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시민의 문제이며, 돌봄은 여성의 본능이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철학과 역량이라고 하였다. 사랑의 이름으로 미화되는 돌봄 노동을 제대로 평가하고 가치를 인정하고 적절하게 보상을 하는 진짜 ‘노동’으로 인정받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