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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한강 읽기'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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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사랑이라는 질긴 무늬의 기록

posted Feb 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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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호수 89
글쓴이 고대연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jpg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p11) 이라는 시를 서시로 시작한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p.11)

 

 

어느 늦은 저녁에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던 시인은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발언한다. 이어서 시인은 밥을 먹는다. 밥을 먹는 행위 전에 시인은 "밥을 먹어야지" 라고 마음을 다독인다. 그리고 밥을 먹는 행위로 시는 끝이 난다. 사라지는 것, 그리고 부재의 영원성을 눈앞에 두고 시인은 밥을 먹는다. 윤동주의 서시에서 '오늘밤도' 라는 구절을 통해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상황의 항구성과 영원성, 현재성을 이야기 했듯이 시인은 그녀의 서시 격인 이 시에서 '영원히'와 '영원히'를 반복하며 지나가는 것을 마주한다. 도대체 영원히 지나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시집은 그 지나가는 무엇에 대한 시집이며 독백적 헌사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작품집 『흰』에서 시인은 흰 밥을 앞에 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동일하게 그려 놓았다. 작품집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고백했듯이 흰은 죽음과 삶의 서슬퍼런 경계이다. 생의 양분으로 존재하며 삶의 근원적인 양분이 되어주는 '흰 밥'은 눈 앞에 존재하면서도 서서히 온도를 떨구며 하얀 연기의 형태로 사라지고 있고 그 모습은 종종 그녀의 다른 작품들에서 유령의 형태 혹은 시인의 환상,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 양자 세계의 존재로 나타난다. 그걸 바라보고 있는 인간도 시간이라는 절대적 섭리 안에서 계속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일어나는 시간은 저녁이 아닌 '늦은 저녁'이다. 저녁이 오후와 밤의 경계라면, '늦은 저녁'은 조금 더 밤에 한발짝 가깝게 다가가 있다. 즉 그녀는 이 세상에 있지만 낮의 편보다는 밤의 편에 더 가깝게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한강 작품 속의 인물들은 항상 병적이며 고통 속에 있다. 정상적인 상태를 상실하였거나 두통과 같은 물리적인 고통 속에 있고 때로는 불가역적인 고통에 빠져 있다. 더 나아가 죽음과 같은 고통을 찾아 그 곳으로 걸어들어 간다. 밤의 편에 가까운 늦은 저녁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와 나"(p16) 는과 "파란돌"(p33) 은 시인의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 속에 삽입되어 있다. 파란돌은 시이지만, 동일 제목의 단편으로 다시 태어났고 이 단편 작품은 『바람이 분다, 가라』 라는 장편으로 확장된다. 이 소설에는 고통을 껴안고 죽음이라는 적멸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은 불가역적이다. 그것은 사라지는 밥의 흰 김처럼 회귀할 수 없고 사라진다. 시간이 그렇고 역사가 그렇다. 『채식주의자』에서 여자는 회복되지 않는다. 굳이 회복하려 하지 않고 동물성의 상태를 거부하고 식물성의 상태로 나아간다. 곡기를 끊고 회복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러한 인식은 파란돌에서 두드러진다. 화자는 오래전 꿈 속에서 파란돌을 보았는데 그때 화자는 죽어 있었다. "난 죽어 있었는데 /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 아, 죽어서 좋았는데" (파란 돌 중) 난 그 돌을 줍고 싶지만 그 돌을 주으려면 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 그때 알았네 / 그러려면 다시 사라야 한다는 것 / 그때 처음 아팠네 /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파란돌 중). 그래서 화자는 돌을 줍는 시도를 포기한다.

 

이처럼 회복하지 않는 고통과 아픔 속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다. 몸으로 관찰하고 그것의 의미를 받아 적는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수많은 비극과 적멸할 존재를 껴 앉는다. 그리고 견딘다. 견디는 과정에서 시인은 토하고 연약한 몸은 부서진다. 이 상황을 소화 시키기 위해서 회복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바깥을 무작정 걷고 또 걷는 시인의 모습은 작품 곳곳에서 그려지는 가장 대표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견딤 이외에 다른 가능성은 잘 보이지 않는다. 견디며 지속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일 것이다. 자식이라는 존재는 한 인간이 상정할 수 있는 겸딤의 최대치 이며 사랑 그 자체이다. 상처와 고통을 건너는 견딤과 사랑.

 

아들 효에게 쓴 작품 "효에게. 2002. 겨울" 에서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 기억하는 일 뿐이라는 걸"(p73), 이라고 시인은 기록하는 존재임을 고백하고 "함께 품었던 시절의 은밀함을 / 처음부터 모래로 지은 / 이 몸에 새겨두는 일 뿐인걸" (p74), 에서 모래처럼 연약하지만 그 속에 새기는 행동을 통해 견디는 존재로 나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인은 "괜찮아 / 아직 바다는 오지 않았으니까"(p74) 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아이에 대한 또 다른 시편 "괜찮아" (p75) 에서는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 아파서도 아니고 / 아무 이유도 없이 /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시간" (p75) 라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원죄적인 고통 속에 있는 아이를 대상으로 시인은 "왜 그래 / 왜 그래" 라며 같이 울지만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 괜찮아 / 괜찮아 / 이제 괜찮아" 로 전환한다. 시 안에서 어떤 인식을 통해 "왜 그래" 에서 "괜찮아" 로 시인의 인식이 전환 되었는지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것은 고통을 견디고 마주하는 과정들 속에서 형성된 시인의 강인한 무늬나 굳은살 같은 것일 것이다. 제주 4.3에 대한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원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혹독한 고통을 마주하고, 적당한 선에서 봉합하거나 화해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 연약하지만 견디고 이를 통해 도달한 것은 상처입었지만 '사랑'이라는 깨달음을 시인을 체득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의 아들이었던 예수가 등장하는 작품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시인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책 중 하나로 꼽은 작품이다. 실제 그녀의 많은 작품들은 이 소설에 액자식으로 삽입되어 있는 "대심문관 이야기"의 형식을 따라간다. 예수가 재림하는 세비야 광장에서는 종교재판과 화형식이 진행되고 있고 대심문관에게 체포되고 심문을 받던 예수는 그의 세속적 말들을 듣다가 대심문관에게 키스를 한 후 말없이 떠난다. 세계 문학사에서 아직까지도 가장 의문의 순간 중 하나로 뽑힌다는 대심문관에 대한 예수의 키스의 비유는 시인에게도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작품들 속에서 '흰 밥'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소멸되어가는 상태의 인물들은 시인의 분신으로 보는 것이 맞을것이다. 시인은 흰 밥이며 사라지고 있는 흰 연기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식탁에 앉아 있는 관찰자 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모든 주체들이 만나는 지점은 예수의 키스와 같다. 육적이며 교조주의적인 이성적 사고에 가득찬 대심문관은 사실 부서지고 있고 상처받고 있다. 죽음이라는 회복되지 않는 고통 속에 있고 소멸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는 예수를 벌하려 하고 내쫓지만 흰 연기처럼 사라지는 세비야 광장의 연기 아래에서 사라지기 전 예수가 한 키스는 작가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밥을 먹는 행위 ("밥을 먹어야지 / 나는 밥을 먹었다") 에 가까워 보인다.

 

이는 큰 전환이다. 카프카의 단편 『단식광대』에서 수도사는 밥을 먹는 행위를 포기하지만 시인은 서시인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을 통해 밥을 먹는 행위를 선택한다. 끝없는 두통 속에서 속을 게워내는 행위를 계속 하고 눈보라를 뚫고 죽으러 가는 길 속에서도 시인은 밥을 먹는 행위를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한강은 저녁의 작가에 가까워 보인다. 밤의 편에 서서 지독하고 견고한 고통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반대편에서는 오후의 남은 빛들을 포기하지 않고 한발씩 나아가며 밥을 입안에 넣는다. 그녀의 저녁은 파란색의 하늘에 가까워 보인다. "그 빛나는 내(川)로 / 돌아가 들여다보면 / 아직 거기 /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p 35, 파란 돌 중). 저녁은 얼마나 고요하고 강인한가. 죽음과 삶을 연결해 주는 그 저녁이라는 무늬는 얼마나 질긴가. 사랑이라는 무늬처럼. 한강이 쓸 다음 작품이 얼마나 지독하며 아름다울지 기대가 되는 이유다.

 

고대연-프로필.png

 


  1. 한강, 사랑이라는 질긴 무늬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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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25.02.09 By관리자 Views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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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흰』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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