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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한강 읽기'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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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에 갇힌 '검은 사슴'의 하늘 찾기

posted Mar 14, 2025

검은 사슴.jpg

 

 

소설 『검은 사슴』은 하늘 혹은 빛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인영과 명윤이 의선을 찾기 위해 쇠락한 탄광 도시 황곡을 찾아간다. 소설은 그들이 만났던 불가해한 인물 의선을 찾아가는 이야기에 인영의 취재원인 탄광의 사진가 장종욱을 취재하는 이야기가 서로 다른 결을 따라 전개되지만, 임영석이 의선과 장종욱에게 전해 준 '검은 사슴' 이야기를 통해 통합되면서 결국엔 하늘을 보는 게 소원인 '검은 사슴들'의 분투기가 된다.

 

소설의 주요한 화자로 등장하는 인영을 비롯한 명윤, 사진가 장종욱은 아픈 과거가 문신처럼 새겨진 채 문득문득 드러나는 검은 사슴의 이미지와 마주한다. (끈끈한 노란자위 속에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살덩어리 / 끈적끈적한 사지 / 들쥐 새끼만한 크기로 쪼그라든 / 뿔이 돋고 이빨이 과장된 네발 짐승들 / 끈끈한 액체 / 연홍색 액체 등)

 

인영에게 죽은 언니와 엄마와 '육지의 풍경이 배제된' 바다 사진이 그녀의 어둠이다. 언니가 죽은 바다와 그 바다를 바라보며 한 생을 끊임없이 덧나는 상처처럼 살아간 엄마와 오로지 비어 어두운 바다만을 인화지에 담아 온 인영의 고집은 암실 혹은 동굴에서 마주하는 현실을 집요함과 냉정으로 치환하는 미메시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명윤에게는 교통사고로 판단력과 지능을 잃은 아버지와 열여섯에 집을 나간 누이 명아가 짙은 어둠이었다. 그는 '성난 육식동물처럼 으르렁거리는' 아버지가 있는 집을 벗어나기 위해 기를 쓰고 공부하였고, 동생 명아가 어린 나이에 집을 뛰쳐나갔는데도 누이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드리워진 연탄공장 골목과 아버지에 대한 음습한 기억들, 그리고 명아로 인한 무력감은 단칼에 벗어나기를 원하는 어두움이었다.

 

사진가 장종욱은 광부들의 고단한 얼굴을 통해 자신의 하늘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을 한 사람이다. 쇠락한 황곡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헷갈리게 하는 중이었고, '조금이라도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들을 사귀고 싶다'는(127) 욕망을 드러낼 만큼 거의 완벽한 고절감(孤絶感) 속에 있다.

 

이들은 시치미를 떼고 현실에서 느끼는 통증을 그저 견디며 살아가지만, 어둠은 그들에게 내면화되어 마비된 통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검은 사슴들이 있는 곳이 바로 어둠 가득한 막장이고, 그들을 어둠으로부터 하늘 혹은 빛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의선과 그의 아버지 광부 '임영석'이었다. 인영과 명윤 그리고 장종욱은 의선과 그녀의 아버지 임영석이라는 무늬가 직조된 이야기의 그물 안에서 하늘을 찾아 헤매는 검은 사슴이다.

 

의선은 어둔리를 벗어나면 빛을 볼 수 있으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둔리보다 더 어두운 완벽한 흑암이었으며, 그녀가 도로 한가운데에서 옷을 벗어던지며 달린 것은 꽉 막힌 막장의 입구에 틈을 만들기 위한, 숨길을 열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인영의 육지 배경이 없는 바다 사진을 모두 불태워버린 것도 사진에 깃든 어두움에 대한 본능적인 저항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은 좋지 않아요······ 정말이에요.'(103)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다.

 

임영석은 광산 사고로 죽은 동료의 실성한 아내와 정신이 아픈 아이를 거둬 보살피며, 혹여 아이를 낳으면 정신이 돌아온다고 믿어 의선을 낳았다. 그는 집요한 사람이었다. 끝까지 아내를 포기하지 않았고 사라진 그녀를 찾기 위해 광부가 된 사내였다. 검은 사슴의 이야기를 어린 딸 의선에게 해주었고, 절망을 막장처럼 둘러쓴 장종욱에게도 전해주었다. 그가 검은 사슴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기실 하늘을 찾는 일을 그만두지 말라는 간곡한 당부이기도 하고, 잿더미 속에 불씨처럼 숨어있는 빛을 읽고 그 빛의 근원인 하늘을 찾아가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그는 오로지 그의 하늘인 아내를 향한 사람이었다. 그가 미친병이나 머리어질병에 직효인 '붉은애기풀'을 끝도 없이 달여내는 것은 광산 사고로 죽은 동료의 아내였던 그녀의 미치기 전의 모습에서 보았던 빛을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인간에게 내재된 하늘의 모습을 향한 갈망이 그의 존재 이유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의선과 그녀의 아버지 임영석의 향일성(向日性)은 인영을 비롯한 소설의 주요 화자들이 자의건 타의건 어둠 속에 몸을 숨기는 것에 균열을 일으키는 요소로 작용을 한다.

 

의선은 인영이 찍어 온 사진들을 불태움으로써 그녀의 강고한 신화적 자의식에 균열을 내었다. 인영은 의선이 태우지 못한 사진을 그 자신이 태우면서 황곡에로의 여정에 나선다. 애초에 그 여정을 못 마땅해한 그녀는 이미 의선이라는 빛에 감염되어 있었다.

 

인영은 마치 부드러운 천을 어루만지듯이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전에 없이 다정함이 우러나오는 그녀의 음성에 명윤은 약간 놀랐다. (p51)

 

불길한 꿈과 병아리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덩어리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황곡을 찾아가는 현실의 이야기와 검은 사슴으로 표상되는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을 촉구하는 이야기가 교직되는 서사 라인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끝이 허망한 해피엔딩처럼 그려지는 것에서는 고통의 근원에 천착하는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지만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작가의 의지가 읽힌다.

 

지금 황곡발 서울행 열차를 탄 나는 서울의 나와는 별개인 사람 같았다. (인영, p542)

 

최의 말로 인하여 자신의 기사가 잡지라는 데에 실린다는 현실감을 느꼈다. 거기 실려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광부들이라는,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균형감각이 되살아 났다. (장종욱, p512)

 

어찌됐든 살아 있다는 건 좋군요.(명윤, p559)

 

의선이 나고 자란 마을 어둔리(玄里) 연골은 늦게 해가 뜨고 일찍 해가 져서 어둠에 젖어 있는 시간이 길게 뭉쳐져 있는 곳이지만, 실에서 끊긴 연들이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모여드는 곳이지만, 그녀가 스스로 글을 익힌 곳이며 그것을 통해 '대화를 통해서보다는 글을 통해 다듬어진 말들'(89) '마치 오랫동안 글로 써서 다듬은 문장 같은 말들'(201)로 세상에 말을 걸기 위해 연습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모호하고 애매한 것으로 무장한 어둠 속 인간들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하늘을 뚜렷한 지향점으로 가진 사람이 가진 명징성과 단호함을 상징한다.

 

어둔리는 어둠 속에서 빛의 씨앗을 갈무리한 곳이며, 연골은 하늘 멀리 날아가지 못한 연들이 모여든 무덤 같은 곳처럼 보이지만 그 꿈을 버리지 못한 연들이 새로운 소망을 모아 뭉쳐내는 곳이다.

 

'검은 사슴'은 수천 마리나 되지만 한 번도 다른 사슴을 만나본 적이 없기에 스스로 외톨이라고 여기는 존재이다. 그는 평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하늘을 보는 게 소원인데, 광부에게 그 길을 물었다가 뿔이 잘리고 이빨이 뽑히는 상처를 입고 들쥐 새끼만하게 쭈그러들고 죽는다. 그가 보고 싶어 하는 하늘은 '이상'의 다른 이름이며, 그의 뿔은 드높은 자존의 상징이고, 그 이빨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노동일 것이다. 그것을 빼앗아가는 광부는 그 깊은 어둠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는 막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인데, 그들에 의해 '검은 사슴'은 살해를 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검은 사슴'은 같은 처지의 인간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찢겨가는 사람들의 자화상이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어두운 내면을 상징한다.

 

이 소설은 끝내 하늘을 눈에 담았는지 알 수 없는 고단한 삶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애써 소망하는 인간의 자기완성을 향한 이야기로 읽고 싶다. 그리고 미래불의 현현인 미륵을 기다리듯 '붉은애기풀'을 기다리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사족 - 신화의 변용]

이 소설에서 묘사된 '검은 사슴'과 동굴의 변형인 탄광 갱도는 통과 제의적 의미를 내포한 신화 요소이다. 아울러 중요한 인물인 의선의 이름에서 선 자가 신선 선(仙) 자라는 것을 굳이 밝히고 있는 것은, 신화와 전설의 구비문학과 고소설의 선녀하강모티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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