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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의 치세가 조선의 마지막 안정기였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기세등등한 노론의 세상에서 등극 일성으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했던 정조, 그에게 조정은 살벌한 전쟁터요, 용상은 고립무원의 외로움을 매 순간 뼈에 사무치게 느끼는 고도(孤島)였을 것이다.
이런 그에게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렸던 홍국영은 신하를 넘어 전우와도 같은 존재였다. 호방하고 과감한 성격, 풍부한 학식, 게다가 용모도 출중했던 홍국영은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팔방미인이기도 했으니, 그에 대한 정조의 신뢰와 사랑은 일찍부터 남달랐기에, 왕위 등극 전부터 홍국영은 '세손(정조)의 오른 날개'로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 앞에서 그 역시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일까? 천신만고 끝에 정조가 용상에 앉은 이후, 도승지와 숙의대장을 겸직하는 등, 문무 양면에서 실질적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게 된 홍국영은 점차 당파로 얼룩진 조정 개혁이라는 정조의 이상, 본인도 열렬히 추종했던 그 빛나는 초심에서 안타깝게도 멀어지기 시작했다.
권력의 단맛에 취해가던 그가 저지른 대표적 헛발질은 후사를 출산하지 못하는 효의왕후 김 씨를 대신할 정조의 후궁 간택 정국에서 엄청난 무리수를 시전하며 자신의 여동생(원빈)을 밀어 넣은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군왕의 절대적 신뢰 속에서 당대 최고의 권력을 틀어쥔 이가 왕실과 사돈 관계까지 맺었으니, 하늘의 나는 새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태양도 떨어뜨릴 위세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과욕은 늘 비극을 견인하는 법! 병약했던 여동생이 후궁이 된 지 약 1년 만에 급서하자, 홍국영은 '누군가 원빈을 투기하는 이가 독살했다!'는 음모론에 빠져들며 이성을 잃고 효의왕후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른 후궁을 둘 수 없다며, 국왕의 결혼 문제에까지 관여하기 시작했다. 명백한 직권남용이자 군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하극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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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아무 증거도 없이 원빈 독살의 배후로 효의왕후를 지목한 홍국영은 궐내 나인들을 마음대로 체포해 고문하며 정순왕후의 사주를 실토하라 압박했다. 이 일로 인해 홍국영은 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등의 탄핵에 직면하게 되었고, 급기야 정조의 눈 밖에 나기에 이르렀다. 비록 정조에게 있어 홍국영은 세손 시절부터 입 안의 혀처럼 한마음으로 미래를 꿈꿨던 동지였으나, 권력에 눈이 멀어 저지르는 준동을 더는 눈감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파멸로 치달았다. 왕실 내명부의 탄핵으로 사퇴 압박에 직면한 홍국영은 그간의 권력을 이용해 버티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끝까지 자신의 뒷배가 되어 줄 것이라 믿었던 국왕 정조의 사직 요구 앞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모든 직을 내려놓고 물러선 이후, 그의 추종 세력들 역시 조정에서 순차적으로 제거되었다. 급기야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죄인을 강제로 낙향시키는 '방귀전리(放歸田里)'형이 결정된 홍국영은 재산을 몰수당한 채, 강릉으로 사실상의 유배를 떠나게 된다. 강릉에서 분노와 원망, 또 회환에 휩싸인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채 폭음으로 매일 밤을 지새우다 쓰러진 홍국영은 봄이 찾아오던 1781년 4월,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권력의 정점에서 축출되고 낙향한 지 3년, 그의 나이 33세 되던 해였다. 비록 말년에 감출 수 없는 중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영민하고 열정 가득했던 청년 정치인이 권력 앞에서 초심을 잃고 음모론에 경도된 채, 표류하다 끝내 좌초해 버린 일은 개인적 안타까움을 넘어 가히 국가적 비극이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 후기 마지막 희망이었던 정조의 개혁 정치에도 심대한 타격을 끼쳤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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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역사 속 수도원은 권력화, 세속화, 금권화되어 가던 교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작된 영성 운동이었다. 개인의 영성 회복과 교회개혁을 위해 재산과 안락한 삶을 기꺼이 내던지고 수행의 길에 들어선 수도사들은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동했다. 이들에 의해 형성된 수도원은 또한 유럽에서 대학이 출현하기 이전, 신학뿐 아니라 각 분야의 소중한 학문적 자산을 심화하고 전수하는 거의 유일한 기관이기도 했다. 한편 이들 수도원에서 수행했던 노동은 수행의 의미와 함께 생필품 생산이라는 실질적 이유도 있었다. 이를 위해 중세의 수도원에서는 농사를 짓고 그 소출을 가지고 빵이나 죽을 만들었으며, 이 재료들을 가지고 맥주를 빚었다.
위와 같은 역할과 활동 이외에 수도원이 감당했던 것에는 빈민 구제와 떠도는 수행자 지원도 있었다. 어려운 이들과 찾아온 수도자에게 수도원은 먹을 것과 거처를 마련해 주었고, 제한된 치료 기능도 수행했다. 이 같은 활동은 수도원에게 있어 사랑과 나눔에 대한 사회적 실천이었던 바, 영성 수련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이 같은 활동에는 당연히 돈이 필요한 법! 수도원은 재원 마련을 위해 노동을 통해 얻은 생필품을 외부로 판매했다. 이 중 맥주는 단연 수도원표 물건 중 원픽 1위 아이템, 그도 그럴 것이 좋은 재료와 체계적 생산공정의 전수를 통해 확보된 양조 기술은 많은 경우 민간의 수준을 상회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시작했던 수도원의 맥주 판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수도원들은 문제 제기하며 그토록 거리를 두려 했던 기존 교회의 문제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권력과 결탁해 광대한 영지를 소유했으며, 수도원 출신 교황을 통해 수도원 자체가 권력의 정점에 서기 시작했다. 이렇게 초심을 잃어갔던 수도원에서 맥주는 이제 구제와 섬김이 아닌 자본획득을 위한 양조와 판매로 변화해 갔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평등하게 나누었던 맥주는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기 시작했고, 수익 확대를 위해 관을 동원해 민간양조장을 도산시키기도 했다. 파울라너와 같이 편의점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수도원 연원 맥주회사들은 많은 경우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세계적인 맥주 자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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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처음의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힘들며 많은 경우 불가능에 가깝다. 당구를 칠 때 스틱에 묻은 초크 가루와 당구대에 깔린 천의 상태 등 매우 다양한 원인이 애초 공을 쳤던 나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공을 굴려버리듯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초심이 개인과 모임의 여러 문제들 앞에서 그 근본적인 해법 혹은 성찰의 키워드가 되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관건은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 이를 지속 가능하도록 제도와 운영에 반영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수도원 계열 맥주 양조장 중 가장 초심을 고집스레 유지하려 애쓰는 곳에는 트라피스트 계열 양조장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설립 이후 수도원의 수행 일정 준수, 자본 추구 반대, 지역을 향한 수익금 환원 등의 원칙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다. 필자가 가 봤던 준데르트 수도원은 상점 운영 시간이 오후 4시 45분 같이 '애매'하게 되어있었다. 이는 수사들이 기도하고 상점에 도착하는 시간, 또 마치고 들어가 기도실에 앉는 시간 등의 수행 동선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 오르발 수도원은 맥주 판매 수익금을 가지고 숙식 제공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라 트라페를 생산하는 아인트호벤 수도원은 지역민들과 함께 생태농업기반을 적극적으로 구축하고 있었다. 이 같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게도 초심유지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다. 더 이상 수사가 되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이 없거나 거의 없는 상황에서 양조와 같은 고급 기술의 전수 역시 근본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민간 양조사를 수석으로 선임하고 그에게 양조를 맡기는 등,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상황이 속속 펼쳐지고 있기도 하다. 이들 수도원 양조장에게 지금의 시간은 초심과 현실적 상황 속에서 조화와 중용을 찾아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부디 초발심을 잃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대안에 이를 수 있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추신 |
'공정과 상식' 취임 일성에서 벗어나도 한 참 벗어난 자로 인해 지금 대한민국은 몹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의 초심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자신을, 그리고 이 땅을 이렇게 위기로 몰아넣겠다는 것이 그의 초심은 아니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지금은 그의 비뚤어진 욕망으로 인해 흔들린 민주주의를 제자리로, 아니 더욱 전진시켜야 한다는 대다수 시민들의 초심아래 함께 기도하고 할 수 있는 실천을 해 나가야 하는 때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