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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고상균의 "그곳엔 맥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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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은 '모든 이'들의 것입니다! - 헬싱키 맥주 이야기

posted Mar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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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늦은 6월, 나는 헬싱키에 있었다. 제법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여행이긴 했으나, 실상 나의 마음은 대책 없이 저지른 대사건 앞에서 쪼그라든 아이 같았다. 일단 유럽이라는 비싼 동네로 가기엔 나의 주머니 사정이 가볍다 못해 구멍 날 지경이었고, 이것저것 벌여놓은 일들은 물에 담가놓은 미역 마냥 한없이 부풀려진 상태였다. 매일매일 달음박질치고는 있으나 무엇하나 성에 차지 않는 상황....... 늘 굳어있는 어깨 때문인지, 크게 들이마시려 애써봤지만,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내 상황도 상황이려니와, 작은 존재들에게 점점 비정해지기만 하는 사회 분위기 또한 시원하게 웃을 일 없는 나날을 더해 주고 있기도 했다. 급기야 '가지 않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더해지며 마음은 끝없이 가라앉아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비행기에 올랐다. 그건 너무 소중한 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그간 책과 검색사이트에만 존재했던 맥주를 직접 느껴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가 잘 모르고 있지만 핀란드는 생각보다 꽤 괜찮은 맥주의 나라니까 말이다. 일단 어지간한 규모의 동네엔 지역 맥주가 있고, 하지 축제 기간에는 빠지지 않고 맥주 축제가 열리는 곳이 바로 핀란드다. 헬싱키에는 맥주를 마시며 시내를 둘러보는 '펍 트램'을 운영할 정도다. 또 한국의 '맥주'는 단일 법조항으로 묶여 있지만, 핀란드는 도수에 따라 1~4등급으로 구분하며 그 내용도 매우 체계적이다. 최근엔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 편의점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던 라핀쿨타가 핀란드를 대표하는 라거다. 이 같은 대중적인 맥주뿐 아니라 실험적 스타일의 크래프트 비어 양조장도 광범위한 인기 속에서 성업 중이다. 수도 헬싱키는 북유럽 크래프트 맥주의 중심 도시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마음속 외침은 이랬던 것 같다.

 

살자. 이대로는 살 수 없어.

 

나는 그렇게 헬싱키로 향했다.

 

2

 

숙소에 짐을 던져놓고 부리나케 나가 처음 경험한 헬싱키는 북독일 필스너만큼 쾌적하고 시원한 도시였다. 파랗고 하얀색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도시, 진짜 진짜 좋아해서 한 서른 번 정도는 봤을 영화 '카모메 식당'에 등장하는 거리, 시장, 항구의 모습은 실제로도 그랬다. 파리나 런던 같은 제국주의 우두머리 도시보다 소박하고, 브뤼셀이나 안트베르펜 같은 서유럽의 화려한 도시보다 간소하며, 베를린이나 스톡홀름 같은 대도시보다 매우 조용한 거리가 내겐 무척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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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거리에선 어쩐지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어 줘야 될 것 같은 느낌에 따라 광장의 노점에서 젤라토를 하나 사 들고 한껏 여행객 정취를 만끽할 즈음, 나는 대단히 생경한 상황 한가운데 있음을 깨달았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었을까? 광장 옆 계단에 나와 차나 맥주 한 잔을 놓고 앉는 이들, 장을 보기 위해 바닷가 시장에 모인 사람들....... 관광객이 아님이 분명해 보이는 이들이 그 시간에 벌써 공적 시간을 마감하고 개인적 시간을 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늦게까지 이어지는 업무와 밤 시간의 회의에 익숙한 나, 야근과 잔업이 익숙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나는 런던의 오래된 펍에서 버드와이저를 마시는 것 마냥, 차원이 다른 그들의 시간 속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다. 바쁜 걸음으로 통화하며 걷거나 분주하게 뛰는 사람을 한 명도 본 기억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도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 거리에서 달리는 경우는 조깅할 때뿐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3

 

그런 느낌 속에 주위를 둘러보던 내 눈에 어느 때부터 무지개 깃발이 계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지! 6월은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이지! 그런데 그 깃발은 백화점과 같은 상업시설뿐 아니라, 시청사, 여객선 터미널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거의 대부분 걸려있을 만큼 일상적이었다. 어디 그 땅이라고 김빠진 맥주같이 상태가 메롱인 사람이 없겠는가? 이 절차적 민주화의 시대에 계엄을 단행하는 자도 있는 마당에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시민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광장에서 매해 진행하던 퀴어문화축제를 불허하는 것이 가능한 도시와 6월이 되면 일제히 무지개 깃발을 거는 도시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접근, 그 근본에서부터 차이가 있다 하겠다.

 

핀란드가 사회적 다양성에 대한 저변은 정치권의 모습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핀란드는 세계 최연소 여성 총리 '안나 마린'을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한 나라다. 당시 34세에 총리가 된 그는 여성동성커플가정에서 자란 여성이었다. 또 18세에 만난 연인과의 동거 관계에서 '혼외 자녀'를 출산한 엄마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적지 않은 이들이 가진 관점에서라면 입시에 영혼을 갈아 넣어야 할 시기에 그야말로 우주를 날아다닐 비행 청소년이 아닌가? 한국에선 그런 전력을 가진 이가 중앙 정계에 들어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싶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20대의 상당 기간 판매직 노동자였던 그를 향해 이웃 나라 에스토니아의 내무부 장관 마르트 헬메가 "판매원이 총리가 됐다"며 조롱하자, 마린은 트위터에 "가난한 집 아이가 교육을 통해 삶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핀란드가 매우 자랑스럽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정치인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그 무지개 깃발 가득한 거리를 걸으며 처음엔 신기함으로 연거푸 사진을 찍다가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 존경하는 벗들에 생각이 이르자 왈칵 눈물이 흘렀다.

 

4

 

마음을 추스르고 항구 옆 생선 시장을 둘러본 뒤, -그 먹을 게 많은 공간에서 솔직히 둘러보지만은 않았다!- 도무지 지지 않는 태양을 만끽하며 걷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무엇보다 마른 목에 한 잔이 간절했다. 하여 찾아간 '카이슬라' 펍! 헬싱키 대학교 부근에 있는 카이슬라는 시내 중심가에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접근성이 좋았다. 펍 내부는 우드 톤의 분위기와 조명이 차분했고, 생맥주와 함께 준수한 병맥주를 다양하게 갖추고 있었다. 대학가에 있어서 그런지 내가 갔을 땐 관광객은 보이지 않았고, 젊은이 두어 명이 맥주 한 잔을 놓고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소개받기로도 현지인이 좋아하는 크래프트 펍이라 했는데 과연 그러한 듯했다.

 

우선 6월의 저녁, 나는 이미 목이 말랐으니,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라거....... 날렵하고 쌉싸름한 느낌이 북유럽계 라거의 계보를 충실히 잇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라거에 이어 IPA, 페일 에일 같은 장르도 맛봤는데, 미국 스타일처럼 홉 향이 강력하지 않았고, 라거 같은 청량감이 인상적이었다. 일행과 편안하게 둘러앉아 맥주 한 잔 나누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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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슨이 말했다던가? 누구든 처맞기 전에는 그랄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라고! 그날의 음주도 그랬다. 다음 날엔 에스토니아로 넘어가기 위해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니 조금만 마시고 자겠다고....... 하지만 여행의 정취와, 오랜 비행의 피로를 위로하는 것 같은 핀란드 스타일의 맥주들에 연거푸 처맞으면서 나는 숙소 근처 마트에서 병맥주를 잔뜩 샀고, 다 마신 뒤에야 잠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적응하지 못한 시차와 맥주의 여파로 혼미했던 나의 정신을 말끔하게 만들어줬던 트램 내 광고판, 6색깔 무지개 아래 있는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대중교통은 '모든 이'들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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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 모든 존재, 모든 생명이 다양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며, 이 같은 선언이 구호로 끝나지 않고 삶의 자리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도시, 그렇기에 헬싱키는 우리네 서울시청 도서관 격인 헬싱키 중앙도서관(Oodi)에 성중립 화장실을 설치했고, 주요 지역의 보도 턱을 없앴다. 또 공항이나 국제여객터미널 입구의 턱을 없애고, 커다란 자동문이 전동 휠체어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고 있기도 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핀란드 헬싱키는 누구라도 편안하고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그곳의 맥주와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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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애초 제목을 "대중교통은 공공재입니다.'로 번역하려 했다. 그러나 소수자를 사회적 구성원인 '모든 사람'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려는 이들의 괴성이 난무하는 대한민국에서 수려하게 공공재로 명시하는 것보단 다소 투박해도 모든 이들 이라는 말을 꼭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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