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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정선영의 영화로 세상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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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 - 누구나 볕에 그을리며 성장한다

posted Jan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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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88

<애프터썬>

-누구나 볕에 그을리며 성장한다

 

누구나 나이가 들고, 그래서 부모가 되면(아니, 부모가 안되더라도) 비로소 저절로 또는 어떤 경험을 통해서 어린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의 마음이나 생각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비록 그 당시 기억이 뚜렷하지 않아도, 그래서 정확히 내 부모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해도 어렴풋하게라도 감정이 이입되는 지점이 생겨난다.

 

영화 <애프터썬>은 바로 그러한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도 매우 영화적인 화법으로 전개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뚜렷한 기승전결 구조를 갖췄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단조로운 내러티브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찾아내야 할 상징과 비유들이 숨어있다는 뜻이다.

 

이야기는, 현재 곧 31살이 되는 어른 소피가 자신이 11살이었던 당시, 며칠 후에 31살이 되는 아빠와 터키에서 일주일 동안 보냈던 여름휴가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뚜렷한 스토리 라인은 없다. 이제 막 십대에 접어든 소피는 휴양을 하는 7일 동안 휴가지에 단체로 놀러 온 또래 남자아이나 언니 오빠들과 어울리면서 이제 막 성에 대한 호기심에 눈을 떠가는데, 그러느라 아빠 캘럼이 무엇을 힘겨워하고 어떤 아픔을 갖고 있는지 살펴볼 여유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영화를 지배하는 시점은 성인이 된 소피의 그것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딸과 즐겁게 보내는 시간의 틈 사이로 종종 아빠의 우울한 모습들이 끼어들곤 한다. 이 모습은 현재 소피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아빠가 왜 그토록 우울해하고 힘겨워하는지 사연은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그 사연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모든 사람에게 각기 다른 사연이 담겨 있듯이, 그에게도 남에게 쉽게 말하지 못할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저 명멸하는 흑백 화면 속에서 문득문득 드러나는,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같이 춤을 추는 것도 같고, 그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같은 아빠의 표정이 모호한 기억 속에서 깜박거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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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형태와 패턴으로 하나의 카펫이 완성되듯이 모든 사람에게는 그를 이루는 다양한 사연이 있다.

(사진 출처: ㈜그린나래미디어)

 

 

아빠는 어쩌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11살 생일을 부모조차 기억해주지 않아서 자기 입으로 말해야 했던,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했던 아이. 그래서 그 나이답지 않게 생일 선물로 장난감 전화기를 사달라고 했던 아이. 그는 어렸을 때부터 외로웠고, 그래서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어른이 돼서도 그는 어딘가에 마음을 붙이지 못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조차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정처 없이 불안하게 부유하는 사람이다.

그런 인물의 처지와 심리는 종종 땅에 한 번도 내려앉지 않고 허공에서 부유하는 패러글라이딩의 이미지로, 그리고 난간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캘럼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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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절벽 끝에 위태롭게 서있는 아빠, 캘럼

(사진 출처: ㈜그린나래미디어)

 

 

그는 자기 혐오감도 깊은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향해 양치 거품을 뱉는다. 급기야 마치 죽음을 결심한 사람처럼 한밤중에 바닷물 속에 들어가기도 한다. 바닷물 속에서 나온 후 그는 호텔방에 홀로 앉아 오열한다. 그가 왜 그토록 오열하는지 관객은 모른다. 다만 그에게 깊이 숨겨둔 슬픔과 아픔이 있다는 것만 짐작할 뿐. 마치 위태롭게 버티고 있던 담장이 무너진 듯 그는 한쪽 어깨를 내려뜨린 채 한없이 오열한다.

 

사실 31세는, 청년도 어른도 아닌 애매한 나이다. 아직 사회적으로 확실한 지위를 얻기도 이른 나이다. 그는 어쩌면 실직을 했거나 사업이 망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딸에게 카페를 하다 그만두었다는 말은 한다. 무심하게 말했지만 어쩌면 이것이 그에겐 큰 고통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아빠 역시 어른이 되기 위한 길목을 위태롭게 걸어가며 혹독한 성장통을 겪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딸은 20년이 지난 후, 그래서 세상을 어느 정도 겪고 부모가 되고 나서 비로소 당시 아빠가 많이 불안해하고 우울해했고 아파했던 것을 '이해할 것 같은' 심정으로 회고한다.

아빠가 혼자서 깁스를 풀려고 애를 쓰다 피를 흘리는 모습과, 그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어른 잡지를 보는 딸의 대비되는 장면에서, 당시 아빠에게 무심했던 자신에 대한 자책 혹은 회한이 드러난다(이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한다).

 

그런 무심한 딸과 달리, 아빠는 자신이 지켜주지 못할 때를 대비해 딸에게 호신술을 가르쳐준다. 어느 유명 영화 평론가는 이 장면에 대해, 아빠가 자살을 결심했기 때문에 이렇게 했다는데, 글쎄… 나에겐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해석은 각자의 몫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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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호신술을 가르쳐주는 아빠

(사진 출처: ㈜그린나래미디어)

 

 

이 영화에서는 아빠가 딸의 등에 선크림을 발라주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외부의 공격(햇빛)으로부터 딸을 보호해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이 형상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제목 애프터썬은 after sun이 아니라 한 단어로 이루어진 'aftersun'이다. 흔치 않은 단어인데, 사전을 찾아보니, '볕에 탄 후의(후에 쓰는 로션)'이라고 나온다.

아빠가 딸에게 볕에 타지 말라고(즉 외부의 공격에 당하지 말라고) 로션을 발라줬지만, 딸은 그 후 20년을 살면서 볕에 탈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종종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장통을 겪으며 아빠의 나이인 31살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 노인이 된 아빠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혹자는 그래서 아빠가 어쩌면 그 여름휴가가 끝난 후 자살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엔딩 씬의 춤추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아빠가 들어간 장면이 죽은 아빠가 소피의 꿈속에 나타나나 거라고 한다.

나에겐 오히려 이 장면이 아빠가 죽을 결심을 버리고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간 것으로 보았다. 억지로 이 영화를 비극적으로 해석해서 신파 정서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정선영 프로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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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25.01.14 By관리자 Views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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