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길목연재] 정선영의 영화로 세상 읽기

d2d0d9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posted Apr 08, 2025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당신이 본 것은 진실인가?

 

 

그동안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란 영화는 간결하고 슴슴한 스토리에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연출이 전부(그럼에도 놀랍게도 재미있고 감동적인!)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매우 잘 짜인 정교한 스토리에, 영화적 기교가 세련되게 구현된 연출력이 빛이 났다.

 

이란 시내에 사는 한 중산층 부부가 외국 이민 문제로 다투다가 별거하게 된다. 아내가 친정으로 가버리자, 남편 나데르는 집안 살림을 하고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봐줄 사람으로 도우미를 고용한다. 그렇게 이 집안 도우미로 일하게 된 라지에가 어느 날 노인을 침대에 묶어두고 외출한다. 그 사이 노인이 침대에서 떨어지고 퇴근해서 돌아온 나데르가 쓰러진 아버지를 발견한다. 게다가 집안에 있던 돈마저 사라졌다. 나데르는 라지에를 의심하고, 결백을 주장하는 그녀를 분에 못 이겨 문밖으로 밀쳐버린다. 다음 날 라지에는 그가 자신을 밀치는 바람에 계단에서 넘어져 4개월 된 태아를 유산했다며 그를 살인죄로 기소한다(이란은 남의 태아를 유산시킨 것도 살인죄가 되는 것 같다).

 

씨민1.jpg

 

 

과연 나데르가 라지에의 임신 사실을 알면서도 밀쳤는지 그에 따라 죄의 유무를 가르는 것이 법정의 핵심 공방으로 떠오른다. 당연히 나데르는 몰랐다 하고, 라지에는 그가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때 과연 그녀의 유산이 나데르가 밀쳤던 것이 원인인지도 또 다른 공방으로 이어지게 된다.

 

영화는 이들의 주장의 진실 여부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각자의 캐릭터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주장을 전개할 뿐이다. 평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보였던 나데르는 자신의 위기 앞에서 비합리적이고 이기적인(사실 구속의 위기 앞에서 이런 태도는 당연하지만) 모습을 보이고, 라지에 역시 승소를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주장을 이어나간다.

 

이때 장면 편집이 재미있는데,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장면들을 감독이 의도적으로 숨겨버린 것이다. 라지에가 그 집안 가정교사와 자신의 임신에 대해 말할 때 과연 나데르가 부엌 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장면이 생략되고, 나데르가 라지에를 밀치는 장면 이후 계단에서 넘어지는 장면도 생략한 채 이미 계단 아래에 넘어져 있는 컷으로 점프하는 식이다.

 

결정적인 반전이 되는 장면, 치매 노인이 밖에 나돌아 다니다가 교통사고를 당할 뻔했을 때 그를 길 건너에서 애타게 바라보는 라지에의 모습 이후의 장면 또한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이 반전 상황과 관련된 라지에의 주장 앞에서 관객은 그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멈추게 된다. 그녀를 응원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는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 설정이다.

 

씨민2.jpg

 

 

이 전략은 극 중 인물들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진실에 대한 판단을 맡겨놓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일본 고전영화 <라쇼몽>과의 유사성을 떠올리게 된다. 너무 오래전에 봐서 라쇼몽의 디테일한 장면까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각자 처한 입장이나 시선에 따라 진술이 달라지고 그래서 무엇이 진실인지 모호해진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좀 더 확장된 세계관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본적인 이야기에 이란 사회의 계급성이라든지, 엄격한 종교적 교리에 묶인 여주인공의 매우 경직된 안타까운 선택, 부모들이 자식 앞에서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갈등하는 상황 등에 관해서도 부가적으로 제시된다.

 

씨민3.jpg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이 영화에서 묘사된 이란 여성들은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타입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데르의 아내 씨민은 진바지를 입고 직장 생활을 하며, 남편과 싸울 때는 거의 남편을 제압할 정도로 당당한 여성이다. 히잡도 대충 쓰고 다닌다. 이란 영화에서 주로 등장하는, 동그랗고 작은 연못이 있는 전통 주택이 아닌, 아파트가 주요 공간이란 점도 흥미롭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알아보니 이 영화는 베를린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곰상을 비롯해서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 각본상 등 주요 상들을 휩쓸었다. 수상 경력 때문만은 아니지만, 강추하고 싶은 영화다.

정선영 프로필.png


  1.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당신이 본 것은 진실인가? 그동안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란 영화는 간결하고 슴슴한 스토리에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연출이 전부(그럼에도 놀랍게도 재미있고 감동적인!)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매우 잘 짜인 정교한 스토리에, 영화...
    Date2025.04.08 By관리자 Views16
    Read More
  2. 돈 룩 업(Don't look up) - '미국적인 것'에 대한 조롱

    돈 룩 업(Don't look up) -'미국적인 것'에 대한 조롱 영화 <돈 룩 업>은 달달하고 쌉싸름한 블랙 코미디이다. 에베레스트산 크기의 혜성이 지구를 향해 달려오고 있고 이 혜성과 충돌해 6개월 후에 지구가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과학자들이 ...
    Date2025.03.14 By관리자 Views36
    Read More
  3.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 - 혹시 저들이 맞고 내가 틀린 것은 아닐까?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 -혹시 저들이 맞고 내가 틀린 것은 아닐까? 가끔 '믿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에게는 대개 남들은 아니라고 해도 자신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있다. 특히 대한민국처럼 좌우 대립이 극심한 나라에서는 오직 나...
    Date2025.02.08 By관리자 Views51
    Read More
  4. <애프터썬> - 누구나 볕에 그을리며 성장한다

    <애프터썬> -누구나 볕에 그을리며 성장한다 누구나 나이가 들고, 그래서 부모가 되면(아니, 부모가 안되더라도) 비로소 저절로 또는 어떤 경험을 통해서 어린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의 마음이나 생각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비록 그 당시 기억이...
    Date2025.01.14 By관리자 Views86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