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혜의 뉴욕 스토리 26 - 나의 피난처, 호숫가 통나무집
트렁크 두 개에 짐을 넣었다.
하나에는 쌀이나 미역 등 마른 음식과 간단한 주방 기구들을 싸고, 다른 하나에는 옷과 일용품을 챙기고 빈자리에 요가 매트와 3파운드 덤벨 2개, 성경책, 그간 읽고 싶었는데 미루어 놓았던 유발 하라리(Yuval Harari)의 ‘사피엔스(Sapience)’, 유종호 교수님의 ‘시란 무엇인가’를 넣었다. 뭔가 생각하고 꼼꼼하게 짐을 챙긴 것이 아니라, 주말에만 있을지 얼마 동안 머물게 될지 몰라, 대충 눈에 띄는 대로 넣었다. 아파트에 나오면서 한 번 휙 둘러보다 식탁 중앙에 있는 아주 조그만 화분에 눈이 갔다. 발렌타인 데이 때 트레이더 조에 갔다가 앙증맞은 싸이클라멘(Cyclamen) 미니 화분을 보고 나 자신을 위한 선물로 샀었다. 꽃이 지면 버리려고 했었는데 작은 게 애처러워 차마 쓰레기통에 넣을 수가 없었다. 집이 건조하기도 하고 화분이 작아 물을 안주고 외출했다 들어오면 잎이 축 까불어져 있었다. 그 화분을 손에 들고 두 트렁크를 끌고 아파트를 탈출했다. 그러느라고 고추장, 된장을 덜어 놓은 병을 부엌 카운터에 놔두고 온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뉴욕시는 너무 밀집되어 코로나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세계 팬데믹의 중심이 되어 불안과 두려움의 날들이 계속되었다. 필수적인 용무 외에는 외출 금지와 재택근무령이 내려졌다. 층마다 열 세대가 넘은 아파트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사람을 만나면 확 놀래고 획 피하고, 지하실에서 빨래를 하면서도 조마조마하고, 일층에 메일을 체크하는 일도 고무장갑을 끼고 손을 여러번 씻고, 메일과 소포도 이틀정도 쿼런틴을 했다가 풀어보는 날들의 스트레스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사촌이 걱정이 되어 안부 전화를 했다. 뉴욕 근교 호숫가에 통나무 집이 비어 있으니 와서 지내라고 고맙게도 제안을 했다. 남편도 당분간 재택근무를 할 수 있어 아파트에서 갇혀 지내는 대신 이곳에 오게 되었다. 난방이 있긴 하지만 4월인데도 몹시 추웠다. 장작과 나뭇가지를 주어다 종이를 올려 불을 지피는 일은 남편의 몫이었다. 남편은 쏟아지는 이메일과 줌 미팅과 텔리메디슨 셋업으로, 3끼 식사 때와 꼭꼭 챙기는 간식 때를 제외하고는 방콕을 하고 있었다. 삼시 세끼의 식량 조달과 음식 준비로 나의 시간과 뇌구조의 70 프로 용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럼, 밥은 각자 알아서 먹는 걸로“가 남편이 제일 무서워하는 말이 되었다. 초원의 집(Little House on the Prairie)에 나오는 로라네 (Ingalls family)가 떠올랐다. 그것보다는 쏘로우(Thoreau)의 월든 호숫가(Walden Pond)와 비유가 맞을까?
보물단지처럼 여긴 음식 트렁크를 막상 열어보니 고추장, 된장이 없었다. 뉴욕 생활은 보관할 장소도 좁고 해서, 조금씩 사서, 쟁여놓고 먹질 않으니 쿼런틴 2주 식량이 확보되지 않았다. 뉴욕시처럼 음식배달이 안되고 우체국, UPS나 Fedex 서비스로 2-3주가 걸린다고 한다. LA에 사는 친구가 집에 있는 고추장, 된장, 국 간장, 국수, 김, 멸치, 케익믹스, 비프져키, 레몬차, 비타민 C, 손으로 만든 마스크를 챙겨서 보내주었다. 어찌나 고맙고 미안하던지…. ‘우리가 모두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교황님의 말씀이 내 귀에 울리며, 가까운 주위를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가 더 열심히 생각하고, 비록 작고 적지만 해보려고 하는 마음이 들게 했다.
LA 친구가 알려준 대로 파와 콩나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냉장고에 있던 파가 물만 담가서 자랄 수 있을까 했는데 어느 틈엔가 쑥 커져 있었다. 딸과 며느리에게도 알려주니 각자 키워서 병에 넣은 사진들을 보내주었다. 햇콩을 주문하고 유튜브 동영상대로 따라 하니, 한 일주일 만에 콩나물이 믿기 어렵게 자라나 오늘 점심에 드디어 콩나물 밥을 해 먹었다. 자주 물을 주면서 들여다보고 쑥쑥 자라는 콩을 보니 신기하다. 사진을 친구한테 보내주니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다면서 자기도 키워보겠다고 한다. 한 달 동안 밖에 한 번도 안 나가고 집콕한 친구도 아파트에서 허브를 키우고 있는데 요즘은 씨앗, 흙, 화분이 함께 박스로 배달된다고 한다.
조그만 싸이클라멘 화분을 햇빛을 따라 옮겨주고 물을 열심히 주니 잎사귀 수도 많아지고 부쩍 자라났다. 화분용 흙(potting soil)이 있으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아 밖에서 흙을 퍼다가 큰 화분에 옮겨 주었다. 플로리스트(florist) 친구가 흙이 너무 무거워(dense)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을 수 있다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주라고 하였다. 빈 통에다 바나나나 과일 껍질을 사흘 정도 우려내어 물을 주고, 달걀껍질을 말려 부셔주면 화초가 윤기 있게 잘 자란다고 알려주었다. 아래층 창가에 있는 군자란이 햇빛과 물을 제대로 못 받아 잎이 말라 있었고 속에 하얀 것이 피어, 알코올 스프레이를 뿌려주었다. 전에는 화초를 키우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잎사귀에 먼지를 닦아주고 물을 주고 마른 잎을 따 주는 동안 나의 숨결이 편안하게 쉬어지고 몸이 이완되고 마음의 평정을 가져다주는 것을 처음 느꼈다.
어머니 생각이 문득 났다.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셨는데 아파트로 이사 가신 후에도 발코니에 좋아하시는 난, 관음죽, 그리고 여러 화초들을 가득하게 키우셨다. 나중에 건강이 안 좋으실 때도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 물주는 것을 손수 하셨다. 사서 고생을 하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생명을 돌보고 자라는 것을 보는 기쁨과 평안을 알 것 같다. 잘 자란 내 콩나물 찜통을 보시면 “영혜야, 참 잘했구나!”하고 함빡 웃으실 것만 같다.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으면서 내가 이곳에서 다시 농경사회로 돌아가는 것 같다. 콩나물과 파를 키우고 싸이클라멘 화분 하나를 키운다고 농경사회로 전환이란 발상이 우습기는 하지만 내 기분은 그렇다. 하라리는 우리가 역사의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반전으로, 250만년 동안 사피엔스가 살아온 수렵사회에서 만 년 전 농경사회로 전환은 인류의 돌이킬 수 없는 함정이었다고 한다. 그 전에 수렵사회는 사람들이 일에 치이지 않고 숲에서 열매를 따 먹고 짐승을 사냥하고, 행복의 잣대로 보면 삶의 질이 더 좋았다고 한다. 곡식이나 한 종류에 식량에 편파 되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건강한 다이어트를 하고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개 이외는 가축을 키우지 않았고 인구도 밀집되지 않았으니 전염병도 창궐하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역사의 기록이 없는 수렵사회를 미화한 감은 있지만, 역사가 진보의 방향으로 가는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숲을 탐험하면서 눈에 불을 켜고 따먹을 것이 없나, 캐 먹을 것이 없나 둘러보지만 21세기의 사피엔스의 뇌엔 전혀 아이디어가 없다. 농경사회까지는 몰라도 수렵사회까지는 무리인가 보다.
4월은 비도 많이 오고 영하 가까이 내려가는 추운 날들이 많았다. 하루는 창밖을 내다보니 그 많은 오리들이 어디서 다 나왔는지 떼를 지어 서둘러서 호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항상 두 마리 혹은 서너 마리가 쌍을 지어서 다녔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돌았다. 얼마 있다 창밖에 우당 탕탕 우박이 쏟아지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참 신기하다. 오리의 DNA 속에 날씨를 감지하는 서바이벌의 능력이 숨어 있나 보다. 이젠 오리가 한두 마리 떠다니면 날씨가 괜찮다는 신호로 이해한다.
그동안 뉴욕시에서 많이 그리워했던 숲과 호수 주변을 걸으면서 자연이 주는 메시지를 읽으려 한다. 사람의 뇌는 기본적으로 사물을 볼 때 사람의 얼굴로 인식을 먼저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바위나 돌을 보면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들이 보인다. 고양이 혹은 사자 같은 표정의 돌을 산책길에서 만나기도 하고 스마일을 한 돌도 만난다.
물구나무서기 하는 나무를 만나기도 한다. 불안과 혼돈에 업사이드 다운된 우리의 모습 같았다.
아마도 내가 원하는 메시지를 찾으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산책을 시작하는 입구에 뿌리가 뽑혀서 넘어져 다 쓰러진 나무에 거의 죽은 고목인가 했는데 새잎이 나고 살아있는 것을 보고 놀라웠다.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로 고스트 타운이 되고 처참하게 넘어진 뉴욕시에도 이 매서운 4월이 지나면 새잎이 돋듯 다시 살아나리라는 자연의 메시지를 읽는다.
PS. 이 호숫가 통나무집은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불안하고 두려웠던 5년 전에도 나의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그 때 이곳에서 하루 머물렀었다. 여기서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Cascade Lake, Warwick에 트레일을 걷다가 입구 게시판에 조그맣게 붙어있었던 시가, 마치 그 시가 나를 위해 거기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5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그 시가 거기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주말에 다시 그 곳을 찾아갔었다. 아직도 그 시가 거기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 대한 절망이 내 안에서 자라고
내 삶과 아이들의 삶이 어떻게 될까 걱정스러워...
한밤중에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잠이 깨면
나는 야생오리들이 물 위에서 아름답게 쉬고
큰 왜가리가 거니는 곳으로 가서 누워 본다
그곳에서 나는 앞일에 대한 근심으로
미리 자신들의 삶을 힘들게 하지 않는
야생이 주는 평화에 젖어들고
고요한 물의 현존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면 낮에는 보이지 않는 별들이
내 위에서 빛을 담고 기다리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잠시 세상의 은총 속에서 쉬고 나면
나는 자유롭다.
- 웬델 베리 <야생 속에서의 평화> (류시화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