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미티트레킹 3부 - 3, 4일차 기록
#Dolomiti 트레킹_Day+3 (2018년 8월 14일)
고통끝에 낙이 온다고 정말?
출발은 순조롭다. 호텔식으로 꾸며진 2080 고지의 레퓨지(대피소)에서 어젯밤 숙면을 취하고 훌륭하게 차려진 아침식사도 마치고 8시 10분 출발했다. 오늘은 지난번 몽블랑 트레킹과 이번 돌로미티 트레킹까지 합쳐 가장 긴 거리를 걷게 될 예정이다. 아침 먹는데 구름이 가득하여 살짝 걱정했으나 이내 걷히고 기온도 그리 차갑지 않은 걷기에 좋은 날씨다.
아침 숙소 창가에서 바라본 낮게 깔린 구름, 2080 고지이니 낮다고 할 수도 없다
지도를 살펴보니 900미터를 내려갔다 다시 1500미터를 오르고 거리는 17킬로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모든 일정을 마치고 저녁에 확인해 보니 22.2km, 3만 5천보를 걸었다. 내가 하루치 산행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이 정도가 아닌가 한다. 앞으로 3만보 이상의 산행이나 트레킹은 사양해야겠다. 본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임계치는 도전할수록 높아지거나 길어지거나 하기 때문에 늘 확장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룸메이트 시몬은 점심 무렵부터 오른 무릎에 신호가 오기 시작해서 오후 내내 고통스러워했다. 일행도 리더도 기다려줄 뿐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 하기야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 인생 어차피 혼자 가는 거다!
홀로 걷는 길, 팀으로 움직인다고는 하나 어차피 혼자 가는거다!
어제 최고의 숙소였다는 평가는 취소다. 하루아침에 뒤집을 말을 왜 했냐고? 오늘 일을 어찌 어제 알 수 있으리오.
여기 돌로미티에선 전쟁 관련 스토리가 많이 남아 있다. 전쟁 전엔 오스트리아와 독일 영역이었다가 1차, 2차 양차대전을 거치며 이탈리아 영토로 경계가 바뀐 곳이다. 어제 묵은 숙소는 오스트리아 전통이 남아 있어 특유의 장식을 강조한 화려함이 산장 건축의 디자인에도 반영되었다 한다.
오늘 트레킹을 마치고 도착한 숙소는 1500고지에 위치한 에메랄드 빛 호수 옆에 있는 고풍스러운 곳이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친위대가 병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장교용 숙소였는지 장식에 고급스러움이 묻어난다. 와인글라스와 실버웨어를 겸한 테이블에서 훌륭한 저녁식사를 먹었다.
트래킹을 도중 산중에서 이런 식당에서 식사를 할 줄이야!
숙소 입구에 브헤이즈 호텔이라고 떡하니 적혀있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룸에 딸려 있지는 않은 것만 빼면 여느 호텔 못지않다. 다만 2인실에 묵었는데 침대가 하나는 퀸 사이즈고 하나는 싱글이다. 체구가 큰 시몬이 나에게 큰 침대를 양보했다. 내가 작은걸 쓰겠다고 했는데 수염이 더부룩한 이 친구가 연신 사양한다. 이런 것 보면 서양친구들도 장유유서의 전통이 있기는 한가보다. 돌과 나무로 1800년대 지어진 이 호텔은 클래식하다. 좋은 의미다.
비를 제대로 맞으며 걷다
두 번 트래킹을 거치며 대체로 무난한 날씨였으나 오늘 제대로 된 소나기를 만났다. 무릎이 시원찮은 우리 팀 마담과 시몬에게는 엎친데 덮친 격이지만 나에게는 산행 중에 모자에 떨어지는 빗소리만큼 매력적인 소리도 드물다.
무릎 안 좋은 동료들에게는 엎친데 덮친 격인 주먹보다 큰 자갈이 끝없이 펼쳐진 내리막 구간을 만났다. 산사태로 만들어진 돌무더기 급경사에서 가이드가 스키 타듯 내려간다. 자세만 낮추면 자빠지지 않을 것 같았다. 같이 걷는 동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스키 타듯 기마자세에 발바닥 안쪽에 엣지를 넣고 재미지게 따라 내려갔다.
자갈스키라는 새로운 스포츠, 걷기보다 돌무더기와 함께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더 낫다
어느 순간 포기할 때가 온다. 어떻게 표현해야 적확할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런 때가 온다. 삼만보 넘어 얼마를 더 가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버트라우저를 입고 있어 안에서는 더위가 올라오고 숲속 가운데 비까지 내리니 밖에는 한기가 공존한다. 몸은 산행으로 지쳐가는데 사나흘 계속 먹은 치즈가 배속에서 발효를 한다.
며칠 전 장거리 야간 버스의 냄새공동체 기억이 의식을 지배할지라도 이럴 땐 방구를 뿡뿡 뀌면서 속에 있는 불편한 것을 내보내야 시원한 것이다. 포기는 그런 극한의 상황에 오는 것이다. 누구도 그 소리에 신경을 쓰지도 않고 찡그리지도 않는다. 다만 아유오케이 그러고 싱긋 웃고 만다. 그렇게 트레킹팀은 생리현상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1500고지 산중에 있는 호숫가 호텔 주차장에는 차가 가득하다. 트레킹을 선책하지 않으면 35000보를 걷지 않고도 차 타고 쉽게 접근이 가능한 곳이다. 차를 탈 것인가 걸을 것인가? 선택은 자유다.
오늘의 사족 1. 어제가 최고라더니 오늘이 더 좋은데 그랬더니 가이드 왈 어제는 레퓨지 중에서 최고였고 오늘은 호텔이잖아 그런다. 하기야 맞는 말이다. 급이 다른 놈 둘을 비교했으니 틀려도 내가 틀린 게 맞다. 쓰고 보니 이상하네. 말이 되는 거 맞지? 2. 지난 몽블랑때도 산행하다 만나 디저트로 즐겼던 블루베리를 또 만나다. 야생 블루베리는 언제 먹어도 맛나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야생 블루베리
3. Digitally disconnected 된 상황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사피엔스의 작가 하라리가 매년 한 달씩 모든 연결이 끊어진 곳으로 명상하러 간다는 이야기가 새롭게 들린다. 4. 새벽 산책 나왔다 무선인터넷이 잡히는 곳이 있어 번외로 사진을 올렸다. 하루에 한편만 글을 써서 올리려고 생각했었는데 번외까지 쓰게 될 줄이야. 하기야 한치 앞을 알 수 있다면 인간이 아니겠지.
산행 모임방에 위 사진을 올렸더니 눈썰미 좋은 친구가 금방 맞춘다. 물 위에 비친 산 모습만 편집해서 뒤집어 놓은 것이라고.. 아래 사진을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산봉우리와 호수에 비친 모습
#Dolomiti Day+4 (2018년 8월 15일, 수)
Green Green Grass of Home
어제 비가 내린 덕분에 새벽에 고요하다. Lago di Braies(브레이즈 호수)는 차로 접근할 수 있어 여름 한철 피서객들이 몰리는 곳인데 어제 비가 잔뜩 오는 바람에 사람이 많이 빠져나가고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고즈넉하기 짝이 없는 아침이다. 새벽에 깨어 산책 나갔는데 절경이라고 말할 뿐 다른 표현은 찾지 못하겠다.
휴대폰 신호가 잡힌 덕분에 글도 올리고 카톡도 하고 메일도 몇 통 보냈다. 발전과 진보의 상징이 언제나 어디서나 연결이 끊기지 않는다였는데 디지털리 디스커넥티드가 마음의 평안을 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새벽녘에 일어나 해가 뜨도록 호수 주위를 맴돌았다
산악 가이드가 조심하라고 하면 진짜 위험한 길이라는 의미다. 오늘도 헛디디면 한 오백 미터는 굴러 금세 산 아래까지 닿을 수 있는 길을 두어 번 지났다. 코스가 짧지 않다. 한 십여 분 신경을 곤두세우고 걷노라면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머리칼이 쭈뼛서는 이런 루트를 여러 차례 지난다
저 푸른 초원 위에라는 노래 구절이 절로 생각날 정도로 잘 관리된 풀밭이 끝도 없이 펼쳐진 곳을 지난다. 그 끝자락에 오늘 묵을 Rifuge Ballanbro(2040미터) 숙소가 있다. 레퓨지 앞 돌로 쌓은 견고한 성채가 있는데 보기에도 전쟁 때 사용한 건물 같다. 오늘이 나흘 차인데 첫날은 2600고지의 황량한 달 표면 같은 풍경, 둘째 날은 대피소라고 해 놓고 호텔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장과 큰 방울을 목에 걸고 있는 소들이 드문드문한 목가적 풍경, 어제는 1500미터 높이에 에메랄드 빛 호수와 그 표면에 비친 돌로미티 산군들의 위용, 그리고 그 모두를 압도하는 끝없이 펼쳐진 오늘의 전망.
벤치에 앉아 한참이고 초원을 바라보았다
노새잡이 엘로디가 첫날 숙소에서 한 이야기 ‘여기 이곳은 단지 돌로미티의 인트로에 불과해’라고 했던 말이 빈 수레가 아니었구나!
오늘의 사족 1. 베드가 10개 있는 도미토리에 산악자전거 팀이 함께해서 열 명 꽉찼다. 지난 몽블랑 이번 돌로미티 도미토리 이용자의 특징은 모두 소리 없이 움직이고 밤에도 고요하다. 낮에 산행하고 산악자전거 타고 열심이었을 텐데 코 고는 이가 없는 것이 기이하다. 무척이나 운이 좋았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2. 오늘도 빠지지 않고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다. 캬~~
트레킹을 마치고 초원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한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