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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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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정읍댁의 정원일기 1 - 목장갑과 낫

posted Aug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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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정읍댁의 정원일기 1 - 목장갑과 낫 

 

 

시작은 강원도 원주에서였다. 지난 5월과 6월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문화관에 입주 작가로 있으면서였다. 입주 다음 날, 나는 동네 성황당에서 오랜 세월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그 나무와 첫 대면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깨를 심고 있는 모자(母子)를 보았다. 서울내기인 나는 뭣도 모르고 할머니께 해보고 싶다고 덤볐다. 할머니는 생전 처음 농사 흉내를 내는 나에게 ‘전문가’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다음 날은 대파 모종 심기에 물주는 일을 거들었다. 주말이라 도시에서 농사를 도우러 온 가족들이 내게 막내형제 재산 내역을 은근슬쩍 자랑했다. 하지만 난 그 집 총각 아들에겐 관심이 없었고 대신 여든일곱 살 계순 할머니에게 마음을 뺏겼다. 이후 두 달간 거의 날마다 성황당 옆 내 나무와 할머니에게 들렀다. 개밥을 주고 함께 믹스커피를 마시고 과일도 먹고 가끔은 현관도 쓸고 모판도 닦고……. 할머니만 허락하셨다면 그 집에 들어가 살고 싶을 만큼 좋았던 두 달이었다. 시골집과 어머니라는 존재만으로 그랬다. 그리고 나무와 흙과 함께한 그 두 달은 나도 몰랐던 내 정체성에 대해 알게 된 기간이었다. 

 

올 3월 말, ‘정원’에 관한 일본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주인공 부부처럼 정원에서 나오지 않은 채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정원을 가진 남자가 함께 살자고 하지 않는 이상 내가 나의 정원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원주생활이 끝나갈 무렵 나는 앞으로 서울생활이 힘들겠다고 느꼈다. 그래서 다른 레지던스를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떠올린 곳이 바로 <고경심의 정읍댁 단풍편지>의 주인공인 집이었다. 마침 원주를 떠나기 직전, 그곳으로 날 만나러 와준 사진동기들 중 한 분에게 부탁을 했더니 일사천리로 정읍 집과 나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징검다리가 되어 준 그 분은 내게 길목인과 유성기업을 만나게 해 준 바로 그 운명의 노신사였다. 그동안 나의 위아래 없는 직설에도 불구하고 내 말에 늘 귀 기울여 주시던 분이었다. 

 

아무도 내 행보를 예측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나조차도. 원주에서 퇴소하자마자 내처 여름 탈핵도보순례를 마치고 간 서울은 돌아간 곳이 아니라 잠시 들른 곳이었다. 서울에 도착해 여러 가지 일들을 간단히 정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탈핵울산시민공동행동에서 올라와 청와대 앞 농성을 시작했다. 일복이 많은 건 타고난 팔자였다. 두 주간 울산 팀과 함께 하고는 다시 짐을 싸서 전라북도 정읍으로 내려왔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내게 본채 비밀번호를 알려준 집주인은 이 세상 사람인가 싶을 만큼 호탕하고 여유로웠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하지만 빡빡한 서민인 나는 허락한 본채 대신 굳이 사랑채를 고집하며 선을 그었다. 부자 집주인의 풍성한 인심을 조금은 사양함으로 가난한 선비의 결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한 열흘쯤을 지냈다.  

 

며칠간 외출했다 돌아온 정읍집 초록대문은 말쑥하고 부티 나던 첫 인상과는 다르게 살짝 친근하게 다가왔다. 

다음 날부터 집과 좀 친해지기로 했다. 거미줄과 잡초를 제거하며 단기 집사로서의 일을 시작했다. 

아침에 본채 문을 열면 편백나무 향이 코로 쏘옥 들어오며 나를 맞는다. 그리곤 보챈다. 어서 바람을 쐬어 달라고. 나는 온 창문을 활짝활짝 열어 바람으로 집을 씻긴다. 바람과 황토가 맞닿으며 숨을 쉰다. 더불어 나도 깊은 호흡을 한다. 

참, 이 집의 이름은 ‘만영재(萬瀛齋)’다. 만수동의 ‘만’과 옛 두승산 이름인 ‘영주산’의 ‘영’자라고 한다. 앞에 저수지가 있어서 바다·늪 영 (瀛)자를 썼나 보다.

만영재가 다른 레지던스보다 출중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 불필요한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피아노가 있다는 것이다. 칠 줄 아는 곡은 한두 곡뿐이지만 피아노가 없었다면 외로움을 어찌 견딜까 싶었다. 볕 좋은 날에는 침구를 일광 소독했다. 거미들은 나와 경쟁이라도 하듯 다음 날이면 또 다시 거미줄을 쳐댔다. 약올라죽겠지, 하는 것 같았다. 그것들도 생명이라 처음엔 자연을 훼손하는 게 아닐까 망설여졌지만 사람 사는 집에 거미줄은 왠지 게을러 보여서 계속 치우기로 했다.  

 

드디어 낫을 들었다. 밤새 내린 비에 잔디가 쓸려 배수로로 빠져 있었다. 철제 덮개를 들어 올려 잔디를 제거하다 보니 빨랫줄에 걸린 목장갑을 끼게 되었다. 잡초를 따라가다 보니 화단에 다다랐다. 나는 잡초와 화초도 구분 못 하는 서울 촌것이다. 그렇기에 나름의 기준을 정했다. ‘경계와 기생.’ 집 주인이 구획해 놓은 벽돌 넘어온 것들과 다른 나무의 생장을 방해하는 식물은 가차 없이 베었다. 기와와 흙 담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들도 예외 없었다. 서식지가 파괴되자 작고 까만 모기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준비 없는 정원사인 나는 핫팬츠바람에 허연 다리를 내어주고 아침잠에 취해 쓰러진 식물들을 마구 잘라내었다. 남원의 도익은 잡초도 생명이라 뽑지 못한다고 했지만 나는 식물에게도 미용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냥 두면 마냥 자라는 머리카락을 미용실 가서 돈 내고 자르는 데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팀 버튼 감독의 ‘가위손’으로 분해서 낫을 휘둘렀다. 남의 정원이라도 내가 사는 동안은 가꿀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자부하면서, 집주인에게 묻지도 않고 기어이 벽돌을 다 드러내고야 낫을 놓았다. 그리고는 깔끔한 정원을 위해 잘려나간 식물들에 대한 경의 표시로 그들이 남긴 분홍색 꽃 세 송이를 책상 위 꽃병에 꽂았다.  

아침에 한 번 대낮에 한 번, 두 번 벌초를 하고 두 번 샤워를 했다. 땀을 흘리니 본채에 있는 페리에 반병과 프렌치로스트 아메리카노 봉지에 손이 덥석 갔다. 그동안 집주인이 먹으라고 했어도 손대지 않던 것들이었다. 노동 후에 오는 당당함이었다. 

 

살면서 나도 모르던 재능을 발견하는 때가 있는데 올해가 내게는 그렇다. 글쓰기 외엔 젬병이던 내가 올해 금속공예와 가죽공예와 정원손질까지 손을 대고 있다. 점점 머리 쓰는 일보다 육체노동의 순수함에 더 끌린다. 그 노동 후에 아름다움이 남기에 더욱 그렇다. 이제 나는 운전보다 걷기가, 가죽장갑보다 목장갑이 더 좋다. 조만간 전국의 정원 딸린 빈집의 소유주들이 내게 연락을 하면 무상으로 거주하며 정원을 가꿔주겠노라 공언할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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