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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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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담리 정원일기 1 - 배롱나무 구출 대작전

posted Nov 0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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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담리 정원일기 1 - 배롱나무 구출 대작전 

 

 

전국의 배롱나무 사이에 내 소문이 퍼졌나 보다. 정읍에 이어 나를 부른 배롱나무는 인터넷도 안 들어오고 공공상하수도 시설도 미치지 않는 시골마을에 있었다. 문명이 비껴간 만큼 모든 것이 느릿느릿 느긋하게 펼쳐져 있고 별이 쏟아지면 무성한 대나무 숲에 담기는 그런 마을이었다. 나는 그곳을 별이 담기는 마을, ‘별담리’라 부른다. 

그곳에는 여든 세 살 어머니 한 분이 60년 동안 맨손으로 일군 밭이 있다. 그 밭에는 북쪽 대나무 숲으로부터 밭을 경계 짓는 배롱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알고 보니 한 그루는 엄마 나무, 나머지 한 그루는 아들 나무였다. 지금까지 40여 년간 서로 의지해 온 모자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때 묻힐 나무라고 했다. 대숲으로부터 뻗어 나온 질긴 뿌리와 야산에 널려있는 넝쿨에 싸인 배롱나무 두 그루를 말끔하게 정리해 주는 건 이제 내겐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 한 쌍은 내가 구해줬다고 말할 수 없다. 

문제는 밭 아래 있는 배롱나무였다. 무성한 모시풀이 아래로부터 가득 둘러쳐있는 배롱나무는 밭 위쪽 나무들에 비해 비실비실했다. 자세히 보니 밭 아래쪽으로 여러 그루의 배롱나무들이 있었다. 오랜 세월 사람 손이 미치지 않은 배롱나무들은 다른 풀과 나무들에 둘러싸여 원래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쓰시던 왜낫을 오른손에 쥐고 힘을 주었다. 정읍의 두릅나무를 베어낸 위력으로 모시풀 정도 베기야 식은 죽 먹기였다. 다만 그 모시풀은 오래 전 밤마다 어머니 무릎에서 꼬여지고 이어져서 실로 만들어진 식물이었다. 그 인생사가 자꾸만 손아귀에서 힘을 빠지게 했다. 그래서 모시풀을 뿌리째 뽑지는 못하고 줄기만 자르고 말았다. 모자(母子) 배롱나무 맞은편, 감나무 사이에 있는 배롱나무는 그렇게 반나절 만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나무가 별담리에서 내가 구한 배롱나무 1호였다. 다른 튼실한 배롱나무들도 많았지만 비실비실한 그 나무를 내 나무로 정했다. 모자 나무 가장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들과 함께 밭의 생장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날 그 밭에 간 이유는 배롱나무를 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실은 배추를 심기 위해서였다. 여느 해 같으면 벌써 어머니가 해치우셨을 일이었지만 올해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배롱나무 한 쌍 아래 포실포실한 흙을 일구고 시장에서 사온 손가락만한 배추 모종을 심고 주변에 쌀겨를 뿌리고 나니 배롱나무를 구해줄 시간이 났었다. 

 

일주일 후 다시 별담리에 갔을 때는 무 씨앗을 심는 날이었다. 나는 무 씨앗이 그렇게 작은 연보랏빛이란 걸 처음 알았다. 밭에 다다르자 흙 위에 제대로 서있기나 할까 걱정했던 여리여리 배추모종들이 그새 태풍을 견디고 제법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배추를 심은 두 이랑 위 배롱나무 한 쌍 바로 아래 한 이랑에 3.5cm 간격으로 무 씨앗들을 심었다. 좁쌀만한 씨앗이 조선무라고 하는 굵직한 무가 된다는 사실은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믿을 수 없는 지식이었다. 그러려면 씨앗이 흙으로부터 영양분을 먹고 자랄 시간이 필요했다. 김장철에 맞춰 모양새를 갖출 거라고 잘 알려진 자연의 시나리오는 아직 보지 못한 기적의 청사진 같았다. 

무 씨앗을 다 심고 나니 감나무 옆 또 다른 배롱나무가 눈에 띄었다. 모시풀과 넝쿨에 둘러싸인 배롱나무 또 한 그루를 구출해 내었다. 감나무, 배롱나무, 감나무, 배롱나무……. 과실수와 관상수를 번갈아 심어놓으신 어머니의 규칙에 미소가 지어졌다.  

 

한 달쯤 지났다. 사람 손길이 미치지 않는 밭에 심겨진 배추와 무에게는 물 줄 사람이 필요했다. 밭의 모든 소산의 생명줄인 어머니가 낙상으로 그간 거동을 못하셨기 때문이었다. 그 흔한 스프링클러 한 대 없는 밭은 그야말로 맨손으로 일궈야 했다. 어머니가 60년간 그러셨던 것처럼. 밭둑 옆에 흐르는, 숲이 내린 물로는 모자라 아랫집까지 내려가 지하수를 얻어와 배추와 무를 적셔주었다. 희한한 건 쨍쨍한 햇빛과 기름진 흙과 부족한 물만으로도 배추와 무가 쑥쑥 자라나는 현상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흙이라곤 만져본 적 없는 내가 고동색 흙에 구멍을 내고 연보라 씨앗을 심고 다독이고 물을 주니 연초록 새싹이 나와서 초록 무청으로 자라나는 모습은 자연의 신비 그 자체였다. 밭일을 마치고 어린 무청을 삶아서 고추장과 들기름과 달걀 프라이를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내 손으로 키운 농작물이 주는 맛은 경건하기까지 해서 2인분을 먹고도 살찔 염려를 하지 않았다. 비빔밥을 해 먹고도 양동이 하나로 남은 무청은 다듬어서 고춧가루와 성근 밀가루 풀과 젓갈을 넣고 생애 최초 무청 김치를 담갔다. 손맛이라곤 하나도 없으면서 김치를 담그다니 스스로 무모하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가 심은 씨앗에서 자란 풀 한 포기 함부로 버릴 수 없는 게 농사가 주는 겸허함이다. 땅은 그렇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소산을 내어주는데 나는 그들에게서 받아먹기만 한다. 그러니 먹기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 먹지 않고 버리는 건 농사짓는 이에겐 땅에 대한 실례라고 여긴다. 

 

나는 방문할 때마다 한 그루씩 배롱나무를 구해주기로 했다. 세 번째 배롱나무는 경사진 비탈에 대나무와 칡 등 넝쿨에 둘러싸여 있었다. 단단한 대나무는 낫으로는 제거가 힘들다. 톱날을 땅과 수평으로 뉘어 지면에서 바짝 잘라야 한다. 날카롭게 잘린 대나무에 누군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낫과 톱을 동시에 사용하며 나는 어느덧 배롱나무 구출작전 전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신없이 풀과 대나무를 베고 나니 어느덧 매끈한 배롱나무가 자태를 뽐내며 숨을 쉬고 있었다. 마른 잔가지들을 쳐주며 배롱에게 그동안 날 기다리느라고 고생 많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곤 네가 기다려냈으니 날 만난 거라고, 말도 못한 채 고단하고 하염없었을 기다림을 치하해 주었다.  

 

네 번째 배롱나무는 빽빽한 대나무와 무성한 잡초들 속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구출작전 전에는 반드시 농사일을 해야만 했다. 들깨를 베어 눕히고, 땅콩을 캐고, 순을 먼저 딴 뒤 고구마를 캔 다음, 한시라도 빨리 배롱을 구해주기 위해 나는 톱과 낫을 쉴 새 없이 휘둘렀다. 아무리 많은 풀과 대나무가 있어도 손질의 횟수만큼 물리적으로 밀도가 줄어든다. 주변 천적들을 제거해주고 나니 배롱나무는 제법 우람했다. 관상수로 가격이 나갈 만큼 자태가 빼어났다. 그렇게 잘 자란 나무도 돌봐주지 않으면 묻히고 말뿐인 밭 주변. 당장 농사가 중요한 어머니께 관상수는 심기만 했지 돌볼 여력이 미치지 못하는 나무였다. 

“하지만 얘들아, 걱정마라. 그래서 내가 왔단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층층이 일구신 너른 밭은 내게는 커다란 정원이었다. 배추도 무도 고구마도 가지도 고추도 호박도 홍당무도 땅콩도 깨도 내게는 어여쁜 화초였다. 하물며 먹을 수 있는 채소와 열매를 주니 고맙기 그지없는 작물이었다. 각종 농작물이 철마다 밭을 장식하고, 우후죽순 대나무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배롱나무들이 그 밭을 죽 둘러서서 내가 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정원, 모든 것이 느릿느릿 느긋하게 펼쳐진 별담리의 정원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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