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조끼 12번째 시위: 컬렉션의 힘
강원도의 힘이라는 영화가 있다. 일상의 비루함, 욕망과 허위의식이라는 주제에 천착하여 같은 공간에 있으며 엇갈리는 동선을 배치하여 이를 극명하게 드러나게 한 영화적 문법에 열광했으나 한때의 열정은 식게 마련이며 그렇게 대중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또 한때 무엇의 힘이라는 관용어구가 회자하기도 하였다. 요즘도 그 힘이 정치판을 휘젓고 있으니 힘이 욕망의 근원인가 보다. 프랑스의 힘이라고 부제를 붙였다 지웠다. 생각해 보니 프랑스가 아니라 광범위한 수집과 전시는 어느 때나 어느 곳이나를 불문하고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 꼭 프랑스가 아니라도 상관없으리라.
2019년 2월 2일 토요일, 12번째 노란 조끼 시위가 있는 날 오전부터 시위를 중계하는 실시간 유튜브채널을 이리저리 건너다니며 보았다. 오늘 심상치 않다. 지난주 시위 때 노란 조끼 대변인을 자처했던 이가 고무탄에 눈을 맞아 한쪽이 실명 위기라 한다. 80년대 말, 다연발 최루탄 소위 지랄탄이라 불리는 고약한 놈이 있었다. 손으로 들고 쏘는 단발 최루탄에 비해 페퍼포거(Pepper Fogger)라는 경찰 장갑차에서 쏘아대는 최루탄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지랄을 하며 시위대로 떨어졌다. 친했던 전기과 친구가 지랄탄에 눈을 맞아 세브란스병원에 며칠 신세 졌었다. 그때 그 병실을 지키고 있을 당시 병문안 왔던 서글서글한 눈매의 친구도 생각났다. 졸업하고 25년이 지나 재상봉 행사 때 병실 신세를 졌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옛이야기를 했더니 그런 적이 있었냐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기억은 선택적이다. 그와 나의 기억의 편린이 다른들 또한 어떠하리.
오늘로 12번째, 11월 중순에 시작하여 2월까지 왔으니 겨울 한 철 시위와 더불어 지낸 셈이다. 몸이 파리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노란 조끼 시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프랑스를 좀 더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려 한 점이 없지 않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2018년 9월 문재인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하였을 당시 마크롱의 언사를 보며 혁명으로 인류 보편의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를 구현하고 그 깃발 아래 세운 공화국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저 정도 수준의 안목밖에 되지 못하는가 하며 고개를 갸웃했었다. 하기야 우리나라 현대사의 대통령 면면을 보면 남 말할 처지가 아니기는 하지만.
집을 나섰다. 오늘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공화국 광장으로 향한 발걸음이지만 루브르에서 멈추었다. 루브르 토요일 무료 관람은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시모트라케의 날개를 한 번 더 보고자 발길을 돌렸다. 단순한 나의 기대는 유리 피라미드 앞에 늘어서다 못해 루브르의 안뜰을 가득 메우다시피 한 입장 대기 객을 보고 미련 없이 허물어졌다.
사진으로는 길게 선 대기 줄을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유리 피라미드 아래쪽에 개미 떼 마냥 관람객이 늘어서 있다.
기다릴 수 없어 돌아 나왔다. 루브르 박물관에 붙어 있는 뛸리히 정원에서 서쪽을 향해 걸으며 룩소르의 오벨리스크, 개선문 그리고 라데팡스를 바라본다. 길은 과거에서 미래로 뻗어 나가고 있는데 프랑스의 노란 조끼와 마크롱 정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폭력을 불사하며 의사를 관철하고자 하는 시위대와 장갑차를 동원한 프랑스 정부의 한 치의 물러섬 없는 태도를 보며 부질없는 질문이 꼬리를 문다.
뛸리히 정원의 문 사이로 오벨리스크 그리고 저 멀리 개선문이 보인다. 그 너머엔 20세기의 문인 라데팡스의 그랜드아치가 있다. 사진으로는 확인이 어렵다.
노란 조끼 시위 현장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문구는 RIC (référendum d'initiative citoyenne; 시민 발의 국민 투표)이다. 현안으로 제기된 의제 가운데 시민들의 동의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받은 사안에 대해서는 국민투표를 통한 법안 제정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가 RIC의 요체이다. 국민투표는 대통령 선거나 헌법 제개정과 같은 주권자의 결정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 제한적으로 적용되어 왔다. RIC, 즉 직접민주주의를 특정 여건이 갖추어진 사안에 대해 국민의 주권으로 법제화를 하자는 주장은 새롭고도 참신하다. 법치주의를 민주주의의 중요한 기반으로 삼고 있는 사회에서 민의를 법률제정에 반영하지 못하는 여러 폐해들이 나타났으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검찰 개혁, 사법부 개혁, 집값 안정을 위한 사회적 주택의 전면적 도입 등 국민이 진정 원하는 개혁은 언제나 입법의 문턱에서 좌절된다. RIC를 통해 주권자가 직접 법률제정과 개정을 할 수 있게된다면 이는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키는 사건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온라인과 모바일이 보편이 된 세상이 아니었으면 구현할 수 없는 제안이다. 물리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바꾸는 전형적 형태가 아닐까 한다. 내가 느끼기에 RIC는 한 마디로 입법, 사법, 행정의 권력을 시민이 되찾아 오자는 것이다.
RIC 플래카드를 몸에 두르고 나온 시위대, 노란 조끼 시위대를 그동안 관찰하면서 가장 많이 본 구호가 RIC 이다.
분수령은 올 5월 26일로 예정된 EU 의회 의원선거이다. 유럽의회에서 프랑스 의석수는 79석이다. 여기에 맞추어 노란 조끼는 총 79명의 후보를 내기로 하고 이미 10명의 명단을 발표하였다. 나머지 69석은 투표를 통하여 선발하기로 하였단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당 레퓌블리크 앙마르슈(LREM·전진하는 공화국)와 르펜이 당수로 있는 극우 정당 국민연합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노란 조끼가 세 번째로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노란 조끼 지지자들은 상당수가 국민연합으로부터 이탈해서 온 것으로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노란 조끼에 참여하는 이들의 이념 스펙트럼은 좌에서 우로 광범위하지만 주된 참여와 지지성향이 어떠한지 알 수 있는 여론조사 결과이다.
루브르의 무료 관람은 힘이 있다. 아마도 40만 점의 컬렉션이 그 힘의 원천일 것이다. 힘으로 제국을 건설하던 시기에 체계적으로 학습하며 전 세계에서 가져다 놓은 그래서 늘 방문할 때마다 도둑질도 이 정도 공부와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경이롭다는 복잡한 감성에 싸이고야 마는 것이다. 물론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구매하여 소장한 작품들도 상당하다.
에펠탑 옆에는 국립 케브헝리 박물관(Musée du quai Branly)이 있다. 전 세계 흩어져 살아왔고 지금도 사는 각양각색의 부족 유물을 전시한 곳이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건너온 가슴 조각에 넋을 놓았던 기메 박물관(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의 컬렉션은 여기에 비하면 아기자기한 수준이다. 눈길이 머문 곳은 문이다. 문짝을 그렇게 많이 떼어다 가져다 놓았다. 그들은 수집하여 전시하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중에 무플론 양의 머리를 새겨넣은 파키스탄 어느 부족의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보았다. 파리에 머무는 시간이 열흘은 되어야 이 무플론 양머리 문을 감상할 기회가 닿을 것이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을 것이다.
파키스탄 어느 부족의 무플론 양이 새겨진 문
파리의 역사 축에는 문 3개가 도열해 있다. 루브르와 뛸리히 정원 사이의 Arc de Triomphe du Carrousel, 샹젤리제 거리의 끝 별 광장에 서 있는 개선문 그리고 라데팡스의 Grande Arche. 지난 몇 세기 동안의 역사를 도시의 가로에 구현하여 공간적 맥락을 형성한 파리지앵들의 안목은 높이 치하할 만하다.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 프랑스인들은 이제 저 문을 열고 새로운 세상을 구현할 것인가. 노란 조끼와 현 정부가 대립하고 있는 양상을 보고 있자니 나는 착잡할 뿐이다. 하루살이 어찌 겨울을 논할 것인가.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만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자니 그저 눈 감고 길 찾는 나그네 같아 갑갑할 뿐이다. 역사의 축을 따라 걸으며 The Doors의 Riders on the Storm을 들었다. 리드싱어인 짐 모리슨은 파리의 페르라쉐즈 묘지(Cimetière du Père Lachaise)에 묻혀 있다.
오늘의 사족 : 1. 노란 조끼 세력은 이후 2개의 당으로 분화하여 각자 후보를 내고 선거에 참여하였다. 2. 두 당은 모두 유효득표율 5%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으로 유럽의회 진출이 좌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