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강빛마을 정원일기 1 - 목사동우체국의 7월
언덕을 올라가면 제일 먼저 흰구름이 맞아주는 곳. 흰구름과 초록숲 사이 주황색 스페인 기와를 얹고 있는 저택 109채의 대단지 곡성 강빛마을. 그 중 밝고 밝은 햇빛촌의 첫째 홀수 둘이 모인 11호는 거실 전면 창 앞에 푸르른 산이 가득하고 왼쪽으로 고개를 바짝 돌리면 멀리 지리산 노고단이 보이는 동남향의 이층집이었다. 이층에서는 앞산 위 하늘이 더 많이 보였지만 일층만으로도 내겐 너무 넓었다.
정읍에서 차에 실어 남도 반을 돌아온 짐을 집안에 부리는 데 느린 혼자 힘으로는 한참이 걸렸다. 그사이 마을 이장님이 잠시 들러 푸근한 미소로 맞아주셨다. 짐 정리를 거의 하고는 그토록 하고 싶던 산책을 했다. 반년만이었다. 마을 길에서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올해 첫 배롱나무 분홍꽃을 보았다. 화들짝 놀란 눈동자가 반짝 빛난 걸 꽃이 보고 내가 느꼈다. 마을입구 카페 ‘강빛커피’에 새로 온 젊은 지기는 저녁 먹을거리를 구하러 온 내게 우유 한 잔을 따라 주었다. 그렇게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보성강변에 여유있고 쾌적하게 안착한 강빛마을에서 7월 한달살이를 시작했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 집을 구하냐고 묻는데 주디에게는 키다리 아저씨가 있듯이 내게도 길목인 노신사가 한 분 계시다.)
다음 날 아침, 이장님의 권유로 구례장터에 갔는데 장은 못 찾고 농협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보았다. 가장 필요한 건 책상과 의자, 빨래 건조대였지만 먹거나 써서 없어지는 것 외에는 구매하지 않기로 했다. 수도꼭지에 정수필터를 갈아끼우고 물을 끓여 마시면서 패트병 생수도 사지 않았다.
강빛마을 햇빛촌 11호에는 냉장고가 두 대 있다. 145리터와 47리터. 한 달치 장봐 온 양을 보면 145리터를 써야 했지만 에너지소비효율등급이 5인데다 소음이 심했다. 정읍에서와 똑같은 크기의 47리터를 택했다. 에너지소비효율등급이 1이었고 소음도 약했다.
강빛마을 햇빛촌 11호에는 에어컨이 세 대 있다. 1층에 두 대, 2층에 한 대. 그런데 선풍기가 없다. 그래서 북극곰을 살리고 핵발전소를 줄이기 위해 에어컨을 산 적도 없고 웬만해선 설비된 에어컨도 틀지 않는 나는 삼복에 더위와 아주 매우 무척 가깝게 지내야 했다.
다음 날, 냉장고에 못 넣어 쉴듯말듯한 밥을 찬물에 헹궈 된장국에 끓여서 아침을 먹었다. 청소를 깨끗이 하고 좌식 테이블을 기둥 근처로 끌어다 마룻바닥에 앉았다. 그리고는 전면 창으로 눈을 들었다.
아~ 그런데, 왼쪽 1/4 지점에 낯익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첫날 창 바로 아래 키작은 남천을 보고는 흐뭇했었고 이후에는 멀리 가득한 산을 바라보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나무, 배롱이었다. 정읍에서도 사랑채 창 왼쪽에 배롱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별담리에는 내가 구해준 배롱나무들이 자그마치 아홉 그루다. 그리고 보름간의 도보순례 내내 가는 곳마다 나를 맞아준 배롱나무. 그 배롱나무가 이 곡성에도 있었다. 벅차오르는 감격에 펑펑 울었다. 대체 누가 나를 이토록 사랑해주신단 말인가. 내가 외로울까봐 가는 곳마다 배롱나무를 준비해 두신 그분께 나는 온마음으로 감사를 올렸다.
며칠 후 구례농협에 가서 270mm톱과 낫과 삼각호미와 조선호미를 샀다. 더 이상 남의 도움 받지 않고 스스로 정원을 가꾸려면 개인연장 정도는 구비해야 한다고 생각한 투자였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어디에 머물든 주인으로 행하라. 여수 선배가 해 준 조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어디에 가든 잠시를 머물러도 내집처럼 살았다. 정읍 정원과 텃밭도 애정으로 가꾸었고 별담리에서도 밭을 매고 배롱나무를 구하고 대나무를 쳐냈다. 비록 한달살이일지라도 강빛마을 정원을 내집처럼 가꿀 것이다. 그래서 동거할 수 없는 벌레 퇴치약을 실내 구석구석에 붙이고 정원 손질에 나섰다.
그런데 낫과 톱을 번갈아 사용해 배롱나무를 둘러싼 족제비싸리나무를 제거하면서 나는 또다시 주(主)와 부(部)에 대한 고민에 봉착했다. 건축조경 시 돈들여 심어놓은 관상수는 주요, 사람 손 타지 않고도 자립해 자라는 나무는 부가 되는 현실. 그 억센 생명력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기어이 없애고자 하는 인력(人力). 그 모든 시선의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세계에서는 소외된 이들에게 저절로 시선이 가면서도 자연계에서는 인간 위주의 낫질과 톱질을 무섭게 해대는 나. 나에게 과연 그럴 권리가 있는가. 그래도 배롱나무를 지키기 위해 다른 나무를 잘라야만 했다. 하지만 족제비싸리나무도 예쁜 생명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가지치기만을 했다. 어차피 단단한 나무뿌리 뽑을 힘은 없으니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하겠지만 그래도 아예 없애고 싶은 것과 잠시 생장을 늦추는 건 마음가짐이 달랐다.
강빛마을에는 밤이 칠흙같이 온다. 실내에 불을 켠 채 블라인드를 내리면 날벌레들이 똑똑똑똑 정신없이 창문을 두드린다. 자고 일어나면 어느 틈으로 들어왔는지 거실에 곤충들이 나뒹굴고 있다. 씽크대에 출몰하는 곤충들도 오색영롱하여 그 빛깔에 하염없이 빠져든다.
아침에 샤워를 하려고 잠옷을 벗었더니 뭐가 툭하고 욕실 바닥에 떨어졌다. 황금빛 도는 초록색 타원형 곤충이었다. 며칠 전 씽크대에서 보던 녀석이었다. 내 몸 어느 구석에 숨어있었을까? 물게 생기진 않았으니 놀랄 일도 없었다. 쓰레받이로 담아서 정원에 놓아주었다.
7월 중순의 이른 아침, 흑토마토, 키위, 메론 조각에 플레인 요거트를 뿌려 먹고 집을 나섰다.
보성강을 거슬러 따라 가다 다리를 건넜다. 얼마쯤 가다보니 목사동우체국이 있었다. 시골우체국은 낭만이다. 걸음이 멈추는 걸 어쩔 수 없다. 그 때 우체국에서 막 나온 여자분이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집에 한번 오라며 연락처를 적어주며 노란자두 두 알을 가방에 넣어주고 갔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우체국에 들어가 관제엽서를 찾았다. 요즘 수요가 없어 비치하지 않는다고, 백지를 주겠다 한다. 그럼 봉투도 필요한데……. 잠시 망설이다 종이를 받아 우체국에 앉아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체국 직원이 말을 걸었다.
“아카시아꿀로 청을 만들었는데 그게 얼까요?”
“글쎄요. 당도가 높아 잘 모르겠는데요.”
우체국 직원은 내게 건물 밖에 있는 야외 카페와 텃밭을 보여주었다. 모두 그분이 만든 것이었다. 알고 봤더니 그분은 목사동우체국장이었다. 집보다 오래 있는 직장을 아름답게 꾸미는 중이었다. 테이블에 손수 자수를 놓은 조각보를 깔아놓은 국장님은 하나뿐인 직원 명찰이 자석이라 무겁다고 천에 수를 놓아 이름표도 만들어주었다.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는 돌아오는 길에 순초록 논 사이를 지나는데 도라지꽃이 논물에 쳐박혀 있었다. 꺾어와 꽃병에 꽂아주었다. 샤워를 하면서 빨래를 한다. 입었던 옷을 비누로 빨면서 그 비눗물로 몸도 닦는다. 브런치로 호밀바게트와 에그스크램블을 먹는데 전면 창 밖으로 우체국장님이 키운 땅콩잎 위에서 본 잠자리가 친구들까지 몰고 와 떼로 날아다녔다. 겨우 초복이 지났을 뿐인데 <가을 우체국 앞에서>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그날 저녁, 강빛마을에서는 하우스파티가 열렸다. 노래가 있는 조촐한 무대가 마을 정원에서 열렸다. 마스크를 쓰고 삼삼오오 모인 주민들 위로 노을에 물든 구름이 어두워지는 파란 하늘에서 흘러갔다.
다음 날, 산책 후 아까시 청이 얼었나 궁금해서 목사동우체국에 들렀다. 국장님이 찔레꽃 얼음과 아까시꽃 얼음을 각각 두 잔에 넣어 냉차를 만들어 주셨다. 순수가 주는 청량한 맛이었다. 연이은 친절에 마음 같아선 우체국 적금이라도 들어주고 싶었으나 곡성에서 배달 온 관제엽서 열 장을 사서 이후 우체국에 들를 때마다 한 장씩 친구들에게 부쳤다.
목사동우체국장님과 만난 지 사흘째 날,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우체국장님과 은퇴하신 선배 국장님과 아동문학가인 목사동면장님과 함께 천태암에 올랐다.
665년 혜암율사가 창건하여 주석한 천태암은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찰이었다. 천하가 발아래 있는 듯 산 꼭대기에서 먹는 김밥과 샐러드는 우체국장님이 우체국 텃밭에서 키운 채소로 만든 성찬으로 63빌딩 뷔페 부럽지 않았다.
식사 후 고려 명종 25년에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자연석굴에 16나한을 모시고 법당와 요사를 중창하여 후학들을 제접한 법당으로 올라갔다. 법당 옆 알록달록 두꺼비 한 마리가 움직임 없이 천연덕스럽게 날파리 한 마리를 잡아 먹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양서류의 대담함에 자연만물 생명의 동등함을 느꼈다. 두려움은 본능적인 위협감이나 존재에 대한 판단작용에서 온다. 가끔 무서운 현상이 스치고 몇 초 후에 공포가 엄습할 때가 있다. 시각이 뇌로 전달되어 해석되기 전까지 아무 증세가 없다가 뇌에서 분석과 판단을 한 뒤에야 몸이 반응을 하는 것이다. 그 짧은 찰나가 지나고 두려움이 생성되는 경험을 했을 때 무지가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감각은 어디까지가 학습과 경험에 의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본능에 의한 것일까. 뇌과학자들은 조금이나마 알겠지. 엉뚱한 내 탐구심은 대주 스님의 녹차로 다스려졌다.
그 옛날 중국의 불교 성지 아미산을 닮아 아미산이라고 했다는 산 아래 한 때는 열여덟 개소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열(十,십)과 여덟(八,팔)을 합친 글자가 木(목)이어서 목사동면(木寺洞面)이라는 이 마을에 지금은 천태암만 남았다.
그날 초저녁에 전화 한 통이 왔다. 낮에 만난 면장님이셨다. 갑작스럽게 누군가를 소개해 주시겠다고 했다. 글 작업을 하려 했었고 강빛마을에선 밤외출을 한 적이 없었지만 나가보았다.
15km쯤 북쪽으로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푸른 공방이었다. 아~ 곡성에서 공방을 만나다니. 작년 봄, 고래가 헤엄치는 깊이의 바다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창작시간이 떠올랐다. 추억을 더듬으며 둘러본 작품과 연장에서 연륜이 느껴졌다. 나무와 금속으로 만든 공예품도 그러했지만 석각(石刻)은 신기하기만 했다. 구석구석 진열된 작품들을 보다가 내 눈과 손을 잡아끈 예술품이 하나 있었다. 11년 전에 벽조목(벼락 맞은 대추나무)으로 만들어져 나를 기다리고 있던 달팽이 한 마리. 나는 그 작품의 임자가 나임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날 처음 만난 공예작가님은 단 하나 남은 그 작품을 내게 선물하셨고 나는 기꺼이 달팽이 집이 되었다. 낙타가 별을 알아본 시간이었다.
낙타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25년 전 인도 델리에서 낙타를 탄 적이 있다. 불쑥 솟아오른 혹 사이에 올라 앉아 쑤욱 높이 올라 갔었다. 수많은 관광객을 태우고 도심을 느릿느릿 몇 발짝 걷던 낙타에게 나는 단지 가벼워서 고마운 손님이었을까? 그 시절 나는 어리석었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때 그 가엾은 나는 하나였을까 둘이였을까?
백로가 가로질러 날아가는 초록산이 열두 폭 정원처럼 펼쳐진 전창 앞에서 분홍꽃 세 다발 핀 배롱나무를 보며 브런치를 먹는다. 공방 수강생인 구례 셰프가 만든 천연 발효종 유기농 치아바타와 깜빠뉴에 목사동우체국장님이 키운 상추, 고추, 오이, 방울토마토로 호화롭기 그지없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풍경에 맛있는 음식이라도 혼자 먹으면 무슨 맛인디. 일중독 성향이 강한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한가롭고 편안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어쩌면 당분간 다시 누리기 힘든 이 부요함을 소중한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동안 너무 받기만 하지 않았나. 거저 받은 이 은혜를 나도 베풀고 싶었다. 그러나 엄중한 코로나 시국. 오고가는 발걸음 자체가 부담스러운 시절이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가.
그런데 사람이 그리운 내게 우편물이 하나 왔다. 6년 전 팽목항에서 만나 함께 뮤직비디오 ‘화인’을 찍었던 정미이모가 오래 전에 헌법 전문을 읽어달라고 한 부탁이 기억나서 1분 15초짜리 녹음파일을 보냈더니 ‘조카~ 세월을 아니?’라는 유튜브에 내 목소리가 실린 것이었다. 인터넷 세상에서 내 목소리를 들은 것도 놀랄 일인데 그것도 모자라 며칠 후에는 내 이름으로 선물이 도착한 것이었다. (물론 정미이모가 주소를 물어보긴 했다.) 낯선 고장 한달살이에 내 이름으로 온 택배라니, 한참이나 두근거려서 상자를 뜯어보지도 못했다. 강빛마을에 와서는 몸을 보호하느라고 커피와 여름맥주를 끊고 있었다. 그런데 선물이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커피였다. 그 커피를 목사동우체국장님과 직원과 목사동면장님과 우체국 앞에서 만났던 여자분과 나눴다.
다시 만난 그 여자분은 곡성군 농민회장이었다. 모종도 심지 않고 오로지 씨앗으로만 밭농사를 짓는 진짜 농부가 빌려준 작은 선풍기로 남은 며칠을 시원하게 지냈다.
곡성을 떠나기 사흘 전 아침, 보성 마지막 구간을 혼자 걷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목사동우체국장님이 점심식사를 하자고 했다. 서둘러 순례를 마치고 12시에 맞춰 우체국으로 갔다. 우체국 뒷방에서 우체국장님이 요리한 흑돼지 제육복음과 우체국 텃밭쌈으로 점심밥을 먹었다. 지금까지 먹어본 중 제일 맛있는 제육볶음이었다. 식사 후 공경과 사랑으로 갈아서 내려준 원두커피를 마시며 적재의 <별 보러 가자>를 들었다. 나는 무심한듯 엽서를 쓰며 테이블 위로 눈을 들 수 없었다. 우체국장님과 눈이 마주치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형식적인 말대신 함축적인 포옹을 했다.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든 그곳에서 엽서를 부치겠다고 했다. 받는 사람 : 아름다운 볕 목사동우체국장, 참으로 따뜻하지 않은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곡성이란 곳에 왔다. 가봤던 사람들이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 귀뜸했었다. 내가 본 곡성은 손타지 않은 자연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그 누구보다 일면식도 없으면서 하루 숙박비 십만 원은 족히 받을 수 있는 강빛마을 햇빛촌 11호를 한 달간 거저 빌려주신 고한석 선생님께 지면으로나마 감사인사를 전해 드린다. 살고 있는 사이 급작스레 집주인이 바뀌는 이변이 있었음에도 무슨 수를 쓰셨는지 아무 연고 없는 나에게 7월 한 달 편하게 지내다 가시라는 약속을 기어이 지켜주신 신의에 경의를 표한다.
정읍 만영재에서부터 아껴먹은 김장김치를 7개월만에 곡성 강빛마을에서 다 먹었다. 다음 정원에서는 배추 모종과 무 씨앗을 심을 수 있을까? 맥문동과 상사화 피는 계절이 왔으니 곧 꽃무릇을 볼 수 있으려나? 그곳이 어디가 될지 아직 모른다. 그렇지만 이 넓은 세상 어딘가에 나를 위한 작은 정원 하나 없겠는가. 미지란 막 피어날 꽃송이처럼 설레는 다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