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백련재 정원일기 4 – 나를 울리는 것들
내 이름 앞으로 온 우편물을 받아보면 내가 그 집에 머물고 있음을 실감한다.
보통 1~3개월의 입주 기간을 주는 다른 레지던스에 비해 5개월이나 살게 해주는 <백련재 문학의 집>에서 나는 그런 기쁨을 누렸다.
정미이모 모친의 누룽지, 둘째 남사친의 커피포트, 아동문학가 정의 신간, 이다의 강화 속노랑 고구마, 석록의 울산북구 주민투표 백서와 입주작가 토크 콘서트를 위한 <탈핵신문> 30부, 도반의 가을빔과 와인과 사과와 차와 커피, 풍주쌤의 커피.
나는 백련재에 오자마자 두 가지 우편물의 수신지를 변경했다. 매달 오는 <탈핵신문>과 격월로 오는 <녹색평론>. 주소 이전은 임시숙소가 마치 거주지로 바뀌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처음이었다.
11월 초에 녹색평론 11-12월 181호가 배송되었다. 받자마자 펼쳐 읽었다. ‘책을 내면서’부터 읽다가…… ‘그리하여 결국 30주년이라는 고비에서 1년 휴간이라는 과감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는 송구스런 말씀을 드린다.’라는 문장을 맞닥뜨렸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다시 읽어보았다. ‘휴간’이라고? 나는 뜨거운 기름에 물방울 튕기듯 서울 녹색평론사로 전화를 했다.
“저는 2000년부터 정기구독한 독자입니다. 실업 기간에도 구독을 끊지 않았습…….”
눈물이 차올라 말문이 막혔다. 나는 어떻게 독자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편집위원들만의 결정으로 휴간을 할 수 있느냐고 울먹울먹 따졌다. 작년에 김종철 선생님 돌아가시고 난 삶을 바꾸었다고, <녹색평론>은 친자연으로 살기 위해 현실을 어렵게 지탱해 나가는 이들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의 끈이었다고, 휴간 도중에 아무리 좋은 단행본이 나와도 <녹색평론>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독자부 직원은 21년 정기구독자인 나를 매우 정중하고 친절하게 달랬다. 아무리 푸념과 항의를 해도 바꿀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출판계 불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게다가 친환경·생태잡지라니…….
통화하는 동안 작년 늦여름에 처음으로 정읍 정원에서 훌떡 벗은 채 낫질을 하던 내가 떠올랐다. 포르르 날리던 배롱나무꽃에 반해 그 나무를 구하기 위해 낫질을 하던 내 모습이. 그때 처음으로 짙은 고동색 흙을 갈아엎으며 故(고) 김종철 선생님이 못 살아보신 농업의 삶을 나라도 살아보겠다고, 그래서 그분의 뜻을 이어보겠다고 철없이 다짐했던 내가, 작년에 정읍에서 태풍에 쓰러진 가녀린 연둣빛 줄기 뭉치를 잡초인 줄 알고 뭉텅뭉텅 뽑아내고는 올해 백련재에 와서야 그게 코스모스인 줄 알게 된 내가, 그런 주제에 <정원일기>를 일 년 넘게 쓰며 정원이 있는 방 한 칸을 꿈꾸는 내가 믿고 의지할 데는 아무 데도 없었다. 팔리지 않는 생태잡지가 근근이 버텨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 하도 어려워 읽고 또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 난해함이 자연을 알아가는 과정이려니, 읽다 보면 어딘가엔 쌓이겠지 하며 책장을 넘기면서도 두 달에 한 번 책이 배달되면 한 권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고 있었다.
비움실천 하느라, 20년가량 해마다 사던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도 버리고 중고로 팔았으면서도 먼지 그득한 <녹색평론>만큼은 손대지 않았다. 언젠가 정원이 있는 집에 책장이 생기면 <녹색평론>부터 갖다 꽂아놓아야지 하던, 상패보다 먼저 진열해 놓고 싶던 귀한 책들이었다. 폐간이 아닌 휴간이라 1년 후에 복간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일 일도 모르는 세상에서 1년 후를 어떻게 기약하는가. 다만 나는 절대 웹진으로 발행할 생각은 말라고 경고했다. IT도 모자라 AI까지 등장하는 세상에서 <녹색평론>마저 웹진으로 발간된다면 나는 정말이지 인터넷망이 안 닿는 산골 오두막에 들어가 모든 걸 다 끊고 숨어버리고 싶다.
⚘
아침이나 오후 산책 때, 나는 녹우당 은행나무에게 간다. 가서 나무에 손을 대고 스르륵 한 바퀴 돌고 온다. 원주에 피나무가 있었듯이 해남에도 찾아갈 나무가 있다는 건 다행스럽다. 다만 너무 유명한 게 흠이라면 흠일까. 거의 매일 은행나무잎이 언제 물드나 찾아가 확인해 보던 어느 날, 나는 땅에 떨어진 은행알들을 주웠다. 백련재 최 여사님이 알려주신 덕분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난 그것들을 주울 생각도 못 했다. 서울에선 가로수 열매들이 서울시 재산이라고 지나가는 시민들이 못 가져가게 하기 때문이다.
9월 말 이른 아침, 처음으로 녹우당 은행나무 밑에서 은행을 줍다가 충헌각 은행나무에 은행이 더 많이 떨어져 그리 가서 주웠다. 그런데 동네 아저씨가 와서 나무를 흔들어주었다. 미안하지만 고맙지 않았다. 떨어진 것만 주워도 족했고, 무언가를 강제로 하는 게 마땅치 않았다.
10월 중순 주말 늦은 오후에도 녹우당 은행나무 아래에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 은행을 줍고 있었다. 그런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에 띄게 말쑥한 어떤 신사가 충헌각에서 나와서 내게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은행 주우세요? 많이 주워가세요.”
나는 ‘무슨 상관이야?’라는 얼굴로 샐쭉하게 쳐다보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신사가 녹우당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내가 줍고 있던 은행의 주인이 허락 없이 자기 재산을 주워가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와 마음 놓고 가져가라고 허락한 셈이었다. 삼개옥문적선지가(三開獄門積善之家) 해남 윤씨 시조 어초은 윤효정의 자손다웠다. 나는 그날 고산 윤선도 직계 자손의 안내로 녹우당 안채까지 관람할 수 있었다.
‘입주작가 토크 콘서트’를 정미이모와 함께 무사히 마친 11월 중순 주말, 은행을 주우러 갔을 때는 은행나무잎이 샛노래지기도 전에 잎이 벌써 나뭇가지 끝에서부터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자연이 준 선물을 땅바닥에서 주워 가는 시간에 나는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 같기도 하고 구약성경 속 ‘룻’ 같기도 하다. 보아스를 만날 꿍꿍이는 없다. 그저 자연이 저절로 버린 것을 줍는 시간은 구차하지 않고, 이미 여물어서 고무장갑으로 문지르기만 하면 뭉그러져 벗겨지는 은행껍질이 지금이 꼭 맞게 거둘 때라고 알려주는 듯해 자연스럽다. 그 시간의 흐름을 탐이 딱딱할 때 주워다 비닐에 넣고 억지로 뭉그러뜨리는 것보다 훨씬 마음 편하다.
은행을 다 줍고 돌아오는 길,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와 있었다. 땅끝순례문학관에서였다. 가보니 미순이 이탈리안 피자치즈를 챙겨주었다. 혼자 먹기엔 많아 방마다 나눠주었다. 하루 두 끼지만 오늘은 뭘 먹나 걱정 하나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식탐이나 식욕이 별로 없지만 가끔 먹고 싶은 게 있기도 하다. 치즈를 보니 스파게티를 먹고 싶었다. 하지만 내게는 통밀국수뿐이었다. 국수를 삶아서 반병 남은 스파게티 소스에 양배추와 양파와 파를 다져 넣고 끓여 국수에 붓고 치즈를 얹어 먹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아니 내가 뭐라고 이런 사랑을 받나 싶어서. 그날 낮에 배추를 묶어주시던 이 주사님도 내가 낙엽을 쓸어주었다고 슬쩍 사과 한 알을 챙겨주셨다. 그분은 작가들 추울까 봐 근무시간 중과 근무시간 후의 난방예약을 다르게 조정하신다. 박 주사님은 내가 바람에 열리는 창호지 문 때문에 밤에 무서워하자 빗장을 달아주셨고, 창호지 문과 유리문 사이로 외풍이 심해 춥다고 하니까 투명 문풍지 테이프를 붙여주셨다. 갑자기 무릎관절이 아파서 못 나오시는 최 여사님은 가끔 카레나 짜장 소스를 여유 있게 만드시면 한 대접씩 주셨다. 상주작가는 김치나 생채를 담그거나 수강생들이 선물을 가져오면 나눠주었다. 없는 사람 사정은 없는 사람이 알기에 입주작가들끼리도 서로 가진 것들을 조금씩 나눠 먹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떠날 때가 다가오자 그것들이 모두 사랑이었음을 느낀다.
☆
11월 셋째 주 토요일, 텃밭에 가보니 가운데 있던 나무가 뎅겅 잘라져 있었다. 그날은 9월부터 매달 하던 땅끝순례시문학콘서트 세 번째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벼르고 벼르던 시인을 만나러 책 두 권을 챙겼다. 싸들고 다니는 스무 권 남짓한 책들 중 두 권이나 그의 책이니 내 인생에 어지간한 비중인 셈이다. 2년 전만 해도 나는 그를 몰랐다. 새로운 꿈의 설계도를 그리다가 건축 불허가 난 자리에서 그의 책을 소개받았고, 예정대로 집을 나와 전국을 떠돌았다. 작년 여름에야 그의 책 두 권을 샀으며 외로울 때마다 우아하려고 기를 썼다. 거듭되는 낭패의 원인인 양 시인을 만나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제비꽃 주워온 시인은 ‘거친 주름살이’ 진 소년 같았고 올해 막 은퇴한 교수답게 여유로웠다. 웬만한 대거리에는 꽃잎으로 뺨을 치듯 빠져나갈 게 뻔했다. 게다가 ‘제 冊(책)을 두 권 들고 다니시니 세상의 어느 거리에서 다시 만나면 밥 두 그릇, 커피 두 잔 사겠습니다’라고 적어 주었다. 그의 그림같은 자필을 차용증 삼아 들고 다니리라. 언젠가 다시 만나면 내 방랑을 보상받듯 꼭 밥과 커피를 얻어먹고 말리라.
그날 밤, 다시 에루화헌에 갔다. 문학콘서트에서 음악공연을 한 ‘등걸’이 그곳에서 머문다 했다. 화야와 나는 모닥불을 피웠고, 잠시 후 모여든 이들의 기타 선율과 노래가 하늘 별밭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노래가 다시 흘러나왔다.
‘해는
이곳에 와서 쉰다
전생과 후생
최초의 휴식(이다)’
으로 시작되는 노래가.
‘How beautiful it is!’ 딱 한 사람만 더 있으면 완벽할 세상에서 나는 우아해서 서글펐다. 그래서 손수건을 두 눈에 꾹 대고 숨을 죽였다. 평소 건반을 치던 나무가 기타를 치며 ‘루루루루’ 노래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래판은 막을 내렸다. ‘나그네 설움’ 3절을 들으며 백련재로 돌아오는 길,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가야 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
새벽 별 찬 서리가 뼈골에 스미는데
어데로 흘러가랴 흘러갈 소냐’
1940년 백년설이 내 마음을 대신 노래해 주누나.